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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반 고흐-104화 (59/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104화

25. 포스터(7)

조용히 해달라고 해서 그럴 사람들이 아닌 듯하다.

신경 쓰지 않고 그림이나 그려야겠다.

고양이와 해바라기라.

연한 갈색 물감을 붓 끝에 살짝 묻혀서 캔버스 하단에 고루 펴 발랐다.

“고양이는 얼룩무늬가 귀엽더라고요.”

그 위에 노란색 물감으로 대강 고양이의 위치를 잡았다.

“여기에 잠든 고양이를 그릴 거예요. 여기가 얼굴, 여기 튀어나온 게 꼬리. 좀 더 그릴게요.”

왼쪽으로 누운 고양이와 배를 까뒤집고 누운 고양이, 기지개를 켜며 하품하는 고양이, 식빵처럼 누운 고양이를 상상하며 형태를 잡아나갔다.

무슨 말을 하고 있나 궁금해서 채팅창을 보았다.

└고양이 ㅇㄷ?

└해바라기 ㅇㄷ?

└고양이 그린다면서요.

“그리고 있잖아요.”

붓으로 고양이들을 가리키니 사람들이 이번에도 물음표를 적어서 올린다.

“기다려 봐요.”

그중에 한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친구가 미술관 가자고 해서 따라갔는데 너무 어려워요. 미술 공부 어떻게 해야 해요?

미리 사용했던 연한 갈색과 노란색을 조금씩 섞으며 답했다.

“공부하려고 하면 재미없어요. 하지 말아요.”

위치를 잡아둔 고양이들에게 무늬를 그려주었다.

└하지 말랰ㅋㅋㅋㅋㅋ

└아니, 잘 알려줘야지ㅋㅋㅋ

└고훈, 충격 발언, “미술 공부 하지 마.”

“그런데 정말 그래요. 관심도 없는데 공부하려고 하면 얼마나 힘들어요.”

그림뿐만이 아니라 모든 게 마찬가지다.

“좋아하는 그림이 생기면, 그 그림에 대해서 알아보세요. 좋아하니까 모르는 걸 알게 되면 재밌을 거예요.”

무늬를 그렸던 물감에다가 노란색을 좀 더 섞었다. 바닥에 닿은 면처럼 어두운 곳에 툭툭 더해준다.

“그래도 부족하면 같은 작가의 다른 작품을 찾아보게 될 거예요. 시간이 지나면 그 작가 자체에 대해서 궁금하게 될지도 몰라요. 작품들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도 있고. 예전에는 이렇게 그렸는데 지금은 이런 그림을 그리는구나 같은 걸 알 수 있을 거예요.”

어두운 갈색을 좀 더 섞어 그림자를 완전히 잡아주었다.

그 색을 그대로 써서 수염을 그려 넣었다.

“굳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그 작품이 얼마나 대단한지 같은 거 알려고 하지 말아요. 좋아하면 자연스레 알고 싶어지고, 몰라도 좋아할 수 있어요.”

식빵처럼 엎드린 녀석은 조금 더 짙게 그렸다.

“미술 공부를 하고 싶어서 명화집을 봐도, 자세하게 설명하는 해설집을 봐도 와닿지 않을 거예요. 공감이라는 건 지식이 아니거든요.”

이번에는 회색을 아주 조금 섞었다. 고양이의 털을 아주 사실적으로 보이게 할 거다.

“그리고 아무리 뛰어난 작품이라도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을 순 없고요.”

그림자를 잡았으니 밝은 부분을 그릴 차례다.

붓을 바꿨다.

“미술관에 가서 여유를 가지고 둘러보세요. 그러다 어느 순간 당신에게 다가오는 작품이 있을 거예요. 그 만남을 소중히 여기시면 돼요.”

이 녀석은 어떤 표정으로 그릴까.

그런 생각을 하며 채팅창을 보니 또 여러 글이 올라오고 있다.

