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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반 고흐-98화 (53/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98화

25. 포스터(1)

고훈이 인물 설정화를 노먼에게 건넸다.

어젯밤 고훈에게 설정화를 받은 후로 도무지 진정할 수 없었던 감독은 서둘러 설정화를 살폈다.

그곳에 그녀가 머릿속으로 그렸던 재기발랄한 명탐정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총명한 눈빛은 앳되었고 앙다문 입에서는 굳은 의지가 느껴졌다.

뒤돌아선 자세를 통해 그가 무엇인가를 깨달았음을 알 수 있었다.

한 장을 넘겼다.

분노한 천재 소년이 이를 갈고 있는 표정, 크게 소리치는 얼굴, 당황하는 모습, 울먹이는 장면까지.

노먼 감독을 실로 감탄했다.

여러 작품을 작업해 왔고 모두 최고 수준의 콘셉트 아트 디자이너와 함께했던 그녀로서도 퍽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정말 처음 하는 일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최고야.”

노먼 감독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콘셉트 아트가 왜 중요한지 알아?”

종일 작업하느라 지친 고훈이 한숨을 푹 내쉬며 답했다.

“작업해 보니까 알겠더라고요. 이 그림이 기암성의 시작이라고.”

노먼은 소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것을 통해 그가 즐거워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맞아.”

노먼은 다음 달로 예정된 캐스팅에 고훈의 설정화가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고훈과 고훈을 도와 콘셉트 아트를 제작하는 디자이너의 손끝에 <기암성>이 달려 있었다.

아주 사소한 소품 하나부터 방, 거리, 마을 혹은 도시, 심지어는 날씨까지 모든 것이 설정화를 통해 전달되었다.

각본과 배우, 제작진을 연결하는 고리이자 모든 일의 기반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촬영지 후보를 고르는 일에도 함께하는 것이었다.

노먼은 자신의 역할과 중요성을 정확히 알고 있는 어린 천재가 더욱 믿음직스러웠다.

그녀가 씩 웃었다.

“이대로 잘 부탁해.”

“네.”

* * *

<기암성>의 사전 작업을 준비하는 한편, 올해 개봉작인 <이어 원> 프로젝트도 병행하던 노먼 감독은 수면 부족에 시달렸다.

그제 고훈의 설정화를 보며 겨우 힘을 내 편집본을 확인하던 중.

아트 디렉터 네이선 에반스가 찾아왔다.

“감독.”

노먼이 고개를 들었다.

미술 감독 네이선의 손에 들린 고훈과 콘셉트 아트 디자이너들이 작업한 설정화를 보곤 빙그레 웃었다.

다급히 온 그의 마음을 이해하기 때문이었다.

“어때?”

네이선 에반스가 뭐라 말하려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양손을 들어 보이며 어깨를 으쓱였다.

“말이 필요해?”

노먼이 네이선을 가리키며 펜을 흔들었다.

고훈 섭외에 반대했던 그에게 어떠냐고 묻는 듯했다.

“그래. 이번에도 감독이 옳았어. 그는 미쳤다고. 이대로 바로 3D 작업에 들어가도 돼.”

네이선 에반스는 고훈과 그의 지휘를 받은 디자이너들이 이틀 동안 그린 장소 몇 곳에 감탄했다.

노먼 감독과 함께 여러 작품을 함께한 네이선 에반스는 자신이 설마 설정화를 한 번에 통과시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네이선 에반스의 태도 변화에 노먼은 황당한 듯 웃었다.

“당신이 그렇다면 그런 거지. 이번에는 빨리 시작할 수 있겠네.”

“맡겨 둬.”

3D 모델화를 진행한다는 보고를 끝낸 네이선 에반스가 벌컥 문을 열었다.

막 노크하려던 줄리아 맥카시가 깜짝 놀랐다. 네이선은 손을 들어 보여 그녀에게 사과하고 방을 나섰다.

노먼 사단의 마케팅을 담당하는 줄리아 맥카시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안으로 들어왔다.

노먼이 싱글싱글 웃으며 물었다.

“무슨 일이야?”

“결재받으러 왔어요. 이제 슬슬 보도자료 내도 될 듯해서요.”

줄리아 맥카시가 <기암성>에 관련한 보도자료를 정리하여 노먼 감독에게 보였다.

모리스 르블랑의 아르센 뤼팽 시리즈 중에서도 <기암성>을 소재로 한다는 내용은 이미 공개했었다.

새로 추가된 내용은 곧 캐스팅이 진행됨과 실제 촬영이 2029년에 이뤄진다는 점, 그리고 유명 화가 고훈이 콘셉트 아트 매니저를 맡아준다는 내용이었다.

