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100화 (55/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100화

25. 포스터(3)

촬영지를 선정하기 위해서 답사차 영국 도버 해협을 찾았다.

미국 맥웨이 폭포와 프랑스 에트르타 해변을 둘러보고 이번이 마지막 장소인데.

앙리 마르소가 선글라스를 낀 채 절벽 끝에서 바람을 맞고 있다.

‘저걸 밀어버릴 수도 없고.’

저 인간이 대체 내게 왜 이러는지 이유를 알 수 없다.

기어이 <기암성>에 투자해서 함께하고 있다.

처음에는 내 그림을 좋아한다고 여겼는데, 갈수록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한다.

물어봐도 제대로 대답하지 않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어휴. 저걸 밀어버릴 수도 없고.”

곁에 계신 할아버지가 앙리 마르소를 보면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할아버지도 같은 생각인 모양.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신경 쓰지 않고 주변이나 둘러보았다.

많은 예술가가 이곳을 캔버스에 담았다고 하더니 정말 그림 같은 장소다.

파도가 수많은 세월을 거쳐 조각해낸 백악 절벽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독특한 하얀색 단층면을 자세히 보고 싶지만 경사가 얼마나 가파른지 엄두가 나지 않는다.

배를 타고 해안으로 나가서 봐야 이곳의 경이로움을 제대로 느낄 수 있을 듯하다.

노먼 감독이 다가왔다.

“어때?”

“다른 세상 같아요.”

정말 누군가의 상상 속에서나 있을 법한 경관이다.

“절벽이 어떻게 이런 색이에요?”

할아버지께 여쭈었다.

“자세히는 몰라도 미생물 사체가 쌓여서 만들어진 거라고 하더구나.”

“여기가요?”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생물이라면 매우 작은 생명체일 텐데.

이 거대한 절벽이 그런 생물이 쌓여서 형성되었다니, 대체 얼마나 오랜 세월 퇴적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세상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로 가득하다.

“그런데 여기에서 촬영하면 아지트 내부는 어떻게 해요?”

동굴이 안 보인다.

“배를 타고 아래쪽에서 들어가야 해. 가볼래?”

직접 봐야 그것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릴 테니 당연히 가야 한다.

잠시 후.

배를 타고 백악 절벽에 난 동굴을 찾았다.1)

통로가 상당히 넓다.

성인 남자가 허리를 숙이지 않아도 충분히 걸어 다닐 만한 높이다. 너비도 두 사람이 나란히 걸어도 크게 문제없다.

절대로 자연적으로 발생한 동굴이 아니다.

“사람이 만들었는데.”

앙리 마르소의 목소리가 울렸다.

“잘 봤어요.”

노먼이 백악 절벽에 난 동굴의 비밀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여기는 오랫동안 영국의 상징적인 방어선이었어요. 높은 절벽 때문에 외적의 공세를 막아내기 수월했죠.”

확실히 사람이 기어 올라올 수 있는 높이는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도 나치의 공세를 막아내는 장소였죠. 당시 총리였던 윈스턴 처칠은 이곳에 전략적 방어기지를 세울 것을 지시했습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다만 다른 사람들은 크게 놀란 눈치다.

“군사 비밀기지였군요?”

방태호가 물었다.

“네. 이곳 도버 해변을 지나는 독일 함선을 저지하는 목적이었죠. 포탄을 저장하는 공간으로 활용했대요.”

뭔가 엄청난 역사의 비밀을 듣는 것만 같다.

“해안선 밑으로 약 23m까지 내려가고 총면적은 1,066㎡예요. 이곳에서 185명의 군인이 생활했어요.”

“……바다 아래로 23m나 내려간다고요?”

무너지면 죄다 죽는다.

깜짝 놀라 물었더니 노먼이 태평하게 웃는다.

“걱정 안 해도 돼. 영국 정부에서 보수 작업을 끝내고 공개했으니까. 더 들어가 보죠.”

할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여차하면 할아버지라도 데리고 도망가려는 의도였는데.

“껄껄. 무서워?”

“조심하는 거예요.”

“겁먹었냐?”

앙리 마르소가 콧방귀를 뀌며 지나쳤다.

언젠가 저놈의 콧대를 납작하게 해주자고 마음먹고 안으로 들어섰다.

