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88화
22. 후회(2)
“사인회요?”
<가면>도 공개했고 시차도 적응했으니 오늘은 좀 여유롭게 구경하려고 했거늘.
존 카터가 이상한 일을 제안했다.
관람객에게 서명을 해달라고 한다.
“네. 갑작스럽게 말씀드려 죄송합니다.”
설명을 들어보니 관람객들이 휘트니 미술관에 요청을 넣었단다.
원래 합의했던 내용은 관람객을 모아두고 공개 인터뷰를 하는 것이었는데, 좀 더 친밀한 만남을 바라는 팬을 위해서 행사 내용을 바꾸는 게 어떻냐는 말이었다.
“정확히 무슨 일이에요?”
“팬들과 인사하고 서명을 해주는 일입니다. 아무래도 직접 인사할 기회는 적으니까 작가님께도 좋은 경험이 될 겁니다. 팬들에게는 두말할 필요도 없고요.”1)
존 카터의 말대로 그들과 직접 인사할 기회가 많지 않으니 좋은 경험이 되겠다.
궁금한 건 굳이 왜 서명을 하느냐다.
“그런데 서명은 왜요?”
“만났다는 기념 같은 거죠.”
“이름만 적는 데도 좋아해요?”
그림도 아니고 그런 게 쓸모가 있을까 싶다.
“그럼요. 아, 간단한 문구 정도는 받아 적어주시는 게 팬 서비스로 좋죠.”
방태호가 다른 사람들의 서명을 보여주었다.
‘누구에게 행복하세요’ 같은 상투적인 문장을 잔뜩 휘갈겨 썼다.
내 그림을 봐준 이들에게 겨우 이 정도만 해주는 게 마음에 걸리지만 좋아한다고 하니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고개를 돌리자 할아버지도 고개를 끄덕이신다.
“해볼게요.”
존 카터가 반색했다.
“일정은 원래 예정되었던 모레로 괜찮을까요?”
“네. 괜찮죠, 아저씨?”
“응. 카터 씨, 그러면 시간도 기존과 같습니까?”
원래 공개 인터뷰를 하기로 했던 시간은 한 시간이었다.
“그렇습니다. 다만 아무래도 한 시간에 소화할 수 있는 수가 적으니 조금 더 늘려주셨으면 합니다.”
방태호가 흠 하고 고개를 돌렸다.
“훈아, 90분 정도 괜찮겠어?”
“네.”
종일 하는 일도 아니고 내 그림을 좋아해 주는 이들을 위해 90분 정도야 흔쾌히 내줄 수 있다.
“90분으로 하죠.”
“감사합니다. 화요일 오후 2시부터 3시 30분까지. 참, 앙리 마르소 씨도 수락하셨습니다. 두 분이 함께하시는 거죠.”
또 엮인다.
“다른 사람은 안 하고 저랑 마르소만 해요?”
“그렇진 않습니다. 두 분을 시작으로 매일 두 명씩 모실 예정입니다. 이번에 작품이 연관되기도 하고 여러모로 이야기가 될 듯하니 함께하시는 게 좋을 듯해서.”
존 카터가 미소 지었다.
“같이하기 부담스러우면 바꿔도 괜찮아.”
방태호가 나섰다.
“아니에요. 작품 이야기도 할 겸 나쁘지 않아요.”
사람이 변한 것 같으니 굳이 피할 이유는 없다. <그림자>에 관해서 물어보고 싶은 것도 있고 말이다.
“페르디난도 곤잘레스도 해요?”
“당연히 부탁드렸지만 건강 문제로 거절하셨습니다.”
“곤잘레스가? 많이 아파요?”
할아버지가 걱정스럽게 물으셨다.
호의를 나눴던 사이라 마음이 쓰이시는 것 같다.
어제도 마스크를 쓰고 있었으니 감기라도 걸린 모양이다.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흠. 그 친구가 이런 일을 거절할 리 없는데.”
할아버지가 스마트폰을 꺼냈다. 페르디난도 곤잘레스에게 메시지를 보내시는 듯하다.
존 카터가 사인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인원은 조절할 예정입니다. 100명 정도를 추첨하면 부담이 덜할 겁니다.”
90분밖에 안 되는 시간에 100명을 만나면 한 사람당 고작 1분 정도밖에 대할 수 없을 거다.
제대로 인사나 나눌 수 있을까 싶다.
‘좋은 기억을 남기고 싶은데.’
짧은 시간에 무엇을 해야 좋을지 고민된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네.”
존 카터와 헤어지고 할아버지께 물었다. 메시지를 막 보내셨는지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으셨다.
“할아버지는 사인회 때 뭐 하셨어요?”
“인사하고 사인해 줬지?”
“정말 그걸로 좋아해요?”
“속으로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표정은 좋더구나.”
할아버지가 내 속마음을 읽으신 듯하다.