노먼이 인터폰 버튼을 눌렀다.

-네, 감독.

“선플라워 방태호 대표랑 약속 좀 잡아줘. 훈이도 같이.”

-30분 안에 보고드리겠습니다.

“고마워.”

비서에게 선플라워와 미팅을 잡으라고 지시한 노먼이 줄리아 맥카시에게 시선을 주었다.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줄리아 맥카시는 고개를 끄덕이곤 걱정스레 말을 붙였다.

“항상 그렇지만 너무 고생하시는 것 같아요. 이거라도 드시고 하세요.”

줄리아 맥카시가 챙겨 온 생과일주스를 테이블에 놓았다.

“고마워. 다음에는 카페인 든 걸로 부탁할게.”

“안 드릴 거예요.”

바쁜 와중에 농담을 나눈 두 사람이 가볍게 인사했다.

줄리아 맥카시가 밖으로 나서고.

순항을 시작한 <기암성>에 한숨 돌린 노먼 감독은 다시금 <이어원>의 편집 작업에 집중했다.

내일부터는 촬영 후보지를 답사하기 때문에 조금도 미룰 수 없었다.

* * *

[크리스틴 노먼 사단 신작 암시]

[거장, 모리스 르블랑 원작 소설 기암성을 다루다]

[노먼 감독, 극비리에 촬영 후보지 물색 중]

[화가 고훈, 영화 기암성의 콘셉트 아트 매니저로 합류하다!]

지난 16일, 세계적인 명성을 쌓은 영화감독 크리스틴 노먼 사단이 <이어원>의 개봉을 앞둔 시점에 신작을 예고했다.

작년 각본 작업에 들어갔다는 소식 이후 처음이다.

노먼 감독의 신작은 프랑스의 추리 소설 작가 모리스 르블랑이 집필한 아르센 뤼팽 시리즈 중 작품성을 인정받은 <기암성>이다.

총제작비는 알리지 않았으나, 노먼 사단의 홍보 담당자는 “지금껏 보지 못한 비주얼을 감상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입장을 보였다.

<기암성>은 내달 선발된 인원을 대상으로 오디션을 진행한다.

한편, 휘트니 비엔날레에 <가면>을 전시하며 화제를 모은 천재 소년 화가 고훈이 콘셉트 아트 매니저로 합류하여 이목을 모으고 있다.

크리스틴 노먼 감독은 “고훈은 기암성을 완벽히 이해하고 있다. 기암성은 내가 바라는 형태로 완성될 것”이라며 고훈을 향한 신뢰를 보였다.

영화계의 거장과 천재 화가의 만남이 어떤 결과물을 보일지는 2030년에 확인할 수 있을 예정이다.

-아냐 스트레제만(타임즈)

팬덤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고 있는 크리스틴 노먼 감독의 신작이 언론을 탔다.

<기암성>의 영화화 작업이 순조롭다는 보도에 아르센 뤼팽 시리즈의 팬들은 크게 환호했다.

TV 시리즈, 영화를 포함해 여러 번 각색되었던 ‘셜록 홈즈 시리즈’와 달리 ‘아르센 뤼팽’은 비교적 비주류인 탓이었다.

└이걸 해주네.

└다른 감독이면 몰라도 크리스틴 노먼은 ㅇㅈ이지.

└아르센 뤼팽 시리즈가 전체적인 완성도는 떨어져도 캐릭터 하나는 잘 뽑았음. 캐해석 오지는 노먼이면 믿고 봐도 될 듯.

└난 이런 기사 보면 진짜 돌겠더라. 2030년 개봉예정이면 1년 반 남았는데 어태 기다리라는 거야 ㅠ

└근데 고훈이 누구임?

└미술계 쪽에서 주목받고 있대. 고수열 화백 손자라던데.

└ㅁㅊ 찾아보니 9살이네. 9살짜리가 매니저를 맡았다고?

└말이 되나?

└그러게. 그림 잘 그리는 거야 그럴 수 있다고 쳐도 콘셉트 아트 그리려면 내용을 완전히 꿰고 있어야 하는데.

└고증도 중요함. 영화 만드는 기반 같은 거라서 고인물 시장이야. 어지간한 경력자 아니면 잘 안 씀.

└노먼이 고훈 그림 사려고 했던 이유가 있구만. 고훈 개인전 때 찾아가고 그때 결정한 듯.

└아, 고훈이 1,400만 달러에 그림 팔았던 애야?

└ㅇㅇ

└여기 그림 보는 사람 없나 보다. 우리 훈이 엄청 잘났어. 최고야 ㅠ

└영업 좀 해봐.

