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95화
24. 이야기를 담는 일(3)
로스앤젤레스에서 보낸 이틀 동안 노먼 감독과 생각을 공유하는 데 주력했다.
그녀가 머릿속으로 그린 <기암성>은 놀랍도록 구체적이었다.
오늘은 복식을 확인하기로 했는데, 노먼뿐만 아니라 소품 디자이너와 자문가 두 명이 함께했다.
소품 관리인 에밀리 러버는 서적과 사진을 준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당시에 실제로 입었던 옷을 준비해 왔다.
대체 어떻게 구했는지 모를 골동품들이 여섯 개의 행거에 빼곡하게 걸려 있다.
황당해서 말이 안 나온다.
“어디서 구했어요?”
“이런 거 수집하는 사람이 많거든. 중고 시장을 한 번 쓸었지.”
에밀리 러버가 자랑스럽게 웃었다.
좀 더 뽐내도 될 듯하다.
시장이 형성되었다고는 해도 130년 전 옷을 이렇게 좋은 상태로 구하는 일이 쉬울 리 없다.
덕분에 노먼과의 소통도 수월해지고 콘셉트 아트를 그리는 일 자체도 훨씬 편하게 되었다.
노먼이 1900년대 사진을 보여주며 설명했다.1)
“법정 장면에서 레이몽드는 블라우스에 긴 치마. 리본은 반듯하고 모자는 살짝 기울여 썼어.”
노먼은 겉옷과 모자를 동그라미 쳤다.
수정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활동적인 사람이야.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근대적인 사고방식을 가졌고 사격과 승마에 능해. 실용성 있는 옷을 좋아하고. 신발도 굽이 없는 게 좋겠어.”
레이몽드란 인물을 마치 직접 본 듯이 설명한다.
노먼의 머릿속에는 이미 <기암성>이 완성되어 있다는 뜻이다.
“실용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면 굽이 없애는 것보단 낮은 게 어울릴 거예요.”
노먼과 러버가 고개를 들었다.
“거리가 더러웠거든요. 심한 곳에서는 치마를 들고 다녔어요. 대부분 굽 있는 구두를 신었고 긴 치마를 입으면 굽이 그만큼 높아야 했어요.”
내가 아주 어렸을 때는 사람들이 씻는 것조차 꺼렸다.
조금 크고 난 뒤에는 조금씩 위생관념이 생겼지만, 지금처럼 하루에도 몇 번씩 손을 씻는 건 생각도 못 했다.
파리 거리를 거닐면 건물 창문으로 똥이 심심치 않게 날아왔다.
프랑스인들은 꽤 오래전부터 오물을 그런 식으로 처리했는데, 우산과 높은 굽 구두도 그 때문에 생겨났다고 알고 있다.
길 가다가 똥오줌을 맞는 일이 빈번했으니 비가 오지 않아도 우산은 필수였다.
내가 파리에서 지낼 적에 배설물 투기를 금지하는 법이 만들어졌지만 시민들이 배설물 투기 금지법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어때?”
노먼이 자문가로 참석한 두 사람에게 물었다.
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세식 화장실이 보급되려면 우선 하수도가 갖춰져야 합니다. 유럽에서 가장 빠른 영국이 1860년이 되어서야 하수도를 만들었죠. 1900년대라면 파리라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좋아.”
합의하는 내용이 차츰 쌓여가면서 단색 소묘처럼 느껴지던 각본이 채색되고 있다.
오후에는 레이몽드의 복식을 그려서 노먼과 자문가들이 다시 확인한다.
노먼이 최종 결정하면 소품 관리인 에밀리 러버가 그와 최대한 유사한 옷을 준비하고 만약 구할 수 없으면 직접 만든다고 한다.
소품 디자인 팀이 몇 명이나 있는지 모르겠지만 정말 대단한 작업이다.
이렇게 반년을 준비하고도 실제 촬영에 맞춰서 쉬지 않고 돌아간다니, 한 편의 영화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달려드는지 헤아리기 힘들다.
