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92화
23. 이유(3)
진행자라는 직업은 먹고 살기 힘든 직종 같다.
난감한 질문이긴 했지만 생일을 물어보았다고 입에 담기도 힘든 말이 쉬지 않고 올라온다.
애초에 프로그램 제목도 ‘대화를 나눠요’였고.
또 토크쇼라고 하기에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줄 알았는데 질문에 대답만 하면 될 듯하다.
잔뜩 흥분해서 사과하고 화내기를 반복하던 진행자가 언제 그랬냐는 듯 미소 짓는다.
얼마나 뻔뻔한지 어쩌면 일부러 과장해서 반응했나 싶기도 하다.
프로는 프로다.
“그러면 좋아하는 음식. SNS 계정을 보면 음식 사진이 많은데요. 그러고 보니 첫 개인전에서는 디저트를 많이 다뤘죠?”
“네.”
“어떤 음식을 좋아해요?”
“포테이토 피자, 짜장면, 탕수육, 치킨, 초콜릿이요.”
└딱 얼라 입맛이넼ㅋㅋ
└짜장면이 뭐야?
└탕수육?
└미국 촌놈들 짜장면 모르죠? 탕수육 모르죠?
└한글로 놀려봤자 못 알아들어.
채팅창이 너무 빠르게 올라가서 뭐라고 하는지 제대로 알아볼 수 없다.
그나마 짜장면이나 탕수육이 뭐냐는 글은 반복되어 알아볼 수 있었다.
그 맛있는 요리가 유럽과 미국에서는 알려지지 않는 게 신기하다.
우진이 시청자들을 위해서 ‘짜장면’과 ‘탕수육’이라는 고유명사를 영어로 풀어서 설명했다.
짜장면은 black bean sauce noodles라고 하고 탕수육은 Sweet and sour pork라고 하는데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검은 콩 소스 국수는 그렇다 쳐도 새콤달콤한 돼지고기라니.
인정할 수 없다.
“그럼 싫어하는 음식은?”
“할아버지가 만든 요리요.”
카메라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할아버지가 몸을 움찔했다.
방송 때문인지 소리는 내지 않으시고 주먹을 아래로 휘두르며 항의하신다.
“하핳. 고수열 화백께서 요리 실력은 아쉬운가 보네요. 보통 어떤 요리를 해주세요?”
“녹차밥이랑 버섯 마요네즈 샐러드, 소고기 냉국. 아, 김치는 너무 짜요.”
“…….”
“그래도 돼지고기 짜장볶음, 오리짜장탕 같은 건 맛있어요.”
진행자의 표정이 안 좋다.
채팅창을 보니 물음표로 가득하다.
“도전 의식이 돋보이는 메뉴네요.”
황급히 화제를 바꾼다.
원래 방송이라는 게 이렇게 정신 사나운 일인가 싶다.
두 시간 정도 흘렀을까.
“수고하셨습니다.”
“고생했어! 좋아!”
방송을 마쳤다.
생각보다 훨씬 힘들었는데, 제작진들은 시청자가 최대 20만 명이 넘었다며 기뻐했다.
“이래서 애들이 무섭다고.”
그런 한편 진행자 우진은 잔뜩 지쳐 보였다. 악수를 나누곤 혼자 뭐라 중얼거리며 어디론가 가버렸다.
할아버지와 방태호에게 다가갔다.
“잘했어요?”
“어. 최고였어.”
방태호가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힘차게 마주쳤다.
“가자.”
할아버지의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싶어 방태호를 바라보니 작게 웃었다.
“상처받으셨나 봐.”
“요리 때문에 그래요?”
할아버지의 등허리에 손을 얹으며 물었다.
“아니다.”
단단히 삐친 듯하다.
이럴 줄 알고 맛있게 먹은 음식도 언급했는데 그걸로는 통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오리짜장탕 맛있었어요.”
“됐다.”
“정말로요. 태호 아저씨도 좋아할걸요?”
방태호가 당황했다.