└오 신기해 고양이처럼 되네?

└해바라기 ㅇㄷ?

└애기가 왤케 말을 잘해 ㅠㅠ

└근데 그러면 미술관 가는 이유도 없는데.

└앙리 마르소가 평소에도 빌어먹을 꼬맹이라고 불러요?

└진짜 완전 공감. 좋아하지도 않는 걸 어떻게 공부해. 그게 일이지 취미임?

“미술관에 가는 이유는 바에 가는 거랑 같아요. 멋진 만남을 기대하고 가는 걸 수도 있고, 지친 하루를 위로받고 싶어서 갈 수도 있죠.”

└……네?

└내가 방금 뭘 들은 거지.

└?

└멋진 만남을 기대하고 바에 간댘ㅋㅋㅋㅋㅋ돌겠다 진짜ㅋㅋㅋㅋ

└아닠ㅋㅋㅋㅋㅋ 무슨 9살짜리 애가 저런 말을 해ㅋㅋㅋ

└너 9살 아니지.

└이거 고훈이 그림만 그리고 누가 더빙하는 거야? 애가 할 말이 아닌데? ㅋㅋㅋㅋㅋ

└나 ‘멋진 만남’이란 단어 실제로는 처음 들어봨ㅋㅋㅋㅋ 8, 90년대냐곸ㅋㅋㅋ

노란색과 옅은 노란색 그리고 하얀색을 섞으며 말했다.

“처음부터 다 알려고 하면 부담스러워요. 상대도 나도. 그러니까 얼굴도 익혀 나가면서 평범하게 대화해 보는 거예요. 한 번 가보셨다고 하셨는데, 그 작은 용기로 충분해요.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다니다 보면 분명 멋진 일이 생길 거예요.”

밝은 부분과 반사광이 생기는 면을 툭툭 두드렸다.

이번에는 넓적한 붓을 들었다. 위쪽에는 좀 어두운색을, 아래에는 밝은색을 찍었다.

털과 같은 질감을 주기 위해 톡톡 찍으면서 털 방향을 고려하며 붓을 밀었다.

└누구 제일 좋아함?

└어떤 그림이 제일 좋아?

└앙리 마르소랑 밥도 같이 먹어요?

└나 근데 좀 소름인 게 쟤 진짜 말하는 게 애 같지가 않아.

└ㄹㅇ ㅋㅋ

└훈이한테는 멋진 일이 뭐였어요?

└학교는 안 다님?

└오 고양이 맞네. 네 마리.

렘브란트 반 레인, 요하네스 베르메르, 장 프랑수아 밀레 선생님에게 크게 감복했고 일본의 우키요에는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당시 파리에 만연했던 인상주의와 우키요에를 접하면서 색을 다루는 방법을 연구하게 되었으니 무엇 하나 빼먹을 수 없다.

그러나 그런 걸 말해봤자 내가 빈센트라고 고백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조속이란 사람의 숙조도가 인상 깊었어요. 화려한 색과 자세한 묘사가 없이도 너무나 멋진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어요.”

눈과 입도 그려주자.

“할아버지의 해송은 정말 충격이었어요. 작업실 한쪽에 나무가 있더라고요.”

경계를 다듬을 필요가 있다.

“미래 이모가 할아버지한테 선물한 작약이란 그림 있는데. 제 생각엔 이 세상에 그보다 예쁜 작약은 없을 거예요.”

파블로 피카소 그림도.

툴루즈 로트렉이 내가 죽은 뒤에 그린 그림도 모두 정말 인상 깊었다.

└앙리 마르소는?

└앙리는?

└내 생각에 앙리 자기 언급해 주나 안 하나 기다리고 있었음ㅋㅋㅋ

└오열한닼ㅋㅋㅋㅋㅋ

“아. 맞아요. 앙리 마르소도 멋졌어요. 휘트니 비엔날레에 출품한 그림자 다들 보셨어요?”

