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91화
23. 이유(2)
충분하진 않지만 남은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열심히 돌아다녔다.
차시현도 나도 동시대 미술 작품은 익숙하지 않은 탓에 깊이 느낀 작품은 적었지만 적어도 한 번 인사를 나눴다는 게 중요하다.
두 번째는 반갑게 인사할 수 있으니까.
내일은 ‘대화를 나눠요’라는 TV 프로그램에 출연해야 하니 사실상 오늘이 휘트니 비엔날레를 즐길 마지막 날이다.
아쉬움을 달래며 휘트니 미술관을 찾았다.
페르디난도 곤잘레스의 벽시계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이제는 제법 시간 차이가 나서 굳이 자세히 살피지 않아도 된다.
저렇게 계속 둔다면 언젠가는 한쪽이 먼저 멈추게 될 거다.
<완벽한 연인>이라는 부제를 보아 함께하지만 어느 한쪽의 시간이 먼저 멈추는 걸 표현하지 않았겠냐고.
그렇게 정리해 보았다.
고개를 끄덕이자 할아버지가 제목 없이 부제만 표기된 두 벽시계를 언급하셨다.
“할아버지가 보기엔 아주 슬픈데. 훈이가 보기엔 어떠냐.”
“비슷해요.”
말을 좀 더 풀어내서 나름대로 내린 결론을 전했다.
“시현이는 어때?”
할아버지가 차시현에게도 물었다.
녀석은 골똘히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두 사람이 같은 시간을 보내려면 서로 노력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아요.”
생각지 않았던 방향이다.
최근 아버지와의 관계가 대화의 부재에서 생겼음을 인지했기에 그런 측면에서 볼 수 있었던 듯하다.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구나. 건들지 않으니까 계속 사이가 벌어지기만 하지.”
“네.”
할아버지가 시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작품을 받아들이는 건 각자의 몫이라는 사실을 문장이 아니라 경험으로 가르쳐 주신다.
“그럼 하나 더. 이건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까?”
“네. 일단은.”
내가 경험하지 못한 전시품이라고 해서 배척한다면 모네의 <인상, 해돋이>를 비난했던 얼간이와 다를 바 없다.
판단은 그것이 무엇인지 이해한 뒤에 해도 늦지 않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차시현이 할아버지께 여쭸다.
“공장에서 만든 물건이잖아요?”
“그렇지.”
“만들지 않았는데도 작품이에요?”
나도 고민을 많이 했던 문제다.
여러 나라의 사전에서 예술이란 단어를 찾아봤는데.
영국에서는 ‘인간 창의성의 산물’이라고 하며.
우리나라의 표준국어대사전을 보면 예술은 ‘특별한 재료, 기교, 양식 따위로 감상의 대상이 되는 아름다움을 표현하려는 인간의 활동 및 그 작품’이라고 설명한다.
중요한 단어만 분리하면 ‘미학’을 표현하는 ‘활동’ 또는 ‘결과물’을 말한다.
논쟁이 되는 부분은 아마 ‘미학’이 아니라 ‘활동’ 또는 ‘산물’을 어디까지 적용할지에 대한 문제.
미학은 각자의 기준이 다르기에 판단의 근거가 될 수 없으나.
‘두 개의 벽시계를 나란히 두고 이름을 붙이는 행동’은 관점에 따라 ‘활동’이나 ‘산물’로 볼 여지가 있을 수 있다.
“답은 없단다.”
할아버지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시계는 시간을 나타내는 물건이지만 지금 저기 걸린 두 시계는 훈이랑 시현이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또 다른 의미가 생겼잖니?”
의미를 부여한다.
“백 년 전쯤에 마르셀 뒤샹이라는 사람이 있었어. 우리 주변에 있는 사물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자 했지.”
할아버지가 스마트폰을 펼쳐 마르셀 뒤샹의 <샘>이라는 작품을 보여주었다.
소변기다.
“이건.”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도 사람인 모양.
거부감이 든다.
“지금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으니까 이걸 굳이 예술품으로 생각지 않아도 괜찮아. 생각은 자유로운 거야.”
“…….”
그것도 옳은 말이라 <샘>을 보고 있으니 할아버지가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사실 본질은 뒤샹 이전의 예술가들도 해오던 일이란다. 피카소가 캔버스에 여러 시점을 넣으려 했던 일도 새로운 의미와 관점을 부여하는 일이었지.”
지금은 인상파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사물을 복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가지고 있는 본질을 끄집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그런 생각이 뒤샹에 이르러서는 이미 만들어진 물건을 선택하는 데 이른 거야.”
할아버지는 Industrial products(공산품)이 아니라 Ready-made란 단어를 사용하였다.
이미 만들어진 물품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라.
“똑같이 만들어진 물건 중에서 특별히 하나를 집어내는 거네요.”
“그렇지.”
