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101화
25. 포스터(4)
크리스틴 노먼은 갑자기 싸우기 시작한 두 천재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하란다고 해? 그냥 보고 싶다고 하면 되지 소름 돋게 무슨 짓이야!”
“남들 다 쓰는 격식체에 소름 돋는다니 뭔 소리야 대체?”
따로 놓고 만나면 의외로 평범한 앙리 마르소와 고훈이 만나기만 하면 기행을 벌였다.
라파엘로의 작품이니 당연히 자랑하고 싶겠지만, 9살 소년에게 정중히 부탁하라니.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반면 고훈도 마찬가지였다.
3주 가까이 함께하면서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재능 외에도 소년이 가진 여러 축복을 알 수 있었다.
호기심이 많고 그것을 채우려는 욕구는 무엇보다 순수했다.
주변 사람을 잘 배려했고 팀 업무도 제법 합리적으로 잘 따라왔다.
그런 아이가 앙리 마르소만 만나면 으르렁대니 이해할 수 없었다.
“잠깐. 두 사람 다 진정하고. 이게 싸울 일은 아니잖아요.”
네이선 에반스 아트 디렉터가 두 사람을 말렸다.
주변 눈치를 본 두 사람이 서로를 등지고 돌아앉았다.
노먼이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계속해도 될까요?”
두 사람이 대답하지 않았다.
회의를 진행해도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노먼이 안건을 이어나갔다.
“아무래도 마르소 씨의 수집품을 둘러보면 좋겠어요. 에밀리, 측정하는 데 시간 얼마나 필요해?”
“사흘 주시면 끝내겠습니다.”
소품 관리인 에밀리 러버가 명료하게 답했다.
앙리 마르소의 개인 전시실에 가려면 에밀리와 그녀의 팀원들이 반드시 필요했다.
노먼이 상황을 정리했다.
“좋아. 제인은 남아서 촬영 허가 받아내고. 호이테, 한번 담아 봐야지?”
노먼이 촬영 감독 호이터 반 베르켈에게 물었다.
“물론이지. 가능하면 장비도 동원했으면 좋겠는데. 보트랑 드론 정도라도.”
“좋아. 두 사람은 팀원 데리고 일정 마치고 돌아와. 나랑 에밀리, 에반스는 사흘, 아니지. 내일부터니까 나흘 뒤에 마르소 씨하고 파리 들렀다 갈게.”
“좋아.”
“마르소 씨, 괜찮죠?”
“상관없습니다.”
앙리 마르소가 딱히 이견을 내놓지 않자 이번에는 고훈에게 물었다.
“훈이도 내일 독일 들렀다가 파리로 곧장 오면 되겠다. 일정 괜찮아?”
“괜찮아요.”
노먼이 손뼉을 쳤다.
“자, 회의 끝. 다들 잘해보자고.”
* * *
노먼 감독의 방에서 나온 고훈과 앙리 마르소가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고훈이 한숨을 내쉬었다.
“잠깐 얘기 좀 해요.”
“무슨 얘기.”
고훈이 귀찮다는 듯 손짓했다.
호텔 2층 카페에는 사람이 없어 조용히 이야기할 수 있을 듯했다.
자리를 잡고 앉은 고훈이 먼저 말을 붙였다.
“난 마르소가 싫지 않아요.”
고훈이 앙리 마르소가 받침대 위에 올라갔을 때를 떠올리며 말했다.
“처음에는 미친놈인가 싶기도 했어요.”
“뭐?”
“들어봐요.”
고훈이 앙리를 달래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정말 열심히 하더라고요. 그때 그렇게 수척해 보였던 것도, 결국 마르소의 보석을 더 멋지게 완성한 것도 당신이 그만큼 미술에 진심이니까 가능했을 거라 생각해요. 난 그런 사람 싫지 않아요.”
고훈은 진심을 꺼냈다.
다소 제정신은 아닌 듯하나 어차피 예술가 중에 정상인 사람은 적었다.
