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94화
24. 이야기를 담는 일(2)
이보다 설레는 일이 또 있을까.
감명 깊게 읽은 문학을 현실로 꺼내 보자는 제안이다. 거절할 수 있을 리 없다.
“좋아요.”
노먼과 손을 잡았다.
그녀는 확신을 주기에 충분한 힘으로 내 손을 잡았다.
함께하기로 했으니 이제는 방태호에게 협상을 맡길 차례다.
노먼 쪽 사람이 서류를 준비해 들어왔다.
* * *
고훈이 <기암성>에 관심을 보여 왔던 탓에 방태호는 영화 콘셉트 아트 디자이너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어떤 대우를 받고, 무슨 일을 하는지, 세부 내용은 어떻게 설정하는 게 고훈에게 유리한지 파악해 두었다.
항상 하던 일과는 전혀 다른 영역인지라 정보는 부족했으나 그렇다고 소홀히 할 순 없었다.
“반갑습니다. 선플라워의 방태호입니다.”
“다니엘 포트입니다.”
협상자끼리 악수했다.
크리스틴 노먼 사단의 다니엘 포트가 그들이 사용해 왔던 계약서를 내밀었다.
계약 기간은 없고 콘셉트 그림 한 장당 가격이 책정되어 있었다.
한 장에 500달러.
업계 평균보다도 적은 금액을 확인한 방태호가 눈썹을 좁혔다.
“페이를 어떻게 산정하셨는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방태호는 섣불리 따지지 않았다.
상대는 크리스틴 노먼과 함께 지난 수십 년간 영화계를 주름잡아 온 사람들이었다.
괜한 틈을 보이지 않고.
저들을 설득하기 위해 우선 신중히 나섰다.
“신인에게 드리는 조건입니다. 고훈 작가는 콘셉트 아트를 처음 맡으시고요.”
다니엘 포트는 이번 협상이 어렵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눈앞의 동양인은 무척 진지하여 여유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긴장하고 있다는 뜻.
다니엘 포트가 선심을 쓰듯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 계약서는 어디까지나 우리가 신인을 어떻게 대하는지 보여드리기 위한 사본입니다. 이걸 보시죠.”
새로 꺼낸 계약서는 그림 하나에 1,000달러를 약속하고 있었다.
“처음이라고는 해도 고훈 작가를 깎아내릴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저 또한 서리 밀밭을 감명 깊게 봤으니까요.”
다니엘 포트가 미소 지었다.
‘이것 봐라.’
방태호가 눈매를 좁혔다.
다니엘 포트의 말과 행동은 쉽게 요약되었다.
‘훈이가 얼마나 대단한지 충분히 알고 있고 적정 가격은 1,000달러라는 거지? 어느 정도 여지는 두고 있으니 한번 말해보라고.’
다니엘 포트의 연이은 농락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감정이 겉으로 드러나는 일은 없었다.
‘이렇게 나오시겠다.’
방태호는 다니엘 포트의 입장을 정확히 꿰고 있었다.
그도 이곳의 직원.
프리랜서에게 지불할 금액을 어떻게든 줄여야 하는 위치에 있으니 그녀는 직무에 충실할 뿐이었다.
방태호는 노먼이 협상을 맡긴 만큼 다니엘 포트가 계약을 그들 입장에서 합리적으로 맺어왔다고 추측했다.
또한 차후 문제가 없도록 법적 근거를 완벽히 했을 터.
저 여유롭고 노련한 태도를 보면 논리로 설득하기 어려울 듯싶었다.
‘까다로운 사람이네.’
실적을 지향하는 사람에게 양심이나 사명감, 감정에 호소하는 건 말이 안 되었다.
방태호가 다니엘 포트를 보며 미소 지었다.
“포트 씨께서는 노먼 감독님의 의사를 잘못 이해하신 것 같군요.”
“……잘못 이해했다?”
“네. 단순히 그림 잘 그리는 기술자를 찾으시는 거라면 아주 좋은 조건을 제안해 주셨지만.”
그러다가 고개를 돌려 크리스틴 노먼을 향해 미소 지었다.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죠. 훈이는 그래픽 작업은 할 수 없으니 그런 면을 생각하면 다른 사람을 구하는 편이 제작진을 위해서도 좋지 않겠습니까?”
방태호는 이런 사람을 상대하는 방법은 따로 있다고 믿었다.
회사에 이득을 가져다주면서 고용주로부터 신뢰를 쌓아 직장 내에서 인정받길 바라는 충실한 직원이 가장 꺼리는 일은 명백했다.
“무슨 말씀을 하는지 모르겠군요.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다면.”
“네. 몹시 불쾌합니다.”
방태호는 노먼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세계적으로 추앙받는 거장이자 재력가를 상대하자니 가슴이 터질 것 같았지만 고훈을 위해서 물러설 순 없었다.
“나쁜 조건은 아닙니다. 처음 일을 맡는 설정 화가에게는 아주 훌륭하죠.”
“그러면.”
“요청사항을 표현하는 일만 맡기시려면 다른 작가를 찾는 게 낫다고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방태호는 자신이 긴장하고 있음을 감추기 위해 목에 힘을 주었다.