똑같이 생긴 물건에서 하나를 고르는 행위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공장에서 같은 공정으로 만들어진 물품은 기능도 형태도 모두 똑같다.
시각적 정보만으로는 그 수많은 복제품 중에서 단 하나를 선택할 수 없다.
아니,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니 분명 다른 기준이 있을 텐데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다.
“쌍둥이 같은 거예요?”
차시현이 확인하듯 물었다.
“옳지.”
과연. 명쾌한 풀이다.
“일란성 쌍둥이가 똑같이 생겼다고 해서 그 둘이 같을 순 없으니까. 아주 좋은 비유구나.”
할아버지에게 칭찬받은 차시현이 두 손을 들고 좋아한다.
녀석의 말처럼 목소리도 키도 얼굴도 똑같은 쌍둥이가 같을 수 없다.
쌍둥이 중 형과 친구라고 해서, 동생과도 친구는 아닌 것처럼 말이다.
마르셀 뒤샹은 수많은 변기 중에 이 <샘>에게 다른 의미를 부여한 거다.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다.
“페르디난도 곤잘레스랑은 다르네요.”
“확실히 다르지.”
할아버지가 맞장구를 쳤다.
적어도 페르디난도 곤잘레스가 걸어둔 벽시계는 접점이란 것이 있다.
제목은 붙이지 않았지만 ‘완벽한 연인’이라는 부제목과 시계라는 물건이 간직한 모든 의미를 있는 그대로 전시했다.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있고 해석의 다양성은 열어두었다.
또 그 과정이 서로의 경험과 생각을 통해 자유롭게 오가니, 이 <샘>과 같이 공감하기 힘든 개인적 의미 부여와는 차이가 있다.
미술사의 일부로써는 가치 있을지 몰라도.
대화를 고려하지 않고 표현에 그친 <샘>을 좋은 작품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이 이름 없는 벽시계에 대해서는 좀 더 알고 싶다.
* * *
휘트니 비엔날레를 홍보하기 위한 방송 프로그램 ‘대화를 나눠요’ 제작진은 오늘 방송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해바라기>, <손님>, <서리 밀밭> 그리고 <가면>에 이르기까지.
발표하는 작품마다 큰 이슈를 일으킨 천재 소년 고훈이 출연하기 때문.
저명한 미술사학자 캐롤라인 스트릭을 통해 알려진 ‘고 주니어’는 휘트니 비엔날레를 통해 ‘고훈’이란 이름을 각인하기 시작했고.
‘대화를 나눠요’에서 자체 실시한 설문 조사 결과 가장 만나고 싶은 작가 2위에 오르고야 말았다.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앙리 마르소가 팬들과의 화목한 추억에 젖어 있는 탓에 촬영이 연기되었고.
고훈이 첫 번째 게스트가 되어 ‘대화를 나눠요’에 출연했다.
진행자 우진이 카메라를 응시했다.
“안녕하십니까, 뉴튜브, 프리미엄, JH시네마 시청자 여러분. 우진입니다.”
세 곳의 OTT 플랫폼을 통해 모여든 시청자 수는 17만 명에 도달해 있었다.
‘대화를 나눠요’ 제작진으로서도 퍽 만족스러운 시작이었다.
“예고 영상으로 공개되었죠? 행복을 전하는 화가, 고훈을 소개하겠습니다.”
진행자의 소개에 맞춰 카메라가 이동했다.
고훈이 주변을 둘러보며 걸어 나왔다.
생전 처음 보는 물건으로 가득한 촬영장은 그에게 좋은 자극제였다.
고훈은 조명, 마이크, 카메라, 연극 무대처럼 만들어진 세트장을 관찰했다.
“하하. 신기한가 봐요. 생방송은 처음이죠?”
“네. 저건 뭐예요?”
“조명이에요. 저게 있어야 제 피부가 그나마 봐줄 만하거든요.”
고훈이 신기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메라는 왜 이렇게 많아요?”
우진이 당황했다.
건방진 팝스타, 예민한 영화배우, 고지식한 학자 등 여러 사람을 상대했지만 고훈 같은 캐릭터는 처음이었다.
“우선 시청자분들께 인사 부탁드릴게요.”
“어디 보고 말해요?”
“저기 빨간불 들어오는 카메라 보면 돼요.”
“조명이 너무 밝아서 잘 안 보여요. 저기요?”
베테랑 진행자 우진이 제작진을 향해 버럭 소리 질렀다.
“우리 훈이 눈 아프다고 하잖아요! 빨리 조명 줄여요!”
진행자의 발언에 시청자들이 즐거워했다.
└아, 애기 너무 귀엽다 ㅠㅠㅠ
└진짜 애는 애닼ㅋㅋㅋ 촬영장 신기한가 봨ㅋㅋㅋㅋ
└그래. 아무리 신동이라도 9살밖에 안 되니까 어쩔 수 없지.
