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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반 고흐-89화 (44/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89화

22. 후회(3)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때마침 존 카터가 시작을 알렸다.

기자들은 대포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큰 카메라를 들고 주변을 촬영했다.

김지우랑 이인호도 보인다.

“휘트니 비엔날레를 멋지게 장식해 주신 두 분 모셨습니다. 자세한 설명이 필요할까요? 앙리 마르소와 고훈 작가입니다.”

팬들이 손을 흔들며 기뻐한다.

내 이름을 부르는 사람도 있지만 아무래도 미술관 안이라 크게 소리치는 행위는 지양하는 듯하다.

“앙리 마르소 작가님, 팬들께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앙리 마르소가 불쾌함을 내비치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운 좋은 줄 알아.”

미셸이 고개를 저으며 이마를 짚었고 존 카터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대체 저게 팬에게 할 말인가 싶다.

“네!”

하지만 내 생각과 달리 마르소 쪽에 줄 선 사람들은 기뻐했다.

“시간 없으니까 뭐 그려달라고 할지 생각해 놔. 1초 안에 말 안 하면 넘길 거야.”

비서가 건넨 사인펜을 낚아채며 앙리 마르소가 엄포를 늘어놓았다.

“꺄아아!”

“정말? 정말이야?”

내게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라고 했으면서 본인은 한술 더 뜬다.

1분에 하나씩 그려주고자 미리 무엇을 그려줄지 생각해 두고, 미리 몇 장 그려둔 나도 여유 부릴 수 없는데, 100명의 입맛대로 그림을 그려주는 게 가능할 리 없다.

기자들은 신나서 사진을 찍어대고.

미셸 플라티니는 앙리 마르소의 돌발행동에 익숙한지 멀찍이 소파에 앉아 스마트폰을 보고 있다.

진행을 맡은 존 카터가 당황하여 말을 잇지 못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앙리 마르소 작가께서 큰 선물을 준비하셨네요. 그럼, 고훈 작가께도 인사 부탁드립니다.”

존 카터를 보다가 고개를 돌려 팬들을 보니 한눈에 봐도 부러워하고 있다.

“저는 마르소처럼 대단한 기술은 없어서 요청은 못 받을 것 같아요. 대신 미리 준비해 둔 그림이랑 초콜릿 같이 드릴 건데. 괜찮을까요?”

“좋아요!”

마음 넓은 팬들이 내 사정을 이해해 주며 기뻐했다.

“흥.”

익숙한 콧방귀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앙리 마르소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러는 와중에 존 카터가 사인회 참가자들에게 동의 없이 몸을 만지면 안 된다는 등의 주의사항을 주지했다.

보안 직원의 안내를 받아 첫 번째 사람이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가면 너무 멋있었어요.”

“감사합니다.”

눈을 보며 대화하고 싶긴 해도 그럴 시간이 없다. 레몬 옐로와 골든 옐로 오일 파스텔을 꺼내 연습한 대로 그리며 물었다.

“성함이 어떻게 돼요?”

“조슈아 밀러요. Joshua Miller.”

스펠링도 차근차근 알려준다.

레몬 옐로로 잎을 그리고 골든 옐로로 가운데를 채웠다.

그다음 손으로 골든 옐로를 펼쳐내 음영을 더한 뒤 그 아래 ‘조슈아 밀러에게’라고 적었다.

“이, 이거 진짜 작가님이 그린 거예요?”

“네. 오늘 아침에 미리 그려둔 건데, 틀림없이 제 그림이에요. 이 서명으로 보증할게요.”

“아아아아!”

조슈아 밀러가 해바라기를 꼭 끌어안았다. 벅찬 표정을 보니 역시 준비하길 잘했지 싶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미국에서 전시회 열면 꼭 갈게요.”

웃으며 배웅하곤 옆을 보니 앙리 마르소가 미친 듯이 사인펜을 놀리고 있다.