* * *
일을 시작하니 처음에 고려했던 일주일이란 시간이 얼마나 짧은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실제 작업은 엄두도 못 냈고.
<기암성>의 세계관을 설정하고 이해하기에 급급했다. 이대로라면 앞으로 한 달은 함께해야 작업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
할아버지, 방태호와 저녁을 먹으러 코리아타운으로 가던 중에 걱정거리를 꺼냈다.
“학교는 어떻게 해요?”
출석일을 채우지 못하면 유급되어 같은 학년을 다시 다녀야 한다고 알고 있다.
“그러게. 생각보다 일이 길어지네.”
방태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노먼 감독과 이야기해 봐야 하겠습니다. 방학 전까지는 온라인으로 주고받고 방학 때 다시 만나는 쪽으로.”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할아버지가 앞쪽 좌석에서 고개를 돌렸다.
“학생이기도 하지만 또 지금은 콘셉트 아트 매니저이기도 하지 않느냐. 약속은 지켜야지.”
“저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유급되잖아요.”
“괜찮아. 학교는 언제든 다닐 수 있어. 할아버지보다 나이 많은 사람도 학교 다녀서 졸업장 따더구나. 오, 저길세.”
“…….”
“…….”
나도 방태호도 당황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름 심각한 고민을 너무 쉽게 여기시는 듯하다가, 다시 생각해 보니 할아버지 말씀대로다.
학교는 언제든 다닐 수 있고 <기암성>은 이번뿐이다. 더군다나 영화 작업을 함께하는 편이 훨씬 즐겁다.
“그럼 계속할래요.”
“그럼. 그럼. 할아버지는 계약할 때부터 그럴 거라 생각했다. 약속은 중요한 거야.”
“……그. 아닙니다.”
방태호가 뭔가를 말하려고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매장 안으로 들어섰다.
오늘 저녁은 순두부찌개라는 걸 먹는 모양이다.
기름진 음식에 지친 할아버지가 얼큰한 걸 먹고 싶다며 찾은 식당이다.
자리를 잡고 앉았다.
차림표를 보니 음식이 전부 빨갛다.
“안 매운 건 없어요?”
“따로 맵게 해달라 하지 않으면 안 매울 거야.”
방태호는 맵지 않다고 하지만 속지 않는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매운 정도에 대단히 관대하다.
혀가 아프고 귓구멍이 쑤실 듯이 매워야만 맵다고 하고, 혀가 얼얼한 정도는 맛있다고 한다.
“훈이는 들깨 먹으면 되겠다.”
할아버지가 추천한 메뉴를 찾아보니 과연 빨간색이 없다.
“들깨 먹을래요.”
할아버지와 방태호는 해물순두부찌개를 주문했다.
“그나저나 생각보다 오래 걸리네. 지금 아직 설정 따고 있지?”
“네.”
“디자이너로 계약했으면 가이드라인 받고 수정하며 진행했을 텐데 그게 아니잖나.”
할아버지 말씀대로다.
설명을 듣고 요구에 맞춰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라 제작에 직접 참여하고 있으니 일이 느는 게 당연하다.
분명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기도 하고 그 덕분에 러닝개런티를 챙겼으니 말이다.
“그럼 일정이 어떻게 되나? 독일에도 한 번 들러야지.”
할아버지가 물었다.
그러고 보니 물감 제조사 쉬민케와의 홍보 모델 계약도 있었다.
돈은 받아놓고 활동은 안 하는 것도 말이 안 되니 <기암성>을 준비하는 동안 몇 점 정도는 발표해야지 싶다.
“다다음 주 답사 예정되어 있지 않습니까? 프랑스랑 영국이 껴 있어서 가는 김에 들르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동선 낭비가 안 되니까. 그게 좋겠어.”
“네.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제작사에도 미리 언질해 두었고요.”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나를 보고 웃으셨다.
“그렇게 좋아?”
