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103화
25. 포스터(6)
19세기 영국은 지옥이었다.
방적기가 발명되고, 식민지를 늘려나가며 시장을 확보한 영국은 천을 만드는 족족 팔아 재꼈다.
천을 짜내기 위해서는 양모가 필요했고, 당연히 양모 가격은 급등했다.
지주들은 이윤을 높이고자 경작지를 없애고 그 위에서 양을 길렀다.1)
하루아침에 생계 수단을 잃은 소작 농부들은 굶어 죽거나 강도가 되었다.
그나마 영국 정부와 교회가 나서서 이들을 보듬으려 했지만, 그것이 더 큰 비극을 낳았다.
부랑자들을 모아 양모 공장에서 일하기를 강요했고, 가혹한 대우에 지쳐 도망가면 귀를 잘라냈다.
귀를 한 번 베인 사람은 목을 베었다.
그렇게 농부들은 한순간에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국가와 종교가 강제했기에 그들은 공장장에게 반항할 수 없었다.
성인 남자는 하루 18시간을.
여자는 설령 임신했더라도 15시간, 아이들은 12시간씩 학대받았다.
농부였던 이들은 순식간에 국가와 자본가들의 노예가 되어, 생명을 깎아가며 그들의 주머니를 채워주었다.
발전하는 기술과 증식되는 자본 아래 수많은 생명이 꺼져갔다.
내게서 그림을 사는 이들이 그 생명을 먹어 치우는 돼지 새끼들이라는 것을 깨닫고 난 이후로는 차마 화상 일을 계속할 수 없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다른 일을 찾을 수 있진 않단다.”
상념에 젖어 있었던 모양.
할아버지의 말씀에 정신을 차렸다.
“그러니까요. 그런 사람들은 어떡해요?”
“흠. 그래서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오고 있지만 아직은 논의하는 정도야. 사회가 변하는 속도를 법과 제도가 따라가지 못하는 거란다.”
“…….”
그때와 똑같은 상황을 맞이한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좋을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아직은 알 수 없다.
* * *
다음날.
로베르트 마이어의 안내를 받아 쉬민케 사옥에 도착했다.
입구에 색상표처럼 보이는 조형물이 있다. ‘X’를 닮은 상징물 표면은 달팽이 모양이 그려져 있고 안에서부터 바깥쪽으로 빨주노초파남보로 순서로 칠해져 있다.
“왜 항상 건물 앞에는 조형물이 있는 거예요?”
규모가 있는 건물 앞에는 꼭 이런 식으로 뭔가가 설치되어 있었다.
“법으로 정해져 있어.”
방태호가 나서서 설명해 주었다.
“나라에서 정한 규모 이상의 건물을 지으려면 건축 비용의 일정 비율을 미술품 설치하는 데 써야 하거든. 로베르트, 독일은 비율이 어떻게 돼? 공공미술품.”
“1%일 거야.”
건물값의 1%를 미술품을 전시하는 데 써야 한다는 말이다.
“왜 그런 법을 만들었어요?”
“예술가들을 위해서지. 이렇게 법으로 정해져 있으면 일이 생기잖아? 도시 경관도 좋아지고.”
자발적인 게 아니라 강제라고 하니 좀 이상하다.
게다가 예술가를 위한 법이라는 설명도 어폐가 있다.
“유명한 사람들은 돈 잘 벌잖아요? 의뢰하는 사람도 기왕에 의뢰할 거면 유명한 사람에게 부탁할 거고.”
“맞아.”
방태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법을 바꾸었어. 미술품을 설치하는 대신 비용의 일부를 예술가 협회에 주는 걸로.”
“협회는 어떻게 믿고요?”
방태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못 믿어. 사실 아직도 말이 많아.”
“폐지해야 한다는 말도 있지만 예술계에 피해가 클 거라고 판단해서 조심스럽단다.”
할아버지가 방태호의 설명을 부연했다.
자동화도 그렇고.
법도 그렇고 심지어 초등학교에서 배우는 내용도 그렇고 지금은 세상이 너무 복잡하고 어렵다.
대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 걸까 싶다.