“감독, 다니엘 포트 씨는 감독이 고훈 작가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는 것 같습니다. 시간을 좀 드릴까요?”
방태호는 노먼 감독이 고훈에게 바라는 일을 명확히 파악했다.
다른 설정화가처럼 감독이 요구한 사항을 그대로 실현해내길 바란다면 굳이 고훈을 찾아올 필요가 없었다.
고훈이 색을 활용하고 붓을 쓰는 일에는 정말 뛰어나지만, 기술이 뛰어난 사람은 얼마든지 있늬까.
더군다나 컴퓨터 작업이 불가능하니 기술을 사고 싶다면 고훈을 택할 이유가 없었다.
크리스틴 노먼 감독이 고훈에게서 본 가능성은 특유의 감성과 상상력.
산업화에 탄력이 붙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모든 생활 양식과 사고, 개념마저 바뀌는 변혁의 시대를 떠올리기에 적합한 화풍을 가졌기에 고훈을 선택했다고.
방태호는 그리 믿었다.
노먼이 입을 열었다.
“다니엘.”
“네.”
“미리 알려주지 못했네. 미안하지만 계약서를 다시 뽑아와 줄래?”
다니엘 포트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어떤 계약서로 준비할까요?”
“콘셉트 아트 매니저가 좋겠네. 조건 항목은 비워서 가져와.”
다니엘 포트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콘셉트 아트 디자이너는 요구를 수행하는 수동적인 입장이었다. 어디까지나 제작진이 영화를 만들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그러나 매니저는 달랐다.
노먼이 고훈과 매니저 계약을 하겠단 말은 아트 디렉터(미술 감독), 프로덕션 디자이너(공간 연출자), VFX 디자이너(시각 효과 연출자) 사이에서 고훈이 능동적으로 활동하길 바란다는 뜻이었다.
다니엘 포트가 고개를 숙이고 방을 벗어났다.
크리스틴 노먼이 깍지를 무릎에 대고 말했다.
“다니엘에게 미리 언질을 주지 못한 내 실수예요. 스케치에 빠져 있었거든요. 미안해요.”
“하하. 아닙니다.”
방태호는 땀을 닦아내고 싶었다.
고훈이 정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게 하려고 했지만, 노먼이 다니엘 포트의 제안을 본인 실수로 돌릴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어지간한 사람은 향후 문제 소지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책임을 직원에게 돌릴 터였다.
방태호는 다니엘 포트가 추궁을 당하든, 선수를 쳐 노먼 감독의 눈치를 보든 조건이 수정되길 바랐다.
그런데 노먼이 문제 원인을 본인이라고 명확히 하여 직원을 감싸고 직접 사과까지 하니 당황스러웠다.
‘다음부턴 청심환이라도 가지고 다녀야겠어.’
방태호가 억지로 미소를 유지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고수열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이 일은 방태호가 바로잡지 않았어도 크리스틴 노먼 감독이 나섰을 문제였다.
노먼과 고훈이 스케치를 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느라 생긴 오해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정이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방태호는 자신의 입장과 상대를 정확히 인지하고, 협상을 유리하게 이끄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큐레이터로서 뛰어난 역량을 지닌 그가 손자의 매니저로서도 충분히 활약해 줄 것 같았다.
“보수가 문제죠?”
그때 고훈이 나섰다.
다소 긴장되었던 분위기가 노먼 감독의 웃음과 함께 풀렸다.
“맞아요. 얼마를 줘야 하는지 사실 잘 감이 안 오거든. 어떻게 할까요?”
노먼 감독이 고훈에게 물었다.
그녀는 고훈이 어느 정도 금액을 예상하는지 알고 싶었다.
근거 없이 특별 대우를 해줄 생각은 없었지만, 적어도 고훈에게 기대하는 역할이 있기에 그 범위 안에서는 최대한 보장해 주고자 했다.
“예민한 문제예요.”
고훈도 이 상황의 무게감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
방태호를 믿기에 다니엘 포트의 말 같지도 않은 제안을 듣고만 있었지만, 모든 그림을 같은 가격에 계약할 순 없었다.
“한 장에 얼마씩 계산하는 방식은 받아들일 수 없어요.”
크리스틴 노먼은 고훈의 의견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그럼 기간으로 정하는 건 어때요?”
고훈이 고개를 저었다.
“태호 아저씨도 말했지만 전 감독과 기암성을 만들고 싶어요. 주는 일만 받아서 하게 된다면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는 게 나아요.”
노먼은 적극적으로 나서서 의욕을 보이는 소년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자질을 갖춘 사람이라도 목적이 오직 돈이라면 좋은 결과가 나올 리 없었다.
“이렇게 하는 건 어떨까요.”
노먼이 미소 지으며 고훈과 눈을 마주했다.
“고훈 군의 그림을 일괄적으로 가격을 매길 수 없고, 주급으로 지급하는 것도 문제니 러닝 개런티를 가져가는 건 어때요?”
“러닝 개런티?”
“영화 흥행 수익의 일정 부분을 출연자나 제작진에게 배분하는 방식이에요.”
고훈이 신중하게 고민했다.
