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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반 고흐-93화 (48/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93화

24. 이야기를 담는 일(1)

크리스틴 노먼 감독은 올해 개봉 예정작 <이어 원>의 제작 발표회를 마치고도 손을 놓지 않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촬영본을 돌려보며 편집 작업에 열을 올렸다.

그러던 중 고훈과 약속한 날짜가 다가왔다.

음악 작업차 방문했던 베를린에서 로스앤젤레스로 향하던 노먼이 소품 관리인(Props manager) 에밀리 러버가 전한 소식에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도 진품을 대여해 줄 순 없다고 합니다.

크리스틴 노먼이 콧잔등을 매만지다가 입을 열었다.

“알았어. 예정대로 섭외 이어가고 보고는 계속해.”

-네.

통화를 마친 크리스틴 노먼이 고개를 슬쩍 젖혔다. 의자에 등을 파묻고는 고민에 잠겼다.

영화 <기암성>의 배경은 전설적인 도둑 아르센 뤼팽의 아지트였다.

뤼팽의 화랑에는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작품 네 점을 비롯하여.

라파엘로의 <성모화>, 안드레아 델 사르토의 <루크레치아 델 페데의 초상화>, 티치아노의 <살로메>, 보티첼리의 <성모와 천사들>은 물론.

카르파치오와 렘브란트, 벨라스케스의 작품.

심지어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도 소개되고 있었다.

작가 모리스 르블랑이 당대에 생각해낼 수 있는 걸작이란 걸작은 모두 적어두었기에 작품 섭외 과정이 원활할 수 없었다.

다른 영화였다면 모조품을 사용했을 테지만.

완벽주의자 크리스틴 노먼 감독에게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영화의 완성도를 위하여 어떤 장면이든 실제로 촬영해 온 그녀는 호텔 복도가 돌아가는 장면을 표현하기 위해 360도 회전이 가능한 복도 세트장을 만들기도 했으며.

비 오는 장면을 실감 나게 표현하기 위해 하늘을 암막으로 가린 뒤 비를 뿌리기도 했다.1)

카메라에 담긴다면 그것이 설령 머리카락 한 올, 물 한 방울이라도 그녀의 허락을 받아야만 했다.

소설 <기암성>에 등장하는 명화도 마찬가지.

노먼 사단은 미술품을 소유하고 있는 미술관, 박물관, 갤러리 등지에 촬영 섭외를 시도했다.

그러나 꽤 오랜 준비에도 작품 훼손을 우려하는 미술관을 설득하지 못하고 있었다.

노먼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두통을 달랬다.

아트 디렉터 네이선 에반스가 입을 열었다.

“사본이라도 구해야 하지 않을까. 다른 작품은 몰라도 루브르 박물관이 모나리자를 빌려줄 것 같진 않은데.”

“그러게.”

노먼이 얼굴을 쓸었다.

아주 작은 가능성만 있어도 기꺼이 도전했지만 불가능한 일에 무모하게 뛰어드는 사람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영화는 제작 기간이 하루 늘어나는 것만으로도 제작비가 크게 늘어났다.

노먼이 눈을 부릅 떴다.

“모조품은 안 돼.”

감독의 단호함에 아트 디렉터 네이선 에반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모나리자와 비견할 만한 작품이 뭐가 있을까. 20세기 초 기준으로.”

“흠. 살바토르 문디?”

노먼이 손목을 돌리며 재촉했다.

“다빈치 작품인데. 2017년이었나? 4억 5천만 달러에 낙찰됐지.”

크리스틴 노먼이 눈썹을 잔뜩 모았다.

초대형 블록버스터 영화 두세 편을 찍고도 남을 만한 액수를 믿을 수 없었다.

다만 그만큼 가치를 인정받는 걸작이라는 뜻이고 레오나르도 다빈치라는 이름이 주는 파급력도 무시할 수 없었다.

섭외를 시도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어디 있는데?”

“루브르 박물관.”

크리스틴 노먼이 이마를 짚었다.

협상의 여지라고는 조금도 내비치지 않는 루브르 박물관과 의미 없는 협상으로 아웅다웅할 시간 없었다.

“다른 건?”

“흠. 바로 떠오르는 작품이 있긴 한데 쉽지 않을 거야.”

“뭐든 좋아. 지금은 좋은 발상이 아니라 최대한 많은 의견이 필요해.”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 북유럽의 모나리자라고 하지.”