“왜. 이상해?”
“저 보러 와 주신 분들이잖아요. 고작 이름이나 적어서 보내는 게 마음에 걸려요.”
“흠.”
할아버지가 턱을 쓸었다.
“그럼 저번 개인전 때처럼 간식을 좀 챙기는 건 어떠냐.”
좋은 생각이다.
고개를 끄덕이자 방태호가 웃었다.
“100명 분량이면 서둘러야 하겠는데. 준비해 볼게.”
“고마워요.”
방태호 덕분에 비엔날레를 구경할 시간을 아꼈다.
“아.”
의아해하는 방태호에게 물었다.
“간단한 그림 그려주는 건 안 돼요? 입국심사 때처럼.”
“어…… 안 되는 건 아닌데 힘들지.”
“왜요?”
“팬 입장에선 그보다 멋진 선물도 없지만 100명이야. 100장을 어떻게 90분 만에 그려주겠어.”
“간단하게요.”
내가 내 모습을 투영하는 해바라기를 간단한 형태로 그리면 1분으로 충분하지 싶다.
그런 이야기를 전하니 방태호와 할아버지가 고민한다.
“뜻은 좋다만. 혹시나 나중에 지쳐서 못 그려주게 되면 남은 사람들이 서운해하지 않겠어?”
할아버지의 지적이 옳다.
“그럼 연습해 보고 정할게요.”
* * *
방태호가 기품 있게 포장된 초콜릿 세트를 준비해 주었다.
100명만 온다고 하지만 먹어 보라며 몇 개를 더 마련하여 한 상자를 주었다.
하얀 바탕에 금색 글자로 느와르 린트라고 적혀 있다.
사진 속 노인은 아마 이 초콜릿을 만든 사람 같다.
휘트니 미술관 2층 테라스 벤치에 앉아 차시현과 나눠 먹었다.
초콜릿은 6가지 모양으로 3개씩, 모두 18개가 들어 있다.
“합.”
“맛있어!”
차시현이 눈을 빛냈다.
느와르 린트라는 이 초콜릿은 분명 악마가 가공해내지 않았을까?
상자도 고급스럽고 하나하나 포장한 게 사치스럽다고 생각했는데, 맛을 보니 그렇지도 않다.
이렇게 훌륭한 예술품을 아무렇게나 담을 순 없지.
카카오 특유의 쌉싸름함이 느껴지는 와중에 부드럽게 녹아내리며 혀를 희롱하는 아주 요망한 초콜릿이다.
하나 더 안 먹고 버틸 수 있겠냐고 묻는 듯한 유혹에 홀라당 넘어가 하나를 더 집어 먹었다.
과연 18개에 30달러씩이나 할 만하다.
이 정도면 나를 보러 와 준 사람들에게 전하기에도 부족함이 없다.
“움움움.”
차시현이 하나를 더 먹으며 행복해한다. 그렇게 하나씩 나눠 먹다 보니 금방 한 상자를 비우고 말았다.
“…….”
“…….”
차시현과 시선을 마주한 순간 녀석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내 속도 훤히 드러났는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대기실에 둔 초콜릿을 찾으러 일어났다.
서둘러 대기실에 도착하고 막 한 상자를 집어 포장을 뜯으려는데.
“잠깐.”
겨우 이성을 찾았다.
대기실에 있는 상자를 세보니 딱 100상자다.
이걸 먹었다간 받지 못하고 돌아가는 사람이 생길 거다.
고개를 저었다.
“이건 안 돼. 사인회 오시는 분들께 드려야 해.”
“……이렇게 맛있는데?”
이렇게나 멋진 초콜릿을 앞에 두고 참을 수 있냐는 질문에 감히 그럴 수 있다고 답하지 못했다.
어찌 참을 수 있을까.
아마 다른 이유였다면 망설이지도 않았을 거다.
“하나만 먹자? 아저씨, 이거 하나만 구해주실 수 있으세요?”
“대표님께서 간식은 하루에 한 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호자의 말에 차시현이 잔뜩 우울해졌다.
나도 속상한 마음에 녀석과 나란히 앉아 초콜릿 상자를 바라보았다.
“맛있었지?”
“엄청 부드러웠어.”
“막 달진 않는데 진했어. 아, 말하니까 맛있다.”
입에 남은 초콜릿을 맛본 듯 차시현이 혀를 움직였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방태호가 대기실로 들어왔다. 챙겨 온 오일 파스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가져오긴 했는데 정말 괜찮겠어? 선생님도 말씀하셨지만 시간 오래 못 써. 한 사람에 1분 정도밖에 안 돼.”
“괜찮아요.”
짧은 편지를 준비하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지만 어떤 사람이 오는지도 모르고 그들에 대해 아는 것도 없어서 마음을 접었다.
역시 해바라기를 그려서 주는 게 최고다.