“그리고 콘셉트 아트의 권한은 모두 고훈 군이 가져가는 거죠.”
고훈으로서는 차라리 반가운 제안이었다.
설정화를 그리는 행위 자체가 <기암성>이라는 영화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 영화의 가치에 따라 수익이 정해지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작업물의 권한도 챙길 수 있으니 가치 절하되는 일도 없었다.
“다만 독점적 사용권은 합의해 줘야 해요. 콘셉트 아트북을 출간하기도 하고 홍보 자료로도 사용해야 하니까.”
“그건 따로 계약서를 써주셨으면 합니다.”
방태호가 나서서 계약을 분리하고자 했다.
협상할 거리는 많아지지만 그림의 저작권과 사용권, 복제권 등 복잡한 권리를 명확히 구분 짓기 위해서는 별도의 계약서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허허.’
고수열은 합의점을 찾아가는 세 사람을 보며 속으로 웃었다.
고훈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명확히 표현했고 방태호는 곁에서 잘 돕고 있었다.
점점 더 고훈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 줄어드는 것만 같아서 심란하기도 했다.
뉴욕에서도 이곳 로스앤젤레스에서도 고수열은 방관하는 입장이었다.
병실에 누워 있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한데 고훈은 너무나 빨리 품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천천히 컸으면 좋겠거늘. 욕심이지.’
다니엘 포트가 새 계약서를 가지고 들어왔다.
“이 돈은 뭐예요?”
“최저임금이에요. 지불하지 않으면 문제가 생기죠.”
“훈이가 이번 영화의 콘셉트 아트 매니저로서 보장되는 권한과 의무를 명시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죠. 다니엘, 네이선에게 연락해서 잠깐 올라오라고 해.”
한 번 물꼬를 튼 대화가 열띠었다.
고수열은 어른들 사이에서 눈을 빛내며 의견을 내놓는 손자를 기특하게 바라보았다.
그렇게 고훈은 영화 <기암성> 프로젝트에 콘셉트 아트 매니저로 참여하게 되었고.
제한된 영역에서 자신의 상상력과 표현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권한을 얻을 수 있었다.
동시에 최저임금으로 시간당 23.15달러의 현금과 콘셉트 아트북 판매 매출액의 12%.
그리고 <기암성>의 러닝 개런티(수익배당금) 0.5%를 얻게 되었다.
* * *
긴 협상에 지친 고훈이 숙소에 들어서자마자 침대에 엎드렸다.
“흐흐. 지쳤어?”
“네. 머리가 터질 것 같아요.”
고수열이 웃으며 고훈의 머리를 헝클었다. 그러고는 씻고자 욕실로 들어섰다.
큰 욕조를 발견한 고수열이 아직 엎드려 있는 손자에게 물었다.
“훈아, 욕조 있다. 목욕할까?”
고훈이 얼굴을 파묻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때를 미는 목욕 방식이 무척 마음에 들었는데, 등처럼 혼자서 밀기 힘든 부위가 있었다.
처음에는 질겁을 하던 고훈도 할아버지와 서로의 등을 밀어주는 목욕을 즐기게 되었다.
이태리 타올을 가져오긴 했지만 미국에 온 뒤로 뜨거운 물에 몸을 불린 적이 없었기에 고훈은 지친 몸을 이끌고 욕실로 향했다.
“끄으으으어.”
“크으으으아.”
할아버지와 손자가 마주 앉아 앓는 소리를 냈다.
눈을 감은 채 가끔 얼굴을 닦는 손자가 그저 귀여웠다.
“오늘 보니 훈이 말 잘하던데.”
“한국말도 빨리 늘고 싶어요.”
영어든 불어든 생각을 정확히 전달하는 일이 쉬울 리 없었다.
“어디서든 그렇게 자기 생각 똑바로 말하는 게 좋아.”
“네. 으으. 좋다아.”
고훈이 뜨거운 물을 즐기며 신음했다.
“이제는 할아버지 없어도 잘하겠어. 다 컸어.”
고수열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고훈이 벌떡 일어났다.
깜짝 놀란 고수열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왜? 무슨 일 있어?”
“죽어요?”
“얘가 왜 또 뚱딴지같은 소리야?”
“진짜 안 죽어요? 이번엔 진짜 아니에요?”
“안 죽어!”
“그럼 왜 갑자기 없어도 잘하겠다고 해요? 사람 놀라게!”
고수열이 몇 달 전 일을 떠올렸다.
고작 삼겹살 사 줬다고 왜 이렇게 맛있는 걸 먹이냐, 죽는 거 아니냐고 애처롭게 물었었다.
자기가 죽을까 봐 울먹이는 것을 보니 아직은 애는 애인 듯했다.
아직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든 나이에 부모까지 여의었으니 자신에게 기대는 것이리라.
“이 녀석아, 말했잖아. 할아버지 안 죽는다고.”
“사람이 어떻게 안 죽어요. 언젠가는 돌아가시겠죠.”
“…….”
“그러니까 제발 그런 말 좀 하지 말아요.”
고수열은 세상 진지하게 말하는 손자가 귀엽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했다.
“그래. 그래. 할애비가 잘못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