파리에서 본 자화상이나 이번 <그림자>를 봐도 그의 기술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살아 움직일 것만 같은 정확하고 세밀한 묘사력은 지금의 나로서는 따라 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손도 빠르다.

나와 비슷하게 한 사람을 보냈다.

“안녕하세요.”

“뭐.”

내가 두 번째 사람을 맞이할 때 마르소도 다음 사람을 만난 모양이다.

“저는 어, 어.”

“빨리 말해!”

“저, 저요. 제 얼굴 그려주세요.”

“빌어먹을. 움직이지 마.”

“네!”

“대답도 하지 마.”

옆쪽 줄에서 벌어지는 황당한 광경에, 두 번째 팬과 눈을 마주하곤 웃었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앤서니 화이트요.”

“멋진 이름이네요.”

연습했던 방식으로 똑같이 그리면서 이번에는 질문도 건네봤다.

“구경 많이 했어요?”

“네. 어제부터 보는데 진짜 멋있어요.”

“전 아직 구경 못 했는데. 어디부터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3층이요. 테라스 쪽이요.”

“제 그림 걸린 곳이잖아요.”

“맞아요.”

해바라기를 완성하고 고개를 들자 앤서니 화이트가 밝게 미소 짓고 있었다.

어이가 없기도 하고 그만큼 내 그림이 최고라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짜. 진짜 소중히 간직할게요. 약속.”

앤서니 화이트와 새끼손가락을 거는 순간 앙리 마르소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가 네 강아지를 어떻게 알아!”

“요기요.”

팬이 스마트폰을 펼쳐 사진을 보여주자 성난 앙리 마르소가 뚫어지게 관찰하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귀엽네.”

“그쵸! 두 살이에요!”

“시끄러워. 말 걸지 마.”

어떻게든 잘해나가고 있는 것 같다.

* * *

사인회가 한 시간 정도 흘렀을 무렵 고훈이 피로를 느껴 잠시 손을 풀었다.

단순한 형태라고는 해도 같은 행동을 서둘러 반복하는 일이 쉬울 리 없었다.

고훈은 목을 돌리고 손목을 털며 피로한 몸을 달랬다.

반면 앙리 마르소는 점점 죽어갔다.

번뜩이는 직관력으로 사물을 날카롭게 관찰하고, 신기에 가까운 손놀림으로 50점이 넘는 크로키를 완성했지만 한계를 느낀 지 오래였다.

온종일 그림만 붙잡았던 날은 종종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을 구상하는 데 할애했고 이렇게 기계처럼 쉬지 않고 펜을 움직인 적은 드물었다.

앙리 마르소는 한 시간을 넘어 점점 흐려지는 정신을 간신히 부여잡고 다음 사람을 받았다.

“뭐.”

“저요. 제 얼굴 그려주세요.”

앙리 마르소가 까득 이를 갈았다.

어떻게 된 인간들이 어느 순간부터 다들 자기 얼굴을 그려달라고 했다.

팬을 지극히 사랑하는 터라 소품조차 안 되는 선화를 그려주는 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애정과 관심이 결핍된 그에게 팬과의 만남보다 달콤한 일도 없었다.

다만 너무 힘들 뿐이었다.

“세모.”

“네?”

“세모 받고 싶지?”

“……세모요?”

“네모 그려줘?”

“어. 저는. 어…….”

한계에 직면한 앙리 마르소가 짜증스럽게 굴자 그의 팬이 울먹거렸다.

입술이 앞으로 나오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마음이 약해진 앙리 마르소가 신경질을 부렸다.

“울지 마!”

앙리 마르소가 손을 놀려 얼굴을 그리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내 스케치가 얼만 줄 알아?”

“몰라요.”

“팔기만 해봐. 끝까지 추적해서 다 고소할 거야. 너희도 마찬가지야!”

“네!”

앙리 마르소의 협박에 팬들이 힘차게 답했다.

‘즐거워 보이네.’

팬들의 열렬한 응원 속에 피폐해지는 앙리 마르소를 본 고훈이 다음 사람을 받았다.

