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99화
25. 포스터(2)
앙리 마르소가 크리스틴 노먼 감독의 스튜디오를 방문했다.
미합중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사우스 웨딩튼 공원과 로스앤젤레스강 사이에 위치한 그곳은.
노먼이 2024년 윈저 로프츠 유니버셜 시티와 인근 주택 및 부지를 전부 사들여 2027년부터 운영하기 시작한 영화 촬영지였다.
영화 제작 및 배포에 관련한 모든 일을 처리할 수 있는 노먼 스튜디오의 보안은 철저했고.
앙리 마르소도 예외는 아니었다.
보안 직원이 앙리의 차량 앞으로 다가가 방문증을 요구했다.
비서 아르센은 창문을 내리고 정중히 노먼 감독과 만나기로 했음을 알렸다.
보안 직원이 뒷좌석에 다리를 꼰 채 팔짱을 끼고 있는 남성을 확인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수신호를 보내 차단기를 올리려던 차, 앙리 마르소가 찾아왔단 보고를 받은 보안팀장이 나서서 그를 맞이했다.
“반갑습니다, 마르소 씨. 보안팀의 폴 애덤스입니다. 노먼 감독께서 모시라고 하셨습니다.”
폴 애덤스 팀장이 앙리 마르소를 안내했다.
잠시 후 앙리 마르소가 노먼 감독의 집무실에 이르렀다.
“어서 와요.”
노먼 감독이 앙리 마르소를 반겼다.
앙리 마르소도 선글라스를 벗어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었다.
자리를 잡고 앉은 노먼이 곧장 방문 목적을 물었다.
오늘 맥웨이 폭포 주변을 답사하고 온 터라 영화와 관련된 일이 아니라면 되도록 피하고 싶었다.
“무슨 일이에요?”
“고훈이 여기서 일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노먼이 고개를 끄덕였다.
“좀 봐야겠습니다.”
그녀는 앙리 마르소를 이해할 수 없었다.
고훈과 만나려고 한다면 직접 연락하는 편이 빨랐다. 굳이 회사를 통해 방문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전화번호를 모르니까.”
“…….”
노먼은 말문이 막혔다.
그의 태도가 너무나 당당하고 의연하여 자신이 뭔가 잘못 알고 있나 싶을 정도로 황당했다.
그러나 오늘 답사로 지쳤기에 인터폰을 눌렀다.
“스튜디오 안에 훈이 아직 있는지 확인해 줘.”
-계십니다. 연결해 드릴까요?
“응.”
잠시 후 고훈과 연결되었다.
-여보세요?
“훈아, 마르소 씨가 찾아왔는데 어떻게 할래?”
-마르소? 앙리 마르소요?
“응.”
-할아버지, 마르소가 왔대요.
-왜?
-모르겠어요. 왜요?
노먼이 눈썹을 들어 올리며 앙리 마르소에게 답을 요구했다.
“비엔날레 팽개치고 무슨 짓 하는지 보러 왔다.”
-비엔날레는 팽개치고 무슨 짓 하는지 보러 왔대요.
-네가 뭘 하든 그 녀석이 무슨 상관이야?
-그러니까요. 무슨 상관이에요?
노먼이 이번에는 고개를 살짝 틀었다.
“상관있어.”
그러나 앙리 마르소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고훈이 고수열과 대화를 주고받더니 다시 인터폰을 잡았다.
-그러지 않아도 한 번은 만나보려고 했으니까요. 어디로 가면 돼요?
“사무실. 응. 그래.”
통화를 마친 노먼 감독이 앙리 마르소를 관찰했다.
눈앞의 남자는 마르소 가문의 상속자면서 전 세계에서 한 손에 꼽히는 예술가였다.
평소에도 이미지가 좋진 않았지만, 유독 고훈에게 집착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혹시나 고훈이 영화 관련 일을 시작해서 불쾌한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휘트니 비엔날레를 팽개쳤다는 표현을 보면 무리한 추론은 아니었다.
잠시 후.
고수열과 고훈이 노먼 감독의 집무실을 찾았다.
앙리 마르소가 고수열에게 고개를 숙이며 예의를 갖추었다.
“고수열 경.”
“자네가 여기엔 어찌 왔는가?”
앙리 마르소가 고훈에게 시선을 준 뒤 다시 고수열을 정면에 두었다.