그런 생각을 하며 로베르트 마이어를 따라가니 여러 사람이 우리를 반겼다.
쉬민케의 홍보를 담당하는 직원들이라고 한다.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오후에 촬영을 설명받았다.
“그리고 싶은 걸 두 시간 동안 그리면 된다는 말씀이시죠?”
“네. 무엇이든 상관없어요. 카메라는 신경 쓰지 마시고 준비한 도구로 그림만 그려주시면 돼요.”
답사 다니느라 태블릿을 가지고 놀거나 색칠놀이 공책으로 아쉬움을 달래던 차였다.
잘되었다.
“그리고 가끔은 채팅창 보고 이야기를 해주셨으면 해요. 팬들하고 가볍게 소통하는 거죠.”
‘대화를 나눠요’ 같은 건가 보다.
그때는 진행자와 대화하는 게 전부라 아쉬움이 남았다.
팬 사인회도 정신없이 그림을 그려주느라 느긋하게 대화할 수 없었으니 이 또한 잘된 일이다.
“굳이 계속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부담 가지지 않아도 돼.”
“부담 없어요. 말하는 거 좋아해요.”
예전에는 테오와 함께 밤을 새우며 예술을 논했다.
친분을 나누던 화가들과는 물론이고, 그것이 모욕이 아니라면 서로 격식 없는 토론을 종일 이어가기도 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게 좋을까.
좋은 성경 구절을 미리 골라두는 게 좋겠다.
노동자들에게 들려주었던 설교 중에 마음에 드는 것도 있고 말이다.
혹은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놀라운 곤충들에 대해서 알려주는 것도 좋은 일일 것이다.
할아버지의 의견을 구하고자 물었다.
“할아버지.”
“음?”
“성경 구절을 읽어주는 게 좋을까요? 아니면 곤충 이야기를 하는 게 좋을까요?”
“……할아버지는 그림 이야기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래요?”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방태호에게도 의견을 구하려고 시선을 옮기니 목을 아주 격하게 움직여 동의했다.
“그럼, 식사하러 갈까요?”
직원들과 함께 쉬민케의 직원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다른 음식은 비교적 익숙한 것들인데 돼지고기를 독특한 향료에 절이듯 나온 요리가 무척 맛있었다.
식사를 마친 뒤에는 잠시 주변을 산책하며 무엇을 그릴지 고민하다가 촬영 시간이 다가왔다.
팔레트와 붓을 든 채 자세를 취하면 사진기사들이 홍보용 사진을 찍어주었다.
요구하는 게 많고 또 지루했지만 바로 뒤에 팬들과 대화할 수 있기에 참을 만했다.
“작가님, 이쪽으로 오시면 돼요.”
“네.”
“저기 카메라 보이죠? 저기도.”
직원이 세트장에서 간단히 어느 방향에 카메라가 있는지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어떤 자세에서 캔버스를 가려지는지 확인하고 채팅창은 어떻게 보는지도 알려주었다.
잠시 후.
채팅창을 보고 있으니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3,000명이나 들어왔다.
알아볼 수 없는 언어도 있지만 대부분 영어나 프랑스어, 한국어도 있어서 크게 지장 없을 듯하다.
└고훈이다.
└와 생방송!
└귀여워 ㅠㅠ
└진짜 고훈이네.
└그럼 진짜지 쉬민케가 어그로 끌려고 했겠냨ㅋㅋㅋ
“안녕하세요. 고훈입니다.”
팔레트를 들었다.
쉬민케 직원들이 들고 있는 문장을 읽었다.
“쉬민케 본사에 와 있어요. 쉬민케 무시니 물감으로 그림 그리면서 방송할 거예요.”
└긴장했나 봐. 책 읽는 것 같넼ㅋ
└독일이야?
└앙리랑 무슨 사이예요?
└완전 애기네. 애기.
“어떻게 알았어요? 지금 저기 들고 있어서 보고 읽었어요.”
촬영진을 찍는 카메라는 없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보고 읽은 걸 짚어냈다.
신기해서 물어보니 채팅창이 ‘ololol’, ‘k’, ‘ㅋ’, ‘lol’, ‘mdr’ ‘ahahah’ 같은 글로 도배되었다.