그렇게 약속된 시간이 흐르고.

예정된 행사를 마무리해야 할 때, 앙리 마르소는 아직도 남아 있는 앞에는 38명을 보며 입술을 씰룩였다.

고개를 돌리니 고훈은 이제 한 사람만을 남기며 여유롭게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빌어먹을.’

최대한 서두른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대충 그릴 수도 없었다.

1~2분 사이의 짧은 크로키라 하더라도 자신이 남긴 그림이 엉망인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러나 펜을 쥔 손이 뻐근해진 지 오래였다.

처음에 비하면 한 점을 완성하는 속도도 눈에 띄게 느려졌다.

‘나중에 그려준다고 할까.’

순간적으로 타협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상황을 합리화하던 그의 시야에 팬들이 들어왔다.

시간이 다 되어감에 조마조마해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저…… 마르소 작가님, 시간이.”

존 카터가 마이크를 잡았다.

“닥쳐. 저것들 안 보여?”

앙리 마르소가 사인펜으로 팬들을 가리켰다. 잽싸게 다시 고개를 숙여 펜을 움직였다.

혹시나 그에게서 그림을 받지 못할까 애태우던 팬들이 앙리 마르소의 이름을 외쳤다.

“앙리! 앙리!”

“시끄러워! 정신 사납게 굴지 마!”

앙리 마르소의 외침에 팬들이 웃으며 연호를 그만두었다.

“감사합니다. 재밌게 구경하세요.”

반면 모든 사람에게 해바라기 그림과 초콜릿을 선물한 고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인회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킨 팬들에게 인사하고 옆 테이블로 갔다.

앙리 마르소가 신경질을 냈다.

“꺼져.”

“용케 하고 있네요.”

고훈은 실로 감탄했다.

90분이나 쉬지 않고 그림을 그린 탓에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쳤을 텐데 아직 형태가 명확했다.

기준선은커녕 수정 한 번 없이 그렸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용케?”

“아.”

체력과 정신이 한계에 이른 앙리 마르소가 고훈의 말에 흥분하고 말았다.

그 탓에 선이 엇나가고 말았다.

사인펜이라 수정할 수도 없었다.

여태 잘 버텨오던 앙리 마르소가 굳어버리고 말았다.

‘저런.’

고훈이 앙리 마르소의 어깨를 툭툭 다독였다.

비록 시답지 않은 경쟁심리 때문에 시작한 일이라고는 해도, 팬을 위해 끝까지 노력하는 그가 밉지 않았다.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기에 고훈은 진심으로 그를 응원했다.

“조금만 더 힘내요. 다들 응원하고 있어요.”

앙리 마르소는 당장에라도 고훈의 멱살을 잡아 올리고 싶었다.

누구 때문에 이 짓을 하게 되었는지 따지고 싶었지만 기다리는 사람이 너무나 많았다.

휘트니 미술관 직원뿐이었다면 당장 때려치웠을 테지만 팬들에게는 그럴 수 없었다.

유일한 방법은 오늘은 우선 쉬고 내일 다시 불러모아 그려주는 것.

자존심은 상하지만 팬과의 약속을 어떻게든 지키는 방법이니 그 정도는 감내할 생각이었다.

그때.

고훈이 앙리 마르소의 팬들에게 말했다.

“90분이나 이러는 게 쉽지 않아요. 손도 떨고 있잖아요.”

고훈은 앙리 마르소가 초인적인 힘을 보일 수 있었던 이유를 알고 있었다.

“여러분 덕분이에요. 응원해 주세요. 여러분이 응원해 주시면 마르소도 힘이 날 거예요.”

고훈의 말을 듣던 앙리의 팬들이 앙리를 연호하기 시작했다.

“조금만 힘내요!”

“멋있다!”

“앙리! 앙리!”

내일 다시 보자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던 앙리 마르소는 차마 약속을 미루자고 할 수 없었다.

주먹을 높이 올리며 응원하는 저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이 빌어먹을 꼬맹이가 또.’