네 방향으로 누워 있는 고양이들 사이에 꼬리를 그려주었다.

“어떻게 전시할지도 고려하면서 작품을 만드는 건 생각해 보지 않았거든요. 대단한 사람이에요.”

고양이들이 엉덩이를 맞대고 있는 쪽에 얼룩무늬를 좀 더 더해주니 반쯤 완성되었다.

└헐 ㅁㅊ

└해바라기는 언제 그리나 했는데 지금 보니 고양이들 누워 있는 게 꽃처럼 있네.

└자세가 다 꽃잎이었구나. 꼬리도.

└도랐다 진짜.

└이걸 즉흥적으로 구상했다고?

이상한 소리를 많이 하고 집요한 사람도 있지만 사람들과 이야기하며 작업하는 게 생각보다 재밌다.

그림이 어느 정도 형태를 갖추자 기뻐하고 놀라는 반응도 볼 수 있고.

가끔 심심풀이로 해보고 싶은데 방태호에게 어떻게 하는 건지 물어봐야겠다.

시간을 확인하니 아직 꽤 많이 남았다.

캔버스에서 조금 떨어져 전체적인 구도를 확인하곤 다시 앉았다.

“가장 중요한 걸 안 그렸어요.”

빨간색을 짜 두지 않았다.

나무통에서 카드뮴 레드를 꺼내 조금만 짰다. 흰색을 아주 조금씩 묻혀 흰색과 섞었다.

혀랑 발바닥을 그리고 채팅창을 보니 ‘편안’이란 단어가 많이 보인다.

그림을 완성하고 차분히 채팅을 보고 싶어서 집중했다.

질감을 좀 더 살리고 틈을 채우기를 얼마간.

썩 마음에 든다.

촬영진들이 작게 감탄하는 소리가 들려 뿌듯하다.

방송 보는 사람들도 좋아한다.

└예쁘다.

└아니 진짜 너무 신기해ㅋㅋ 어떻게 저렇게 그리지?

└ㅗㅜㅑ

└ㅗㅜㅑ

└앙리 손 잡아본 적 있어요?

└해바라기 왜 좋아함?

└아 진짜 고양이 너무 귀엽다.

└저거 이미지 바탕화면에 해두고 싶다. 올려주면 안 됨?

└평소에는 뭐 하고 놀아?

방송 시작할 때부터 앙리 이야기만 줄곧 물어보는 사람이 눈에 띈다. 대체 뭐가 궁금한 건지 모르겠지만 계속 무시하기도 미안해서 대답해 주었다.

“손은 안 잡았고 코피 터뜨린 적은 있어요. 바탕화면? 평소에는 색칠놀이해요. 그림 말고 다른 거? 다른 거 뭐가 재밌는데요? 아, 책 보는 거 좋아해요. 소설. 혹시 로빈슨 크루소 알아요? 다니엘 디포가 쓴. 알아요? 재밌죠?”

* * *

쉬민케 직원들은 고훈이 그림을 완성하는 과정을 보며 감탄할 뿐이었다.

해바라기처럼 누워 있는 고양이들은 제각기 다른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몸을 쭉 늘려 기지개를 켜거나.

다리를 오므려 졸고 있거나.

세상 편한 얼굴로 자는 모습 등이 꽃잎처럼 보였고 중간중간 뻗친 털과 꼬리 덕분에 해바라기의 작고 빼곡한 꽃잎 같았다.

교묘하게 맞닿은 네 고양이의 엉덩이 얼룩무늬는, 해바라기 가운데의 통상화처럼 어울렸다.

시청자들이 그리길 바라는 것을 보고 곧장 구상하여 그렸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어떻게 천재 화가로 명성을 쌓아나갈 수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영화 작업 할 때 뭐 하냐고요?”

고훈이 채팅창에 올라온 질문을 보고 잠시 고민했다.