“저 애는 미술관에 있어야 합니다.”
“무엇을 하든 그건 훈이가 선택할 일일세.”
“그렇습니다.”
앙리 마르소가 고훈을 내려다보았다.
“어디서 일하든 무엇을 그리든 본인이 선택해야죠. 안 그래?”
앙리 마르소의 상식으로 고훈이 영화 제작에 참여한다면, 감독이 되어야 했다.
10년도 전에 개봉했던 도로타 코비엘라, 휴 웰치먼 감독의 <러빙 빈센트>와 같은 영화라면 인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상황은 달랐다.
고훈은 크리스틴 노먼의 세계를 표현하려 했고, 그것은 곧 타인이 그린 세상을 대신한다는 뜻.
앙리 마르소는 이미 독립성을 확보한 고훈이 굳이 그래야 할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찾아왔고.
‘뭐래?’
‘뭐라는 거지.’
고수열, 고훈, 크리스틴 노먼은 그런 앙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맞아요. 하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
고훈이 입을 열었다.
그는 뉴욕에 있던 앙리가 굳이 로스앤젤레스까지 와서 당연한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 말 하려고 왔어요?”
“그래. 내 눈으로 확인해야겠어.”
고훈과 고수열, 노먼이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은 명확했다.
앙리 마르소가 고훈이 본인의 그림을 그리는 걸 왜 걱정하느냐였다.
그렇게 친근한 관계가 아니었다. 도리어 지인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악연이었다.
고훈이 나섰다.
“내가 그렇게 좋아요?”
“뭐?”
앙리가 눈을 크게 떴다.
크리스틴 노먼은 터져 나온 웃음을 참아내느라 애썼다.
“그렇잖아요. 왜 내 일에 그렇게 관심을 가져요. 혹시 그림값 떨어질까 봐 그래요?”
“내가 그런 푼돈 따위 신경 쓸 것 같아?”
“그럼 뭐예요. 말 좀 해봐요. 답답하니까.”
고훈과 고수열이 정색하고 앙리를 압박했다.
서울 미술관부터 시작해 지난 반년간 이어진 이 기이한 관계를 정리하고 싶었다.
당황한 앙리 마르소가 입을 열었다.
“싫다.”
“말하기가 싫다는 거예요? 아니면 내가 싫다는 거예요.”
“둘 다.”
“그럼 왜 왔어요?”
“네가 뭘 그리는지 보려고.”
“그러니까 왜 보고 싶냐고. 아, 답답해 미치겠네.”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노먼이 슬며시 웃었다.
‘팬이네.’
좋아하지도 않은 사람의 그림을 3점씩이나 살 리 없다.
앙리는 푼돈이라고 하지만 고훈의 작품을 사기 위해 들인 돈을 합하면 2,100만 달러가 넘었다.
앙리 마르소의 연수익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푼돈으로 취급할 만한 금액은 절대 아니었다.
‘부끄러워하는 건가?’
노먼은 티격태격하기 시작한 고훈과 앙리를 보다가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얌전히 보이면 될 거 아냐?”
“그러니까 내가 왜 보여줘야 하는데요. 그리고. 보면 뭐 어쩔 건데요?”
“시시한 거나 그리고 있으면 못 하게 해야지.”
“그걸 왜 당신이 신경 쓰냐고요. 할아버지도 응원해 주시는데.”
“당당하면 보여주면 될 거 아냐!”
“싫다고!”
참다 못한 고수열이 앙리 마르소를 쫓아내려고 하던 차.
노먼이 입을 열었다.
“마르소 씨에게 제안 하나 할까 싶은데요.”
목소리를 높이며 다투던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노먼이 어깨를 으쓱이곤 소파에 등을 기댔다.
“기암성의 콘셉트 아트는 대외비예요. 훈이가 보여주고 싶다고 보여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죠.”
고수열과 고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하지만 마르소 씨가 볼 방법이 전혀 없진 않아요.”
앙리가 눈매를 좁히며 노먼을 재촉했다.
“기암성에 투자하세요. 그럼 한 식구가 되니 정당하게 요청할 권한을 가지게 되잖아요?”
“아뇨.”
고훈이 반대하고 나섰다.