그는 어느새 팬들과 어울려 앙리 마르소를 응원하자며 선동하는 고훈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알았으니까 닥쳐!”

“전 앙리 보려고 LA에서 왔어요!”

“난 한국에서 왔어!”

앙리 마르소가 안경을 그리다가 빗나간 선을 이어 무도회 가면으로 바꿔 그렸다.

“어, 그럼 얼굴이…….”

초상화를 의뢰한 팬이 자기 얼굴이 가려지자 당황했다.

“만들어서 쓰고 다녀! 다음!”

* * *

[앙리 마르소, 고훈 깜짝 이벤트!]

[211분간 100점을 그린 앙리 마르소! 기네스북 등재될까?]

[세계 최고 수준의 화가에게 그림 선물을 받은 200명!]

[팬을 위해 준비한 선물]

[211분간의 대장정을 마치고 쓰러진 앙리 마르소, 인터뷰에 응하지 못해]

오늘 오후 2시.

휘트니 비엔날레를 개최한 휘트니 미술관에서 화가 앙리 마르소와 고훈이 사인회를 열었다.

현재 가장 많은 화제를 낳고 있는 두 화가는 이번에도 가만있지 못했다.

고훈이 팬을 위해서 고급 초콜릿 세트와 귀여운 해바라기 그림을 준비하자 이에 자극받은 앙리 마르소 또한 현장에서 그림 의뢰를 받았다.

90분으로 예정된 사인회에 당첨된 사람은 각각 100명이었다.

고훈을 비롯하여 많은 관계자가 불가능한 일이라고 판단했지만 앙리 마르소는 불굴의 의지를 보여 행사가 끝난 뒤에도 남은 팬을 위해 그림을 그려주었다.

팬들은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한 앙리 마르소에게 열렬히 환호했다.

그와 함께 그림 이벤트를 한 고훈은 사인회를 마친 뒤에도 팬들과 함께 앙리 마르소를 응원하는 등 훈훈한 광경을 연출했다.

└아닠ㅋㅋㅋㅋ 진짜 도랐나 봨ㅋㅋ 왜 저렇게까지 해야 해?ㅋㅋㅋ

└고훈이 하는 건 나도 한다 이런 건갘ㅋㅋㅋㅋ

└이거 진짜 영상으로 봐야 해ㅋㅋ

└앙리 엎드린 사진 보면 등쪽에 훈이 오일 파스텔 묻어 있는 게 킬포ㅋㅋㅋ

└등 다독여주다가 묻은 거야?ㅋㅋ

└아 근데 진짜 덕질 할 맛 나겠다.

└ㅇㅇ 앙리가 다른 사람들한텐 싸가지 없는데 팬한테는 잘해.

└고훈 엎드려 있는 앙리 쿡쿡 찔러 보는 거 진짜 돌겠닼ㅋㅋㅋㅋㅋ

└부럽다. 나도 훈이 해바라기 갖고 싶다.

└저거 받은 사람이 팔면 대박 아님? 쟤들 그림 수십억씩 하지 않나?

└저기 간 사람 중에 파는 사람이 있을까?

└탈덕할 수도 있지.

└그렇게 비싸진 않은걸? 고훈 해바라기가 100장뿐이라고 해도 판화처럼 넘버링이 표시된 것도 아니고 빨리 그리려고 상징만 해놓은 거라 막상 팔려고 하면 엄청나게 비싸진 않을 듯.

└앙리 그림은 전부 다르잖아.

└진짜 미친 것 같아. 어떻게 1~2분 만에 저렇게 잘 그려?

└괜히 천재는 아닌가 봄.

└나중에 페이스 엄청 떨어지긴 했음ㅋㅋㅋ

└앙리 그림은 값 좀 나갈 수도 있겠다 싶은데, 협박했잖아. 가져다 팔면 찾아내겠다고.

└법적으로 그게 가능해?

└법으로 안 되면 불법적인 방법으로 누구 하나 충분히 묻어버릴 놈임.

└ㅇ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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