너무 빠르게 올라가서 제대로 볼 수 없다.
“일단 그리면서 말할게요.”
넓은 붓에 리퀴드 화이트를 묻혔다. 캔버스에 슥슥 바르면서 채팅창을 보니 물음표가 올라온다.
└?
└훈아 그림 그린다며 뭐해 ㅠ
└종이에 흰색을 왜 칠함?
└종이가 아니라 캔버스임.
└달라?
└ㅇㅇ 다름. 캔버스는 천이야.
└? 뭐 하는 거지?
└착한 사람 눈에만 보이는 그림인가?
“아, 이거. 미리 발라두면 부드러워져서 편해요.”
글이 너무 빨리 올라가서 눈이 아플 지경이다. 누군가 무엇을 그릴 거냐고 물었다.
“아직 정하지 못했는데 손 가는 대로 그려보려고요.”
└해바라기 그려줘
└앙리 마르소랑 요즘도 싸워요?
└해바라기 해바라기
└밥 먹었어?
└시청자 수 2만 명 실화냐?
이대로는 대화가 되질 않는다.
채팅창을 보며 말했다.
“안 되겠어요. 한 사람씩 말해 봐요. 해바라기 그리라고요?”
└2만 명 있는 방에서 한 사람씩 말하랰ㅋㅋㅋㅋ
└귀여워 ㅠㅠㅠ
└응 못 해. 안 해. 채팅 칠 거야.
└해바라기 그려달라고!
└앙리 마르소랑 평소에 뭐 하고 놀아요?
└후원 왜 막혀 있냐. 풀어 줘.
└고양이 그리자. 고양이.
└평소에 뭐 하고 놀아?
└(관리자에 의해 삭제된 메시지입니다)
└ㅁㅊ새끼 애한테 물어볼게 따로 있지. 미쳤음?
└관리자 빨리 저놈 차단해라. 훈이 보기 전에.
└꼭 저렇게 선 넘는 놈들 있더라.
└훈이 저런 거 보지 마. 보면 안 돼.
“아, 정신없어.”
붓과 팔레트를 내리고 채팅창을 올려서 천천히 읽었다.
“마르소랑 평소에 뭐 하고 노냐고 하셨는데 안 놀아요. 후원? 그 TV 보면 가끔 불쌍한 아이들 도와달라고 하더라고요. 거기에 하면 될 것 같아요. 고양이? 아깐 해바라기 그려달라고 하던데. 관리자에 의해 삭제된 메시지? 이건 뭐예요?”
“몰라도 돼!”
방태호가 소리쳤다.
소중한 팬이 한 이야기를 못 보는 게 마음에 걸리지만 일단 약속은 약속이니 그림을 그려야겠다.
“그러면 고양이랑 해바라기 그릴게요. 캔버스 찢어달라고요?”
채팅창에 오만 사람이 각자 하고 싶은 말만 해대니까 도대체가 뭐 하나 제대로 돌아가는 게 없다.
“잠깐만요.”
카메라를 보고 말했다.
“다들 말하지 말아 봐요. 쉿.”
└독재다!
└아, 미쳤나 봐 ㅋㅋㅋㅋ 어떻게 저렇게 깨물어주고 싶게 생겼지?
└독재 반대!
└저 사인 받았던 사람이에요! 앤서니 화이트!
└훈이 그리고 싶은 거 그려요. 해바라기랑 고양이 안 그려도 돼요.
└아니, 과자 사 먹으라고 후원하고 싶다고. 후원 풀어 빨리.
└유니세프에 하라잖앜ㅋㅋㅋㅋ
└그럼 앙리랑은 평소에 무슨 말 해요?
└기암성 작업한다고 하지 않았음? 일 너무 많이 하는 거 아닌가?
└초콜릿이 좋아, 사탕이 좋아?
이대로는 아무 일도 진행되지 않을 것 같아서 다시 한번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댔다.
“쉬이이잇.”
조용히 해달라는 뜻으로 한 행동인데 이번에는 ‘쉬이이잇’이라고 따라 쓴다.
못 말리는 사람들이다.
* * *
1)인클로저 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