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102화
25. 포스터(5)
어두운 금발에 체격이 상당히 크다.
내가 직접 본 사람 중 키가 가장 크고 근육이 잘 발달한 할아버지보다도 손가락 한두 마디 정도 크다.
방태호와 반갑게 악수한 그가 호방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환영합니다, 고수열 경. 고훈 군.”
“반가워요. 고수열이에요.”
“안녕하세요.”
인사를 나눈 뒤 로베르트 마이어는 곧장 숙소로 안내해 주었다.
가는 길에 내일 일정을 간략히 소개받았다. 미국식 영어를 쓴다.
“일러드린 대로 내일 오전에는 가이드라인을 설명해 드릴 예정입니다. 오후에는 간단한 리허설 뒤에 촬영 진행하고요.”
방태호가 미리 알려주긴 했지만 정말 카메라 앞에서 그림만 그려도 되는지 의문이다.
“다른 말은 안 해도 괜찮아요?”
내 질문에 로베르트 마이어가 깜짝 놀랐다.
“독일어를 하실 줄은 몰랐네요.”
“조금은요.”
로베르트 마이어가 한번 웃곤 편히 이야기했다.
“내일 부탁드릴 수도 있겠지만 무리해서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자연스러운 게 좋으니까요.”
오랜만에 그림 팔던 실력을 뽐내볼까 했거늘.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는 모양이다.
“촬영이 길진 않지? 일단 4시까지라고 받았는데.”
방태호가 확인차 물었다.
“하하. 네가 일하는 시간만큼 일시키면 우리나라에선 회사 문 닫아야 해.”
“부럽구만.”
방태호가 무릎을 몇 번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뜻이에요?”
“아, 법정 근로 시간이라고 나라에서 정한 노동 시간이란 게 있거든.”
나라에서 일하는 시간을 정한다니 이 무슨 일인가 싶다.
“일도 마음대로 못 해요?”
“하하. 그런 게 아니라 일하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거야. 회사가 직원을 혹사하지 못하게.”
“아.”
내 생각이 짧았다.
확실히 광산 노동자들의 삶은 처참하기 그지없어, 하루 16시간을 좁은 갱도에서 보내야 했다.
건강을 잃는 걸 넘어서 일하다 죽는 사람이 왕왕 있었다.
국가에서 일하는 시간을 정해두어 그런 일을 방지한다면 적어도 그런 비극은 없으리라.
“독일이 주 35시간이었나?”
“어. 처음엔 제조업만 그랬는데 지금은 다 적용되지. 우리는 28시간이야.”
“28시간?”
방태호가 깜짝 놀랐다.
소리를 내진 않았지만 나와 할아버지도 눈을 크게 뜨고 마주 보았다.
일주일에 35시간만 일하면 너무 적게 일하는 거 아닌가 싶지만, 이 생각 또한 내가 아직 ‘옛날’ 사람이기 때문이라 생각했는데.
28시간은 정말 너무 적게 느껴진다.
“그렇게 일해도 회사가 유지돼요?”
로베르트 마이어가 백미러를 통해 나를 보며 답했다.
“공정은 대부분 자동화가 이루어져 있으니까요. 기계가 일하는 대신 우리는 더 멋진 물감을 만들기 위한 아이디어를 만들어내거나 더 많은 사람이 쉬민케 물감을 쓸 방법을 찾고 있죠.”
Automatisierung?
생소한 단어를 들었다.
“자동화가 뭐예요?”
“말 그대로 사람이 움직이지 않아도 스스로 움직이는 시스템이에요. 과도기를 거쳐서 지금은 소수의 관리자만으로도 유지 보수가 가능하죠.”
사람이 일을 많이 하지 않아도 물건을 만들어낼 수 있다니.
정말이지 놀라운 세상이다.
그렇게 절약한 시간을 여가로 즐길 수 있는 듯하다.
잠시 후.
호텔에 도착했다.
로베르트 마이어가 뒤셀도르프에서 지낼 수 있도록 미리 잡아둔 모양이다. 결제도 하지 않고 간단한 확인 후 곧장 방에 올라갈 수 있었다.
“그럼 내일 아침에 모시러 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로베르트 마이어를 배웅했다.
짐을 풀고 씻으니 피로가 몰려든다. 이곳저곳에 많이 다닌 탓이다.
침대에 엎드려 있으니 할아버지가 밥 먹으러 가자고 부르셨다.
끼니를 거를 순 없어서 겨우 몸을 일으켰다.
“끌끌. 피곤해?”
“네…….”
“그럼 나가지 말고 여기서 먹을까?”
“그래도 돼요?”
“안 될 거 있나. 어디 보자.”
할아버지가 전화기 옆에 놓인 메뉴판을 펼쳤다.
샌드위치와 스테이크, 샐러드, 피자 등의 음식을 주문할 수 있는 듯하다.
“샌드위치랑 연어 스테이크랑 포테이토 피자랑 샐러드 먹을래요.”
“그렇게나 많이?”
“태호 아저씨도 있잖아요.”