“전 이 사람이 저한테 이래라저래라하는 거 못 참아요. 안 돼요.”
앙리 마르소도 몹시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많이 얕잡아 보인 모양인데. 노먼 감독, 이 앙리 마르소가 고작 꼬맹이 그림 하나 보자고 제작비를 대줄 것 같습니까?”
한 분야의 정점에 위치한 사람이기에 비교적 점잖은 단어를 사용했지만 말투만은 몹시 공격적이었다.
노먼이 어깨를 으쓱였다.
* * *
[억만장자 앙리 마르소, 노먼 감독 신작에 소액 투자하다]
[이번에도 고훈 때문? 마르소 재단, “프랑스 문학의 부흥을 위한 투자.”]
[영화 <기암성>에 100만 달러를 투자한 앙리 마르소]
지난 목요일. 프랑스 에트르타 절벽 주변에서 크리스틴 노먼 감독과 고훈, 앙리 마르소가 함께 있는 장면이 포착되었다.
노먼 스튜디오를 취재한 결과 억만장자 앙리 마르소가 영화 <기암성>에 100만 달러를 투자했음이 밝혀졌다.
노먼 스튜디오 대외정책실은 평소 프랑스 문학에 관심이 많았던 앙리 마르소가 <기암성>에 관심을 가졌고, 각본을 확인한 뒤 투자했다고 밝혔다.
한 전문가에 따르면 앙리 마르소의 투자는 상당히 신중한 선택이었다고 설명한다.
크리스틴 노먼 감독이 흥행을 보증하는 감독이라고는 하나, 다소 인지도가 떨어지는 ‘아르센 뤼팽 시리즈’를 다룬다는 점을 고려해 적정선을 지켰다는 분석이다.
한편 이미 충분한 예산을 준비해 두었던 노먼 감독이 앙리 마르소의 투자 의지를 수용한 이유는 그의 투자 사실이 영화 홍보에 영향을 주리라 판단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들은 현재 <기암성>의 촬영지를 답사하고 있다.
-아냐 스트레제만(타임즈)
앙리 마르소의 투자 소식에 팬들이 깜짝 놀랐다.
영화와는 인연이 없던 앙리 마르소가 갑작스레 <기암성>에 투자했다고 하니 몹시 의아했다.
타임즈와 여러 언론이 전한 기사를 본 팬들의 반응은 가지각색이었다.
└프랑스 문학의 부흥이랰ㅋㅋㅋㅋ 진짜 잘 가져다 붙인닼ㅋㅋㅋ
└응. 우리 형 책 안 읽어~
└아니야. 앙리가 얼마나 똑똑한데 ㅠ 작품 해설 같은 거 보면 진짜 엄청 심오하단 말이야.
└앙리 학벌 좋아. 책을 읽는지 안 읽는지는 몰라도 지적 수준은 최상위권일걸?
└근데 저기 왜 투자한 거야?
└나도 그게 궁금.
└고훈 때문인가?
└솔직히 그건 말도 안 되지. 고훈이랑 같이 일하고 싶은 거 아닌 이상 그럴 이유가 있나?
└예를 들어 투자자로서 직원 갈군다거나.
└훈이한테 지시하고 싶어서?
└그것도 말이 안 됨. 투자자가 어느 정도 개입은 할 수 있지만 노먼 감독이 어지간한 투자자한테 휘둘릴 사람은 아니지. 갑질하려고 하면 내쫓을걸?
└ㅇㅈ. 노먼한테 투자하고 싶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갑질이야.
└그럼 뭐지?
└내가 저 오빠 덕질 6년 했는데 이해하려고 하면 안 됨. 이해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야.
└맞아. 약간 사람처럼 보면 안 되는 게 있어. 만화나 영화 보는 것처럼 봐야 함.
└ㅋㅋㅋㅋㅋ팬 맞아? 말 너무 심하잖앜ㅋㅋㅋ
└근데 재밌긴 한가 봐. 앙리가 재미없는 데 돈 줄 리는 없고.
└그렇겠지?
└내 생각엔 앙리가 고훈 그림 젤 먼저 보려고 투자한 듯.
└?
└?
└이건 뭔 개소리야. 어떤 미친놈이 그림 빨리 보고 싶다고 100만 달러를 내.
└우리 형이 정상은 아니지만 호구는 아니야, 인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