그것이 예술을 하면서 따르는 심리적 압박감 때문인지는 몰라도 다들 어딘가 한군데씩 망가져 있었다.
고훈 본인 또한 그러했기에.
앙리 마르소를 이해하진 않아도 그 때문에 싫어하진 않았다.
“작품은 좋아해요. 766번째 자화상이랑 이번에 전시한 그림자는 정말 인상 깊게 봤어요. 부러울 정도로.”
“부럽다고?”
앙리 마르소는 귀를 의심했다.
자신에게 열등감 혹은 그와 비슷한 감정을 주는 존재가 자신을 부러워한다니 믿을 수 없었다.
“네.”
고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 당신 같은 천재가 아니예요. 기술도 없고. 융 심리학이니 뭐니 하는 지식도 없고요. 시간이 없었으니까요.”
고훈은 진실로 앙리 마르소와 동시대 예술가들이 부러웠다.
그들은 이 시대에 태어나 자라서, 21세기에 향유되는 지식과 감정을 자연스레 공유하고 있었다.
심지어 전부터 이어져 온 예술의 변화도 지식으로나마 습득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훈에게는 그런 시간이 없었다. 그들보다 훨씬 많이 노력해야 같은 출발선에 설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기에 1년은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다.
“…….”
한편 앙리 마르소는 고훈의 말이 마치 자기가 아직 어린 탓에, 기성 작가들이 보낸 시간만큼 공부할 수 없었다는 것처럼 들렸다.
그것이 분하다니.
앙리 마르소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발상이었다.
타고난 재능의 차이에 분노했지만.
엄격히 따지면, 얼마나 더 오래 살았느냐도 분명 차이는 차이였다.
“하지만.”
그때 고훈이 입을 열었다.
“그게 불공평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지식이야 앞으로 살아가면서 채워나가면 되니까.”
앙리 마르소는 자신을 바로 보며 말하는 어린 천재를 노려보았다. 아무리 겁을 주려고 해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기술은 정말 부럽기도 하지만 그건 마르소 당신이 노력해서 얻은 기량이니까. 불공평한 게 아니에요. 도리어 공평한 거예요. 언젠가는 저도 당신처럼 멋진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노력해야죠.”
고훈이 말을 마쳤다.
앙리 마르소의 머리는 복잡했다.
자신이 부럽다고, 언젠가는 그 기량을 따라잡겠다고 말이 그를 심란케 했다.
‘대체 뭐라는 거야.’
고훈의 첫 개인전 ‘달콤한 행복’에서 만난 피에르 말로가 전하기는 했다.
고훈이 자신을 넘어설 거라고.
앙리 마르소는 그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고훈은 언제나 당당했다.
막대한 재력과 명성, 여러 협회에 미치는 영향력 그리고 압도적인 기량 앞에서 비굴하게 구는 다른 예술가와 달랐다.
도리어 자신을 꾸짖기도 했기에 고훈이 자신을 얕잡아 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조금 전 ‘고작’ 라파엘로의 그림을 보고 싶으면 정중하게 부탁하라는 말에 따르는 걸 보고 화가 뻗쳤다.
‘고작’ 라파엘로의 그림 때문에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버러지’들과 같아지는 게 싫었다.
앙리 마르소가 입을 열었다.
“내 처음은.”
아주 낮은 목소리였다.
“파리역의 광고판을 모조리 사들이는 거였다.”
고훈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아서 홧김에 저질렀지. 한 달 유지하는 데 400만 유로쯤 들었나.”
앙리 마르소가 눈을 치켜떴다.
“난 천재가 아니야.”
“…….”
“그딴 거 개나 주라지.”
앙리 마르소는 처음으로 자신을 그대로 내비쳤다.
“나를 찾고 싶어서. 내가 나로 있기 위해서 살아왔어. 지긋지긋한 문학도 철학도 기계처럼 반복한 스케치도 손바닥이 물러터질 때까지 끌을 쳐댄 것도 모두 인정받고 싶기 때문이었어.”