“네. 제일 기대돼요.”
노먼 감독은 아르센 뤼팽의 아지트 기암성을 어디서 촬영할지 고민 중이었다.
후보는 세 곳인데 하나는 실제 작중 배경이기도 한 프랑스의 에트르타 해변.
두 번째는 영국 도버 해변.
마지막으로 이곳 캘리포니아주에 있다는 맥웨이 폭포 주변이다.
우선은 맥웨이 폭포 주변을 답사해서 이미지를 보자고 했다.
올해 봄부터 도심에만 있어서 자연에서 멀어졌는데 이번 기회에 좋은 공기도 마시고 문득 찾아올 영감도 기대하고 있다.
“보기로는 도버가 참 멋진데.”
“가보셨어요?”
“젊을 때 가봤지. 백악 절벽이라고 깎아내린 듯해.”
“절벽이 하얘요?”
“음. 하얀 적벽 위는 녹지인데 거참 묘해. 참 묘해. 바다도 은은하니 좋고. 할아버지 생각엔 올드 해리 록스 주변이 참 좋을 것 같구나.”
어떤 장소인지 궁금해서 Old harry rocks로 검색해 보니 확실히 쉽게 볼 수 없는 광경이다.2)
녹지와 백악 절벽의 색감이 자연적으로 생성될 수 있는 건가 의심스러울 정도다.
인터넷에서는 침식이 이루어져 대지와 떨어졌다고 하는데, 페이지를 넘겨 상공에서 찍은 사진을 보니 절경이 따로 없다.
후보지를 둘러보기도 전에 마음에 들어버렸다.
“그런데 일반적인 상황은 아닌 듯합니다.”
방태호가 반찬으로 나온 멸치를 집어먹으며 말했다.
저 작고 귀여운 새끼 물고기를 통째로 먹는 게 처음에는 무척 큰 충격이었는데 이곳에서 주는 멸치는 조금 더 크다.
청소년기 정도가 아닐까 싶다.
“훈이 의사를 반영하겠다곤 했지만 촬영지 선정에도 발언권을 줄 거라곤 생각 못 했습니다.”
“아마 노먼 감독이 생각하는 바가 있을 테지. 또 훈이가 좋다고 무조건 그리 결정하는 것도 아니고.”
노먼 감독의 뛰어난 점은 강박증처럼 보일 정도의 집착도, 어마어마한 지식도 아니다.
본인이 그렇게나 뛰어나면서도 주변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는 점이 그녀를 세계 최고의 자리로 이끌지 않았나 싶다.
“설정 잡히면 콘셉트 아트는 자유롭게 그려 보라고 했어요.”
“흠.”
“어차피 보고 이야기하는 게 빠르대요. 설정에서 벗어나지만 않으면 최대한 제 스타일을 살리는 게 좋대요.”
“확실히 자유로운 편이구나. 일은 재밌어?”
“네. 정말 작은 물건에도 의미가 부여되잖아요. 또 한 장면마다 이야기가 있고. 그림 그리는 일하고는 달라요.”
지금까지는 감정을 담았다면.
<기암성> 작업은 이야기를 담는 일이다.
대상을 선별해야 하고 한 장만으로도 서사가 떠올라야 하니 기존에 내 방법과는 전혀 다르다.
이런 식이면 여러 장을 그림으로써 더 긴 서사를 완성할 수 있을 테고 그 또한 즐거운 일일 터.
항상 찰스 디킨스의 소설을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만 했지 만족스러운 결과는 내지 못했는데.
인상과 세부 묘사를 함께 잡아내어서 하나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놀라운 일을.
그 말도 안 되는 일을 시작한 거다.
즐겁지 않을 리가 없다.
* * *
1)Linley Sambourne, 1906, 영국 런던 크롬웰 거리에서.
2)Old Harry Rocks, a fantastic part of the Jurassic Coast, near Swanage, Dorset, England, By John Tomlinson, CC BY-SA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