“맛있어요. 푹 익혀서 오리에 간도 잘 배고 국물도 엄청 진해요. 찾아보니까 그런 요리 파는 데 없더라고요. 할아버지만 만들 수 있는 거예요.”
할아버지의 귀가 움찔거렸다.
반응이 있는 듯해 좀 더 풀어냈다.
“고기가 그렇게 부드럽게 되려면 정성이 얼마나 들어가는데요. 돈 아무리 많이 줘도 다른 데서는 못 먹어요. 후회하지 말고 나중에 꼭 먹으러 와요.”
뒤돌아 계신 할아버지가 고개를 살짝 튼 것을 보고 방태호에게 눈치를 주었다.
“아, 아 그래애? 이야, 그거 정말 먹어보고 싶은데. 선생님, 부탁 좀 드려도 될까요? 정말 너무 맛있어 보여서 꼭 한번 먹고 싶습니다.”
방태호의 어색한 연기가 통한 듯.
할아버지가 헛기침하셨다.
“배고프겠다. 어서 가자.”
이번에는 소리가 나지 않게 방태호와 주먹을 살짝 맞부딪쳤다.
* * *
호텔로 돌아와서 저녁을 먹던 중.
차시현이 소중한 밥을 앞에 두고 볼만 부풀리고 있다.
“왜 그래?”
“내일 돌아가야 하니까. 아저씨, 저 훈이랑 조금만 더 있으면 안 돼요?”
“네. 안 됩니다.”
“내일부턴 일해야 해.”
비서 정진호와 내가 차례로 답하자 이번에는 입을 쭉 내민다.
아마 학교에 혼자 가기 싫은 것이리라.
아이들에게 은근히 무시당하며 고립되어 있으니 말이다.
“괜찮아. 걔들이 너한테 아무리 뭐라 해도 신경 쓸 것 없어.”
상처받지 않을 리 없지만 적어도 부모님에게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지 기억한다면 이겨낼 수 있다.
“네가 걔들보다 똑똑하잖아.”
“그런 거 때문 아니거든.”
“그럼?”
차시현이 몸을 휙 돌려 앉았다.
“나도 그림 그릴래.”
“그려. 아버지도 허락하셨잖아.”
“그게 아니라 너처럼 하면 같이 다닐 수 있잖아.”
“나랑 너랑 다른 거 없어. 좋아하는 거 그리고 좀 더 잘 그리고 싶어서 연습하고. 남들한테 보여주다 보면 되는 거지 특별한 일이 아니야.”
정말 많은 일을 후회했지만.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림만 그리기로 한 결정은 정말 잘못되었다.
타는 듯한 갈증 때문에.
그림을 그리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혀 무작정 달려들었지만 그때까지 모아두었던 돈이 바닥을 보이고 나서야 현실을 직면했다.
만약 내가 일정한 수입을 가진 채 그림을 그렸다면 같은 기간 안에는 훨씬 적은 작품을 그렸겠지만.
적어도 건강하고 꾸준히 활동할 수 있었을 거다.
인생은 전력으로 질주하는 게 아니라 자기만의 속도로 오래 달리기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림 좋아하잖아. 그러니까 편하게 그려. 실력도 늘고 아는 것도 많아지고 하면 그때 가서 결정해도 돼.”
부잣집 도련님이라 그때의 나처럼 굶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는 건 크나큰 축복이다.
“응.”
차시현이 시무룩하게 답했다.
* * *
“내일 8시에 깨우겠습니다.”
“네. 안녕히 주무세요.”
아저씨가 나갔다.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는데 잠이 오지 않는다.
휘트니 비엔날레는 생각보다 훨씬 이상했다. 입장료를 받지 않는 것도 전시된 작품도 전부 이상하다.
그래도 훈이가 그린 <해바라기>랑 <가면>은 정말 좋았다.
특히 <가면>은 오일러 등식만큼 예뻤다.
두 그림 모두 노란색이 너무 예뻐서 어떤 색을 섞으면 저렇게 되는지 알고 싶었다.
훈이가 오일 파스텔을 녹여서 섞는 방법을 가르쳐 줬지만 내가 하면 이상하게 잘 안 됐다.