긴 통로를 지나니 길이 나뉘었다.

왼쪽으로는 넓은 공간이 이어져 있고 오른쪽에는 또 다른 통로가 굽이져 있다.

확실히 여기라면 아르센 뤼팽의 은신처로 꾸밀 수 있을 듯하다.

애초에 군사 비밀기지로 활용했다고 하니까.

“너무 멋진데요?”

누군가의 감탄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병실로 쓰던 방과 숙박 시설까지 다섯 개의 큰 방이 있는 이곳은 곳곳에 누군가의 기록이 남아 있다.

침실이라고 소개한 방의 한쪽 구석에 ‘Russia bleeds while Britain Blancos’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영국 흰 도료?’

블랑코는 가죽에 쓰는 하얀색 도료인데, 문장의 의미가 무엇인지 파악할 수 없다.

“이건 무슨 뜻이에요?”

“아마 점검 중이라는 뜻일 거야. 당시에는 장비를 검열할 때 블랑코라는 도료를 사용했거든.”

노먼이 설명해 주었다.

당시 군대에서 쓰던 은어인 듯하다. 이 문장은 영국이 사열할 때 러시아는 피 흘리며 전쟁을 하고 있다는 뜻이리라.

30분 정도 둘러보며 사진을 찍은 뒤 나와 노먼을 포함한 모든 제작진이 이곳을 <기암성>의 촬영지로 결정했다.

정말 기대된다.

* * *

크리스틴 노먼의 방에 모여 앞으로의 일정을 논의했다.

“훈이는 내일부터 독일 갈 테고.”

“네.”

노먼이 스케줄러에 동그라미를 치곤 고개를 들었다.

“제인, 촬영 허가 준비는?”

“문제없습니다.”

“적어도 나흘은 필요해. 에밀리는 내일 다시 가서 사이즈 잡아 오고.”

소품 관리인 에밀리 러버가 고개를 끄덕였다.

백악 절벽 동굴 안을 꾸미려고 치수를 재려는 모양이다.

촬영 허가가 나지 않은 상황에서 미리 준비하는 이유는 시간을 최대한 앞당기기 위함이다.

허가를 받아낼 자신이 있으니 일단 시작하는 거다.

“그런데…….”

에밀리 러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번에도 거절되었습니다. 루브르, 오르세, 대영박물관 모두요.”

아르센 뤼팽의 콜렉션으로 사용할 예술품을 섭외하지 못한 모양이다.

사실 박물관 입장에서는 영화 촬영에 진품을 넘기는 게 말이 안 되는 일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이 모조품을 쓰자고 제안했지만 크리스틴 노먼은 결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영화를 만드는 일이라면 조금의 타협도 용납하지 않는 그녀가 믿음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난감할 때도 있다.

눈을 감고 고민하던 노먼이 다음 대책을 물었다.

“개인 수집가 쪽은?”

“접촉하고 있지만 현재까지는 터무니없는 금액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이반 모로조프가 아를 포룸 광장의 카페 테라스와 잔 사마리의 초상 두 점을 대여해 주는 대가로 1,000만 달러를 불렀습니다.”2)

내 그림과 르누아르의 작품이다.

반 고흐 미술관에 없기에 어디에 있나 싶더니 러시아 사람이 가지고 있던 모양이다.3)

그나저나 1,000만 달러라니.

단 하루 빌려주는 것치고는 말이 안 되는 액수다.

노먼이 입술을 깨물었다.

“협상 여지는? 보험이라면 들어 준다고 했을 거 아니야.”

“없습니다. 보험과 함께 요구해서…….”

제작진이 침울해졌다.

어떻게든 다른 방법을 강구해내려고 노력하지만 사실 내가 보기에도 어려운 일이다.

그때 투자자 자격으로 회의에 참석한 앙리 마르소가 입을 열었다.

“무슨 작품을 찾고 있습니까.”

“아르센 뤼팽의 콜렉션을 섭외하고 있습니다. 라파엘로, 티치아노, 렘브란트, 다빈치 등이죠. 아니면 20세기 이전 작품 중 그에 준하는 진품을요.”

아트 디렉터 네이선 에반스가 답했다.

설명을 들은 앙리 마르소가 눈살을 찌푸렸다.