내게도 팬에게도 서명보다는 훨씬 의미 있는 일이리라.
“아저씨 초콜릿 남은 거 없어요?”
“차에 좀 있지?”
시계를 확인하니 자동차가 주차된 곳까지 다녀올 시간이 없다.
빨리 하나 먹고 싶지만 참아야지.
얼간이들이 마약에 중독되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괜찮았어?”
“네. 그렇게 맛있는 초콜릿은 처음이었어요.”
“흫흐. 그래. 사인회 하는 동안 가져다 놓을게. 슬슬 나가자.”
반가운 마음에 고개를 번쩍 드니 방태호가 웃었다. 절망에 빠진 차시현도 눈을 빛내며 반가워한다.
“할아버지는 아직 안 오셨어요?”
“그러게.”
페르디난도 곤잘레스를 만나고 오신다던 할아버지는 아직인가 보다.
더는 지체할 수 없어 일어났다.
설마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마약에 빠진 인간이 얼마나 멍청하고 비양심적인지 알기에 차시현에게 충고했다.
“나 다녀올 동안 다 먹으면 안 돼. 남겨놔야 해.”
“응. 같이 먹어.”
차시현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착한 녀석이니 이 정도로 믿어 보기로 하던 차.
시현이의 보호자 정진호가 나섰다.
“간식은 하루에 한 번입니다.”
그 말이 마치 단두대처럼 녀석의 행복과 희망, 삶의 의지를 거세하고 말았다.
방태호를 따라 대기실에서 나온 뒤에 이따 몰래 초콜릿을 나눠주겠단 메시지를 보냈다.
행사장에 이르자 이미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이 나를 발견하곤 호의 가득히 시선을 보내거나 손을 흔든다.
당혹스러우면서도 기쁘다.
간격을 두고 놓인 책상 중 내 이름이 적힌 곳에 앉았다.
방태호가 옆에 초콜릿과 오일 파스텔을 두고 어깨를 다독였다.
“그럼 잘해. 그림 부담스러우면 안 해도 괜찮아. 사인회니까.”
“네.”
그려주다가 힘들어서 포기하면 그림을 받지 못한 사람이 슬퍼할 테니 다 그려 줄 생각이다.
오일 파스텔 케이스를 열고 느와르 린트 초콜릿 생각을 하고 있으니 앙리 마르소도 도착했다.
미셸 플라티니와 비서도 함께다.
앙리 마르소 쪽에 줄 선 사람들이 소리만 내지 않을 뿐 폴짝폴짝 뛰며 기뻐한다.
“안녕하세요.”
“흥.”
반가워서 인사하자 앙리 마르소가 콧방귀를 뀌며 자리에 앉았다.
“잘 지냈어? 가면 멋있던데?”
미셸 플라티니가 살갑게 인사했다.
“고마워요.”
악수하고 손을 놓는데 눈을 휘둥그레 뜬다.
“오일 파스텔이네?”
“그림 그려주려고요.”
“그림?”
미셸이 깜짝 놀랐다.
고개를 돌리고 있던 앙리 마르소가 오일 파스텔을 보곤 비웃는다.
“몇 명 온다고 못 들었어? 90분에 100장을 어떻게 그려준다는 거야?”
“할 수 있어요.”
어제 두 가지 색만 써서 해바라기 형상을 단순화했다.
사인지랑 오일 파스텔을 오늘 아침에야 구해서 얼마 못 그렸지만 미리 그려둔 것도 있다.
부지런히 하면 충분히 가능할 거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집어치워. 사인회가 장난이야? 나중에 지쳐서 못 그려주면 남은 사람은 뭐가 돼?”
조금은 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개떡 같은 말투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마르소가 못 한다고 나도 못 할 거라 생각하지 말아요.”
“……뭐?”
더는 상대하고 싶지 않아서 고개를 돌리니 앙리 마르소가 으르렁거렸다.
“너 방금 뭐라 그랬어.”
“뭐가요.”
“네가 할 수 있는 걸. 이 내가 못 한다고?”
“그러니까 시비 거는 거잖아요?”
앙리 마르소의 눈썹이 기괴하게 비틀리고 관자놀이에 핏줄이 돋아났다.
“……아르센.”
“네, 작가님.”
“사인펜 더 가져와.”
* * *
1)반 고흐가 팬이라는 단어를 알고 있을까?
현대적 팬덤(Fandom)의 형태는 1893년, 코난 도일의 추리 소설 주인공 셜록 홈스가 죽자 그를 애도하는 공개 시위로 시작되었다.
메리엄 웹스터 사전은 정확히 팬덤이란 단어가 사용된 것은 1903년 부근으로 추적했다.
팬덤이 Fan과 접미사 dom의 합성어이니만큼 훨씬 이전부터 Fan이란 단어가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참고문헌: 위키백과 팬덤 항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