계속하다 보면 언젠가는 훈이처럼 잘 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게 언제인지 모른다.
선생님들은 문제 푸는 방법을 잘 알려주시는데, 훈이랑 훈이네 할아버지는 안 그런다.
꼭 내가 먼저 실패하고 난 뒤에 말해준다.
왜 그럴까.
처음부터 성공하고 빨리 배우는 게 좋지 않나?
그렇게 물을 때마다 훈이는 못 해야 잘할 수 있다는 이상한 말을 했다.
오늘도 비슷한 말을 했다.
빨리 멋진 파란 나무를 그리고 싶어서 그림만 계속 그렸는데 훈이는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했다.
왜 그럴까?
<가면>을 그리기 위해서 2주 이상 잠도 못 잤으면서, 그렇게 힘들었으면서 어떻게 실패를 무서워하지 않을까.
모르겠다.
그렇게 고민하다 보니 잠을 못 잤다.
아저씨랑 약속한 여덟 시까지 얼마 남지 않아서 이를 닦는 중에도 자꾸만 졸립다.
쿵쿵쿵-
갑자기 누가 문을 두드려서 깜짝 놀랐다. 치약을 뱉고 물었다.
“아저씨?”
“나야.”
훈이 목소리다.
어제 조심해서 가라고 해서 못 볼 줄 알았는데 출발 시간에 맞춰 와줬다. 서둘러서 입을 헹궜다.
문을 열자 스펀지빵 티셔츠를 입은 훈이가 스케치북을 들었다.
“이거 왜?”
“몰라? 색칠놀이라는 거야.”
훈이가 스케치북을 열어서 안쪽을 보여줬다. 색이 없는 그림이 엄청 많다.
훈이가 설명해 줬던 반 고흐 그림도 있다.
“나 주는 거야?”
“응. 이거 하루에 하나씩 해. 여기까지 하면 돌아갈 테니까.”
훈이가 12페이지를 가리켰다.
그림이 없는 페이지를 빼도 10페이지나 된다.
“일주일 뒤에 온다고 했잖아?”
“안 통하네.”
“나 바보 아니야! 나보다 수학도 못 하면서!”
같이 놀고 싶은 마음도 몰라주고 자꾸 놀리기만 하는 훈이가 미워서 소리 지르고 말았다.
이렇게 금방 싫어하면 어쩌지, 화내면 어쩌지.
걱정할 거 알면서도 웃어주니까 자꾸만 심한 말을 하게 된다.
“혹시 일이 많아지면 기다릴 거 아니야. 그래서 넉넉하게 잡았으니까 서운해하지 마.”
“…….”
“나 없다고 울지 말고.”
“안 울어! 히잉.”
훈이가 머리를 툭툭 다독였다. 고작 한 살 많으면서 아저씨들처럼 달랜다.
“아, 맞다. 이거. 다 풀었어.”
“어?”
훈이가 내가 준 문제집을 돌려줬다. 일주일밖에 안 됐는데 벌써 풀 수 있을 리 없을 텐데.
“이런 거 배우기엔 너무 일러. 어려워. 어려워.”
“말도 안 돼.”
정말 다 풀었다. 틀린 답도 있지만 정답이 훨씬 많다.
“덕분에 수학 시험은 걱정 안 해도 되겠어. 그럼 조심히 가. 그거 재밌다고 계속하면 안 돼. 하루에 한 장만.”
훈이는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그림 너무 예쁘고 어른들 앞에서도 씩씩하고 어려운 이야기도 잘 이해한다.
조금 잘난 척하고 싶어서 가르쳐 준 수학도 이렇게나 빨리 배울 줄은 몰랐다.
나도 훈이처럼 멋있게 뚝딱뚝딱 다 해내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서 속상하고.
부럽다.
하지만.
문을 열었다.
“힘내! 잘해야 해!”
“그래.”
훈이가 얼마나 멋있는지 아니까, 얼마나 노력하는지 아니까.
친구니까 응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