“아, 마이어 씨랑 먹는다고 하더구나. 오랜만에 만났으니 이야기할 게 많을 거야.”
방태호 없이 할아버지와 둘이서 먹기엔 확실히 양이 많겠다.
“그럼 피자랑 스테이크만 먹을래요.”
“야채는 하나도 안 먹고? 피자랑 샐러드 먹자. 응?”
연어 스테이크를 포기하고 싶진 않지만 그렇다고 포테이토 피자를 버릴 순 없다.
독일의 포테이토 피자는 어떤지 꼭 먹어봐야 한다.
유럽에서 가장 먼저 감자를 먹기 시작한 독일이니까 분명 특별할 것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가 음식을 주문하고 얼마 뒤, 호텔 직원이 소시지와 감자, 치즈를 있는 대로 때려 넣은 피자와 샐러드를 가지고 왔다.
지금껏 감자와 베이컨 조합을 먹어 왔는데 이것은 또 어떤 앙상블을 낼지 궁금하다.
“잘 먹겠습니다.”
한 조각을 쭉 늘였다.
인심 좋은 요리사가 양껏 뿌린 치즈가 쭉 늘어나 축 처졌다.
큼직하게 썰어서 올린 감자와 소시지가 한눈에 봐도 먹음직스럽다.
입을 크게 벌리고 한입 가득 넣자 어머니의 품에 안긴 듯하다.
소시지에서 터져 나온 육즙이 입안을 가득 채우고, 이내 포슬포슬한 감자와 부드럽게 섞여 풍미를 더한다.
이 얼마나 자애로운 맛인가.
단 한입 먹은 것만으로도 배를 든든히 해줄 것만 같이 농밀하다.
그와 어우러지는 마요네즈는 또 어떠한가. 그야말로 최고의 아군이다.
‘아.’
탄복하던 차 독특한 향이 비강을 찌른다. 양털처럼 부드럽고 따스했던 포테이토 피자가 달리 느껴졌다.
머스타드?
맛은 비슷한데 내가 알고 있는 머스타드 소스가 아니다. 톡 쏘는 향이 훨씬 강하다.1)
그전까지의 머스타드와 달리 톡 쏘는 맛이 생긴 디죵 머스타드는 큰 사랑을 받았고 이후 여러 후발주자에 의해 여러 형태로 발전했다.
하지만.
너무나 완벽하여 자칫 단조로울 수 있는 포테이토 피자의 이면을 본 듯하다.
마치 오브제와 같은 이 소스 덕분에 좀 더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이 피자를 만든 사람은 분명 장인이다.
“샐러드도 같이 먹어.”
할아버지의 말씀에 어쩔 수 없이 포크를 들었다.
감자와 적양파, 당근, 셀러리로 만든 샐러드를 먹으니 확실히 입안이 개운하다.
문득 조금 전 로베르트 마이어에게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자동화가 되면 사람들이 되게 편해질 것 같아요. 일을 안 해도 되니까.”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에서는 이 피자 매장도 자동화되었다고 하더라.”
“어떻게요?”
“피자 트럭이 마을을 도는 거야. 그러다가 주문이 들어오면 곧장 가져다주는 거지.”
피자 트럭.
이 얼마나 가슴 떨리는 단어란 말인가.
“그런 것도 자동화라고 해요?”
“소비 패턴을 분석한대. 예를 들면 우리가 월요일 저녁에는 포테이토 피자를 먹잖니?”
“네.”
“그걸 반복하면 인공지능이 그걸 기억해서 월요일 저녁에는 포테이토 피자를 미리 준비해 두는 거야. 우리집 근처로 와서. 피자도 트럭 안의 기계가 만들고.”
“……네?”
할아버지가 이상한 말씀을 하신다.
“인공지능이 뭐예요?”
“정확한 건 모르겠구나. 한번 찾아보자.”
할아버지가 스마트폰으로 인공지능을 검색했다.
학습, 추리, 적응, 논증이 가능하도록 인위적으로 만든 시스템이라고 한다.
봐도 모르겠으니 일단 넘어가고 그 인공지능이란 게 틀릴 수도 있지 않나 싶다.
“안 먹을 수도 있잖아요?”
“그렇지. 그런데 그렇게 나는 손실이 적은 거야. 사람을 쓰는 비용보다.”
일하는 사람에게 지불하는 보수보다, 버리게 되는 피자값이 적다는 뜻이다.
이익을 추구하는 상인이라면 당연히 후자를 택할 것이다.
“그럼 피자 만드는 사람은요?”
“직장을 잃었지. 자동화가 편리하긴 하지만 그걸 누릴 수 있는 사람에게 한정된 일이란다.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야.”
“…….”
광산에서 혹사당하던 노동자들이 이제는 편하게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도리어 이제는 일하는 권리마저 빼앗긴다니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
“그럼 그 사람들은요? 뭐 먹고 살아요?”
“다른 일을 찾아야지.”
이런 일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진 않았을 거다.
하지만 시대의 변화에서 적응하지 못한 이들도 생계를 유지는 해야 할 것 아닌가.
그들의 능력 부족만으로 치부하기에는 문제가 있다.