익숙한 제목이었다.

동명의 소설과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그림을 깊이 파고들진 않았지만, 어느 정도 취미를 붙이고 있던 노먼도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를 본 기억이 났다.

핸드폰을 펼쳤다.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를 검색하자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노먼은 소품 관리인 에밀리 러버에게 메시지를 보내, 섭외할 품목을 추가했다.

상황을 지켜보던 아트 디렉터 네이선 에반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만약 그림을 구할 수 없으면.”

노먼이 고개를 들었다.

“제작으로 가는 건 어떨까 싶은데.”

“계속해 봐.”

“실력 있는 화가는 많아. 멋진 회화를 거는 거지. 모더니즘 이전 화풍으로 의뢰해서.”

크리스틴 노먼이 고개를 저었다.

네이선 에반스의 의견은 합리적이었지만, 명화가 내포하는 내재적 의미가 중요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모나리자보다 잘 그린 그림을 백 점 보여줘봤자 모나리자 한 점을 보여주는 게 훨씬 효과적이지.”

“그건 그렇지.”

영화 속에서 <모나리자>는 큰 비중이 없을 터였다.

10프레임 정도는 노출될까.

영화는 치밀하게 짠 대본을 기반으로 짧은 시간 안에 하나의 이야기를 종결해야 했다.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선 상징물을 오래 보여줄 수 없었다.

때문에 1초도 안 되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노출됨에도 아르센 뤼팽이 얼마나 대단한 도둑인지 설명할 수 있는 <모나리자> 같은 명작이 필요했다.

네이선 에반스가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그럼 박물관보다는 개인 수집가를 노리는 편이 나을 거야. 우리 영화에 출연한 것만으로도 그들은 그 그림에 프리미엄을 붙일 수 있으니까.”

노먼이 고개를 끄덕였다.

많은 수집가가 그림을 투자 대상으로 여겼고, 자신이 소장하는 작품의 가치가 오르길 바랐다.

크리스틴 노먼 감독의 영화에 소개된 작품이라면 더 높은 가격을 형성할 이유로 충분했다.

썩 내키는 방법은 아니었으나, 만일 그렇게라도 작품을 구할 수 있다면 감내할 요량이었다.

“그것도 고려해야겠지.”

노먼이 소품 관리인 에밀리 러버에게 한 번 더 지시사항을 보냈다.

* * *

노먼 감독과 만나기로 약속한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했다.

한 나라인데도 비행기 안에서만 4시간 이상 있었으니 미국이란 나라가 얼마나 넓은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는다.

노먼이 공항으로 사람을 보내주어 숙소까지 편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일주일 만에 시차가 또 바뀌니 정신이 없어서 금방 곯아떨어졌다.

다음 날.

할아버지, 방태호와 함께 노먼을 찾았다.

세계 최고의 영화감독은 어떤 곳에서 일할까 궁금했는데, 한국 초등학교 부지보다도 넓은 지대에 작은 건물이 여럿 들어서 있다.

용도를 알 수 없는 거대한 트럭도 있고 심지어는 중세에 쓰던 갑옷도 보인다.

보는 것마다 신기할 따름이라 눈이 즐겁다.

“허허. 장관이구나.”

할아버지도 감탄하셨다.

“저런 게 다 영화 만들 때 필요해요?”

“또 하나의 세계를 만드는 거니 아무래도 공을 들일 수밖에.”

또 하나의 세계를 만든다는 말에 가슴이 뛴다.

물감과 붓 그리고 캔버스로 표현하는 것을 넘어서 저런 물건을 직접 만들고 심지어는 마을을 조성해서 카메라에 담는다고 하니.

영화라는 문화가 얼마나 대단한지 새삼스럽다.

안내해 준 직원이 노크하고 문을 열어주었다.

크리스틴 노먼이 책상 위에 쌓인 서류 위로 얼굴을 보였다.

“어서 와요.”

눈 주변이 어두워 무척 피곤해 보인다. 나는 잘 몰라도 영화에 관련한 일로 한창 바쁜 듯하다.

“안녕하세요.”

차례로 악수를 나누고 마주 앉았다. 음료수를 마시며 적당히 안부를 물었다.

“음악 작업은 잘 됐어요?”

마지막에 봤을 때 곡 작업을 위해 베를린으로 간다고 들었다.

“아주 멋진 곡이 완성되었죠. 프란츠 페터라고 알아요?”

고개를 저었다.