“인물이랑 배경, 이야기를 이해하는 게 먼저예요. 그다음은 고증이고. 지금은 그걸 바탕으로 설정화를 그리고 있어요.”

말도 막힘없이 하는 걸 보니 정말 천재가 따로 있는가 싶었다.

3,000명으로 시작했던 방송은 어느덧 44,000명을 넘어가고 있었다.

구독자 수가 3만 명이 채 되지 않았던 쉬민케 공식 채널의 구독자 수보다 많은 인원이 몰려든 것이었다.

고훈이 생방송을 한다고 기사를 내는 등 홍보를 하긴 했지만, 첫 방송인 만큼 이렇게까지 효과가 좋을 거라곤 기대하지 않았다.

“팀장님.”

직원이 로베르트 마이어에게 핸드폰을 보였다. 쉬민케와 고훈에 관련한 검색어가 검색 순위 상위에 노출되고 있었다.

다양한 국가에서 시청하는 만큼 독일 외 국가에서도 좋은 반응을 기대할 수 있을 듯했다.

로베르트 마이어가 팔꿈치로 방태호를 툭 밀었다. 오랜 친구가 고개를 돌리자 슬며시 미소 지었다.

방태호도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시청자 중 한 사람이 오늘 팬티 무슨 색이냐고 물었을 때는 혹시나 고훈이 충격받을까 봐 아찔했지만.

채팅창을 유심히 감시하던 방태호 덕분에 늦지 않게 차단할 수 있었다.

한국 트위티나 뉴튜브 등에서 오랫동안 밈으로 자리한 질문이긴 하지만 어린아이에게는 적절하지 못했다.

로베르트 마이어가 혀를 내둘렀다.

“대단하네. 뭐, 스트리밍 준비라도 하는 거야? 왜 이렇게 잘해?”

“그러게. 그쪽도 알아봐야 하나 싶어. 본인도 저렇게 즐거워하고.”

두 사람이 고훈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시간도 많이 남았으니까 재밌는 이야기해 줄게요.”

고훈은 카메라 앞이라고 긴장하지도 않고 스스로 화제도 잘 만들어나갔다.

“8월 정도 되면 귀뚜라미가 많아지거든요. 밀밭에 가면 특히 많은데, 이게 나쁜 곤충을 잡아먹어서 일부러 많이들 풀어놔요. 그래서 밀밭 주변에 있으면 밤에 귀뚜라미 우는 소리가 들리는데, 이게 잠 안 올 때 엄청 좋아요.”1)

고훈이 갑자기 꺼낸 귀뚜라미 이야기에 시청자들이 당황했다.

└갑자기 귀뚜라미 이야기는 왜 꺼냌ㅋㅋㅋ

└책에서 봤나 보다ㅋ 귀여워

└아, 귀뚜라미는 못 참지.

└원래 저 나이때 애들이 곤충 좋아함 ㅋㅋㅋ

└귀뚜라미 과자도 있는데.

“귀뚜라미 과자? 먹어요?”

고훈이 채팅창을 보고 깜짝 놀랐다.

└네덜란드나 이런 데에선 대체 식품으로 많이 먹는대 ㅇㅇ

└우리나라에서도 먹음. 귀뚜라미전으로 부쳐 먹던데.

└우웩

└ㅁㅊ;; 그걸 왜 먹어

└튀겨 먹지 않음?

└그건 메뚜기 아닌가?

└과자는 갈아서 안 보임. 고소하고 맛있대.

└미래 단백질 공급원으로 중요함. 소가 뀌는 방귀랑 똥 때문에 지구가 아야 함.

└정말 소 때문일까?

고훈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마음에 평화를 안겨주는 울음소리와 해충까지 먹어주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귀뚜라미를 먹는다고 하니 충격이었다.

* * *

1)엘리자베트는 오빠 빈센트 반 고흐에 대해서 “오빠는 어렸을 적부터 모든 곤충의 이름을 다 기억하고 여러 곤충을 수집해서 분류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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