* * *
1876년 영국 런던.
큰아버지가 사업을 확장하여 런던에 온 지도 꽤 되었다.
그동안 찾는 이가 제법 늘었고 오늘도 단골손님께 한 점을 팔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그래. 또 오겠네.”
한 건 해냈다는 생각에 숨을 내쉬자 함께 일하는 닉 파크가 혀를 내둘렀다.
“저 사람은 누군데 일주일에 한 번씩 오냐? 대체 돈이 얼마나 많은 거야?”
피식 웃었다.
“로저 스콧. 양모 공장을 운영하시신대.”
“이야. 공장장이야? 제대로 물었는데? 다음엔 매출 좀 확 올려 봐.”
“쓸데없는 소리 말고 가서 바닥이나 쓸어.”
닉 파크가 어깨를 으쓱이곤 빗자루를 들었다.
서류를 정리하려고 책상 위를 보니 로저 스콧 사장님의 시계가 놓여 있었다.
다급히 챙겨 밖으로 나섰지만 이미 스콧 사장님의 마차가 저 멀리 가고 있다.
“닉, 나 잠깐 나갔다 올게.”
“어디?”
“스콧 씨가 시계를 두고 가셨어. 가져다드리려고.”
“어차피 다음에 올 텐데 굳이?”
“이런 거 하나하나가 다 고객 관리야. 아무튼 다녀온다.”
“그래.”
날이 제법 쌀쌀했기에 외투와 모자를 챙겼다. 부지런히 걸으면 로저 스콧 사장님의 공장까지 30분 정도 걸릴 거다.
걸음을 서둘렀다.
생각보다 바람이 차 얼굴이 찢어질 듯하다.
공장 앞에 도착하니 경비원이 험상궂은 얼굴을 들이밀었다.
“누구요?”
“구필 화랑 런던 지점의 빈센트 반 고흐입니다. 사장님이 시계를 두고 가셔서 돌려드리려고 왔습니다.”
경비원이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입구를 향해 고갯짓했다.
“들어가서 맨 끝방이요.”
“고맙습니다.”
안으로 들어서자 숨이 턱 막혔다.
양털이 몹시 날리는데 환기가 안 되니 온갖 먼지와 뒤엉켜 기침이 나온다.
‘왜 이리 어두워.’
곧 꺼질 듯한 불빛 아래 드문드문 지친 얼굴들이 보인다. 열 살은 되었을까 싶은 아이들도 있다.
‘이거 대체.’
남자고 여자고 아이들도 모두 눈 주변이 어둡다. 공허한 눈으로 그저 같은 행위를 반복할 뿐이다.
“오, 빈센트. 무슨 일인가?”
로저 스콧 사장님의 목소리다.
고개를 돌리니 그가 턱을 살짝 들고 다가왔다.
주머니에 넣은 시계를 꺼냈다.
“잊고 가신 물건이 있어서 가져왔습니다.”
그는 미소 지으며 시계를 챙겼다.
“고맙네. 어디 갔나 했더니 거기에 두고 왔구만.”
“별말씀을요.”
“온 김에 차나 한잔하고 가지. 바쁜가?”
“감사합니다.”
“진! 차 두 잔 가져와!”
“네.”
로저 스콧 사장님을 따라 공장을 가로질렀다.
빼곡하게 앉은 이들 중에는 만삭의 임산부도 있었다. 이런 곳에 계속 있으면 안 될 텐데 걱정이다.
자리를 잡고 앉으니 홍차를 가져다 주었다. 몹시 뜨거운 걸 보니 차를 타는 솜씨가 좋진 못하다.
로저 스콧 사장님이 손바닥을 보였다.
“난 자네가 참 마음에 들어. 요즘 보기 드물게 정직하거든.”
“과찬이십니다.”
“아니야. 아니야. 이 20파운드짜리 시계를 돌려주는 사람은 없지.”
그렇게나 비싼 물건인 줄은 몰랐다.
“그런 자네에 비하면 저 밖에 있는 놈들은 도둑놈이나 다름없어. 어떻게 하면 일은 적게 하고 내 재산을 가져갈지 궁리하지.”
“……네.”
저 열악한 환경에서 죽어가는 얼굴에 대고 차마 그런 말을 할 수 없었다.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니 로저 스콧 씨가 거들먹거렸다.
“어제는 손가락을 잘린 걸 감추고 있던 놈을 발견했지.”
“손가락을요?”
“음. 그런 주제에 계속 일을 하고 있었다니 자네는 이 일이 믿기나? 손가락 없는 병신에게 두 달이나 똑같이 돈을 준 거야.”
“…….”
“내 돈을 빨아먹은 그놈에게 그간 지불했던 임금을 돌려받을 생각이야. 오늘 아침에 고발하고 자네를 만난 거지.”
삶다 만 돼지 새끼가 뀍뀍거리니.
이 뜨거운 홍차라도 끼얹어야 조용해질까 싶다.
* * *
1)우리가 흔히 아는 머스타드 소스는 1865년, Jean Naigeon가 고안해낸 디죵 머스타드에서 유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