“아, 베를린 필하모닉.”

방태호는 아는 모양이다. 아마도 베를린 필하모닉이라는 악단의 작곡가인 듯하다.

크리스틴 노먼 감독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재능 있고 노력하는 친구라 기대했는데 결과물이 좋게 나왔죠.”

노먼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비엔날레 기사는 봤어요. 앙리 마르소랑 또 한바탕했다고.”

노먼이 웃으며 사인회 이야기를 꺼냈다.

어떤 기자가 내가 앙리 마르소를 조련한다는 기사를 쓰고 말았다. 덕분에 그를 진심으로 위했던 행동이 앙리 마르소를 괴롭힌 꼴이 되어버렸다.

“오해가 있더라고요.”

그러고 보니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못했다.

볼 때마다 시비를 거는 통에 정작 해야 할 이야기를 못 한다. 언제고 한 번은 자리를 마련해야지 싶다.

<해바라기>, <손님>, <서리 밀밭>이 휘트니 비엔날레에 전시될 수 있었던 건 모두 그 사람 덕이니까.

“이번 작품도 멋졌어요. 정말 인상적이던데요?”

“제 생각도 그래요.”

사실 아직 한참 남았다고 생각하지만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최선을 다했기에 흡족하다.

“다음엔 더 멋진 걸 그릴 거예요.”

가방에서 준비해 온 스케치북을 꺼냈다.

“스케치를 해봤어요.”

노먼이 진지하게 스케치를 살폈다.

그녀와 함께 일하기 위해서는 우선 내가 콘셉트 아트를 소화할 수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

지금까지 그리던 그림과는 달리.

타인의 세계를 표현해 주는 일이기 때문에 정말 많은 대화를 나눠야 하고 또 서로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스케치를 미리 준비한 이유도 현재 내 그림을 정확히 알리기 위함이다.

“여기 이 마차는 바퀴살이 안쪽으로 살짝 들어가 있네요?”

“네.”

내 기억에는 대부분의 바퀴가 안쪽으로 살짝 들어가 있었다.

내구성을 강화하기 위함인지, 아니면 단순히 멋을 위한 형태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내가 죽기 직전까지 마차 바퀴는 저런 형태였다.

노먼이 두 장을 더 보고 말했다.

“마차 종류가 상당히 다양하네요.”

“유행이 있긴 해도 핸섬 캡이나 랜도, 블룸 모두 두루 쓰였으니까요.”

마차 덮개를 접을 수 있는 랜도 마차는 19세기 초부터 유행을 탔다.

그러다가 지금의 자동차처럼 사방이 막혀 있고 창문을 달아놓은 블룸이 나오면서 차츰 시들해졌지만 워낙 고가였기에 랜도든 블룸이든 그 이후에 나온 핸섬 캡이든 가리지 않고 사용했었다.

<기암성>의 시대 배경이 20세기 초반이니 아마 자동차를 구입할 수 있는 사람이라도 마차를 버리진 않았을 거다.

또 자동차를 마련할 수 없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을 테니 아마 마차가 주 이동수단이지 않았을까.

노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멋져요. 특히 기차는 정말 자세하네요. 외관은 자료가 많은데, 내부는 원체 적으니까. 따로 조사하고 그린 건가요?”

“네. 어떤 걸 바라는지 몰라서 일단 찾아볼 수 있는 만큼만 준비했어요. 상상도 들어갔고.”

노먼이 스케치북을 내려놓았다.

미간에 양쪽 검지를 대고 고민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기대 이상이에요. 우리가 생각지 못한 부분도 발견할 수 있었고요. 마차는 설계도 만들 때 써도 될 듯하네요.”

“마차를 직접 만들어요?”

“지금은 박물관에서나 찾을 수 있으니까요.”

영화감독이란 직업은 대체 지식의 영역이 얼마나 넓어야 하는 걸까.

단 하나의 영화를 만들기 위해 미술과 음악, 각본을 위한 문학적 소양은 기본으로 요구되는 듯하다.

분야별로 전문가를 두고 있겠지만 할아버지 말씀대로 정말 또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려는 것처럼 말한다.

“이렇게 고증과 관련된 일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정말 바랄 게 없겠어요. 솔직히 당장 계약서를 가져오라고 말할 생각이에요.”

노먼이 나와 눈을 마주했다.

“같이 해볼래요?”

* * *

1)인셉션, 크리스토퍼 놀란,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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