└[사진] 귀엽지! 얘가 그림도 잘 그리는데 엄청 똑똑해서 영어랑 불어도 잘하고 올해 초에 반 고흐 마지막 작품 뭔지도 찾았어.

└펭귄인데?

└펭귄이네.

└지금은 휘트니 비엔날레라고 세계에서 가장 큰 미술 전시회가 있는데 거기에 네 작품이나 걸었고. 앙리 마르소라고 엄청 유명한 미술가랑 노는 것도 진짜 대박 귀여워.

└앙리 마르소는 알지. 싸가지 없는 재벌 아님?

└어린애가 대단하네.

└앙리 마르소 알면 고훈 모를 수가 없음. 작년부터 계속 엮이는데 내 생각엔 고훈이 앙리를 조련하고 있는 듯.

└진짜 꼭 찾아 봐. 완전 귀엽고 그림도 진짜진짜 멋있음! <서리 밀밭> 추천할게.

└님 고훈이랑 아는 사이임? 좋다고만 하니까 믿을 수가 없네.

└저런 거 대부분 바이럴임.

└아니야 진짜야 ㅠㅠㅠ

└응 안 믿어~

└근데 크리스틴 노먼이 뭐 일을 대충하는 사람도 아니고 인기 때문에 사람을 뽑진 않았을 것 같은데.

└그것도 그러네. 잘하긴 하나 보다.

└유명세도 한몫했을걸. 휘트니 비엔날레에서 발표한 가면 때문에 미술계에선 난리도 아님. 매니저 자리 주고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거 보면 뻔하지. 기사에서 제작에도 참여한다고 하잖아. 단순히 그림만 그리는 일은 아닐 거임.

크리스틴 노먼 감독과 협업하게 되었단 소식에 미술에 크게 관심이 없던 사람들 사이에 고훈의 이름이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한편, 미술계에서는 고훈의 새 행보가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뭐?”

침대에 누워 천장에 설치된 TV를 보고 있던 앙리 마르소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벌떡 일어나 스마트폰을 펼쳤다.

크리스틴 노먼과 고훈을 검색하니 과연 관련 기사가 제법 올라와 있었다.

<기암성>이란 영화에 설정화를 담당하게 되었단 소식이 저명한 채널을 통해 소개되었다.

최근 2주간 잠잠하기에 귀국했을 것으로 여겼던 앙리 마르소는 고훈이 미술관이 아니라 영화관으로 활동 무대를 옮겼음에 크게 충격받았다.

아무리 크게 투자한다고 해도 영화 제작진이 콘셉트 아트에 할당할 수 있는 금액은 제한적이었다.

고훈 작품들의 경제적 가치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뭔 생각이야?”

돈 문제를 떠나서.

앙리 마르소는 미술을 타인의 지시를 받아 행할 수 없는 사내였다.

고훈을 자신과 같은 부류라고 생각했기에 앙리 마르소는 혼란스러웠다.

순간 고훈의 부모가 유명한 영화 미술 감독이었음이 떠올랐다.

어렸을 적부터 부모가 하는 일을 보고 자랐다면 혹시나 고훈이 진로를 그쪽으로 잡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까득.

그래서는 아니 되었다.

<마르소의 보석> 이후.

그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한 앙리 마르소는 반드시 그 빚을 갚아줘야 했다.

자신했던 휘트니 비엔날레에서는 무승부가 났으니 다음, 그다음에도 계속해서 승부를 내야 했다.

본인이 만족할 때까지.

어떠한 거리낌 없이 고훈을 확실히 넘어섰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그는 계속 미술관에 있어야 했다.

‘감히 도망을 쳐?’

고민하던 그가 스마트폰을 접은 상태로 통화버튼을 길게 눌렀다.

-아무르 님께 전화를 겁니다.

가장 최근에 연락한 미셸 플라티니와 연결되었다.

그녀가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바빠. 지금 통화해야 해?

“고훈 연락처 보내.”

-뭐? 잠깐! 거기 놓으면 안 돼요. 뭐라고?

“고훈 연락처 보내라고.”

-훈이? 훈이는 왜? 레번, 저기 가서 위치 좀 잡아 봐.

“찾아가게.”

-또 싸우려고? 훈이 허락도 없이 어떻게 알려줘. 그래. 거기가 좋겠다.

“네가 알려주지 않아도 오늘 저녁에 아냐, 지금 아냐의 차이야.”

-그럼 저녁에 알아. 끊는다. 쪽.

앙리 마르소가 끊어진 스마트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종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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