└원래 천재들이 자기 분야 말고는 잘 몰라.
└무슨 오프닝이 이랰ㅋㅋㅋ 이거 시사 교양 방송 아니었어?
조명이 적당히 조절되자 고훈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조명 감독에게 고개 숙이며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당황한 조명 감독이 모자를 벗어 보이며 고훈의 인사를 받았다.
“아니, 그. 시청자분께 먼저.”
우진이 다급히 카메라를 가리켰다.
촬영장은 이미 잔웃음이 흐르고 있었다. 고훈은 좋은 분위기 속에서 당황하는 우진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안녕하세요. 고훈입니다. 11살이에요.”
“11살. 한국에서 나이를 세는 방식이죠?”
“네.”
고훈이 우진을 빤히 보다가 물었다.
“한국 사람이에요?”
“……네.”
“반가워요. 영어 잘하시네요.”
“독일어도 좀 하죠. 큼.”
“여긴 어떻게 왔어요? 원래 미국에서 일하세요?”
└아니 네가 왜 인터뷰를 햌ㅋㅋㅋㅋ 대답을 하라곸ㅋㅋㅋㅋ
└쟤 궁금한 거 왜 저리 많앜ㅋㅋ
└진행자 얼빠져서 카메라 보는 거 봨ㅋㅋㅋㅋ 진짜 돌겠닼ㅋㅋㅋ
시청자들이 즐거워하는 한편.
고훈을 데리고 촬영장에 온 고수열과 방태호는 얼굴을 짚고 한숨을 내쉬었다.
“잠깐. 고훈 군, 질문은 아저씨가 할게요.”
“저도 아저씨 궁금해요. 대화하자고 부르신 거 아니에요?”
“그렇긴 한데…….”
우진은 지금껏 그가 상대하기 가장 어려웠던 한 사람을 떠올렸다.
클래식 음악의 역사를 실시간으로 갱신 중인 베를린 필하모닉 악단주는 항상 심통이 나 있어 한 마디, 한 마디 붙이기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다.
때문에 성격이 까다로운 사람은 되도록 상대하고 싶지 않았는데 이 붙임성 좋은 소년은 진행조차 불가능했다.
이대로는 방송이 힘들다고 생각한 우진이 팔짱을 낀 채 테이블 위에 팔을 올렸다.
상체를 살짝 기울이고 고훈과 눈을 마주했다.
“지금 17만 명이 보고 있거든.”
“그렇게나 많이요?”
“응. 그러니까 멋진 모습 보여줘야 하지 않겠어? 그래야 다른 방송에도 섭외 오고 돈도 벌 거 아니야. 부자 되는 방법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우진의 말에 고훈이 납득했다.
두 사람의 만담에 작가 고훈을 알고 싶어 접속한 시청자들은 황당해했다.
└애한테 뭘 가르치는 거얔ㅋㅋㅋ
└진행자 쳐내.
└저 인간 웃기려고 저러는 거야 진심이야? ㅋㅋㅋㅋㅋ
“좋아. 그럼 아주 쉬운 것부터 가자.”
고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행자 우진은 대본을 덮어두고 고훈이 되도록 짧게 답할 수 있는 질문을 꺼냈다.
나이 이야기로 시작하기도 했고.
또 알려진 것에 비하여 기본적인 정보가 부족한 탓에 팬들의 요청이 많았던 질문을 꺼냈다.
“생일이 언제예요?”
이번에는 고훈이 당황했다.
지금껏 생일이 언제인지 생각해 보지 않은 탓에 뭐라 답해야 할지 몰랐다.
설마 생일을 모를 거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우진이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을 유도했다.
고훈은 솔직하게 답했다.
“몰라요. 기억이 안 나요.”
당황한 우진이 PD와 채팅창을 확인했다.
사고로 기억 잃은 애한테 무슨 짓이냐, 당장 사과하라는 채팅이 빗발쳤다.
“아니. 미안해. 정말 미안해.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고훈에게 거듭 사과한 우진이 채팅창 반응을 살폈다.
사퇴하라는 말에 진행자를 자르라는 말 심지어는 죽으라는 말도 올라오고 있었다.
밥그릇에 집착이 심한 우진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희가 물어보라며! 궁금하다며! 봐! 이 대본 보라고! 고훈한테 가장 궁금한 거! 생일! 좋아하는 음식! 취미! 그림 어떻게 시작했는지! 훈아, 정말 아저씨가 너무너무 잘못했어. 미안해. 정말 미안해.”
우진이 억울함을 호소하며 어쩔 줄 몰라 하자 채팅창이 웃음으로 도배되었다.
“괜찮아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다들 장난일 거예요. 누가 생일 물어봤다고 죽으라고 하겠어요. 그렇죠?”
고훈이 우진의 손을 잡고 툭툭 위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