고훈은 차분히 그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돈을 처바른 작가다. 그렇게 홍보하면 누가 안 유명해지냐. 유명해지고 싶어서 뭐든 하는 놈이다. 그런 이야기도 있지.”
앙리 마르소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도 차분했다.
“상관없었어. 내가 가진 걸 전부 쏟아내는 것으로도 부족했으니까. 그러지 않고선 내가 나로 있을 수 없었으니까.”
부모가 물려준 재산은 다른 사람은 꿈에도 꾸지 못할 만큼 많았다.
남들보다 훨씬 편하게 예술 활동을 할 수 있었고, 자신에게 주어진 유일한 ‘재능’을 이용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예술가 앙리 마르소로 인정받기 위해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걸 쏟아냈다.
“그런데 네가 나타났다.”
앙리 마르소의 목소리가 다소 격앙되었다.
“네 말대로 붓을 10년도 들지 않았으면서 너는 나를 움직였다.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큰 전시회에 내 그림과 나란히 있지.”
“그건 당신이 건 거잖아요.”
“…….”
“인사가 늦었는데 정말 고마워요. 그리고 손님은 언제 산 거예요? 그때 가면 쓴 사람이 마르소였어요? 액자는 피에르 말로가 만들어준 것 같은데.”
“…….”
“아, 미안해요. 계속해요.”
앙리 마르소가 흥분을 가라앉히려 숨을 길게 내쉬었다.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한 앙리가 말을 이었다.
“나는 재능 따위 믿지 않아. 시간이든 건강이든 노력이든 정신이든 돈이든 가지고 있는 걸 모조리 쏟아부어야만 겨우 반열에 오를 수 있다. 그리고 넌 그런 내 생각을 부정하고 있어.”
“내가 언제요.”
“네 존재 자체가 그래.”
앙리 마르소가 눈을 빛냈다.
“이번 일로 확인해야겠어. 네가 그림을 어떻게 그리는지. 무슨 생각으로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내 두 눈으로 확인해야겠어.”
그가 일어났다.
“그래야만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게 증명될 테니까.”
* * *
제작진들이 영국 정부를 상대로 촬영 허가를 받아내는 동안, 잠시 독일을 방문했다.
물감 제조업체 쉬민케와의 계약을 진행하기 위함이다.
“어제 왜 늦게 들어왔냐니까?”
비행기 안에서 할아버지가 어제 조금 늦게 들어간 일을 추궁하셨다.
“별일 아니었어요.”
“할아버지가 애가 타요, 이 녀석아. 노먼 감독은 1시간 전에 회의가 끝났다고 하는데 연락은 안 되고 보이지도 않고.”
“……앙리 마르소랑 이야기 좀 했어요.”
“뭐? 그 녀석이랑 왜?”
“그냥요.”
할아버지의 표정을 보니 더는 감출 수 없어 어제 있던 일을 털어놓았다.
서로를 부러워하고 있었다는 말을 전하니 할아버지가 고개를 살짝 틀었다.
“그것뿐이야?”
“네.”
안심하셨는지 할아버지가 등을 기대었다.
“그 녀석이 그런 생각을 할 줄은 몰랐구나. 자기애가 워낙 강해서 그런 건 없을 줄 알았는데.”
“그래서 더 챙기는 것 같아요.”
나도 그렇지만.
부족한 게 무엇인지 명확히 알수록 그것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아마 앙리도 그랬으리라 생각한다.
“그럼 화해한 거야?”
“그건 아니고.”
어째 어제 이후로 더 어색해졌다.
오늘 아침 잠깐 마주쳤을 때 나도 모르게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앞으로 영화 작업 중에 종종 마주할 텐데 어찌 대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얼마 후.
쉬민케 본사가 자리한 뒤셀도르프라는 큰 도시에 도착했다.
방태호의 지인이라는 로베르트 마이어가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