작품 자체의 가치는 물론이거니와 사료적 가치로 한 나라의 국보급 작품을 열거하니 어이가 없는 것이다.

그가 입을 열었다.

“라파엘로라면 하나 있지.”

나도, 노먼도 방에 있는 모든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라파엘로의 작품은 내가 첫 번째 삶을 살 때도 이미 역사적인 작품으로 여겼다.

그 천재의 작품을 한 점이라도 보유하고 있다니.

수집도 한다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생각지도 못한 스케일이다.

“뭔데요?”

“어린 코퍼와 마돈나. 1505년작.”

“말도 안 돼.”

네이선 에반스가 못 들을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반응했다.

“보여줘야 하나?”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다들 함께했다. 한쪽 입꼬리를 올린 앙리 마르소가 스마트폰을 펼쳤다.

어디론가 전화를 걸더니 중년 여성이 얼굴을 비쳤다.

-앙리, 밥은 잘 먹고 다니니? 집에는 언제 들어와? 어머, 다른 분들이랑 함께 있구나.

“…….”

다들 아무 말도 안 하고 눈치를 본다. 앙리 마르소는 얼굴이 빨개져 있다.

“안녕하세요.”

그녀에게 인사하자 반갑게 받아주었다.

-어머. 네가 고훈이니? 이야기는 많이 듣고 있어. 어떻게 같이 있어?

“시끄러워! 쓸데없는 말 꺼내지 말고 2전시실 가서 사진이나 찍어 보내!”

-얘는. 오랜만에 통화하면서 성질부터 부리니? 얘가 이렇게 경우가 없어요. 잘 부탁드릴게요.

앙리 마르소가 전화기를 끄고 뭐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정겨운 사람인데 앙리 마르소의 어머니인가 싶다.

‘아니지.’

캐롤라인 스트릭이 ‘대화를 나눠요’에서 그가 부모 없이 자랐다고 했으니 유모일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이 아무 말도 꺼내지 않는다. 회의는 열정적으로 참여하던 사람들이 괜히 볼펜을 돌리거나 하면서 딴청을 부린다.

잠시 후.

앙리 마르소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앙리가 메시지를 확인하더니, 스마트폰을 펼쳐 사람들 앞에 놓았다.

“세상에.”

라파엘로의 작품은 처음 본다.

직접 보면 좋겠지만, 자애로운 성모와 성자의 모습을 눈에 담는 것만으로도 기쁘다.4)

이거라면 분명히 아르센 뤼팽이 얼마나 대단한 도둑인지 알리는 상징이 될 거다.

노먼 감독이 나섰다.

“이 작품 대여해 주시겠어요?”

“작품이 상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반드시 그렇게 하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앙리 마르소가 어깨를 으쓱이곤 세부 조율을 해보자고 이야기했다.

이럴 때 보면 정상인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평소에는 왜 그러는지 모를 일이다.

“이것 말고도 또 있어요?”

그의 수집품이 궁금해서 물었다.

앙리가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한쪽 입꼬리만 올리는 게 몹시 거슬린다.

“보고 싶어?”

“……네.”

“그럼 부탁해 봐. 정중하게.”

앙리 마르소가 웃었다. 묘하게 기분 나쁜 걸 보니 또 이상한 생각을 하는 모양이다.

“다른 소장품도 보여주시겠습니까, 앙리 마르소 작가님?”

정중하게 부탁하자 만족스럽게 웃던 앙리 마르소가 멈칫했다.

“낯간지럽게 굴지 마. 빌어먹을.”

“당신이 하라며.”

* * *

1)2015년 7월에 공개된 영국의 군사기지.

참고 문헌:

, Corey charlton, MAILONLINE, 20 July 2015.

2)이반 모로조프(1871~1921):

러시아의 예술품 수집가.

그가 경매장에서 낙찰한 금액은 총 50억 달러에 이른다.

반 고흐의 <아를 포룸 광장의 카페 테라스>, 르누아르의 <잔 사마리의 초상>, 피카소의 <공 위에서 묘기를 부리는 소녀> 등을 수집했었다.

그가 사망한 뒤에는 여러 미술관에 나뉘어 전시되고 있다.

3)현재는 네덜란드 크뢸러 뮐러 미술관에서 보유 중.

4)어린 코퍼와 마돈나, 라파엘로, 패널에 유화 물감,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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