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86화 (41/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86화

21. 휘트니 비엔날레(10)

오후 1시.

발표식을 1시간 앞두고 휘트니 미술관에 도착했다.

존 카터가 미리 동선을 마련해 주어서 다행히 혼잡함을 피할 수 있었다.

다른 준비는 모두 마쳤고 내가 할 일은 기다리는 일뿐이다.

방태호는 여러 사람에게 인사를 하러 다녔고 할아버지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셨다.

할 일이 없기도 해서 <그림자>를 보러 갔다.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많았지만 전시실 안이라 밖에서처럼 다짜고짜 달려들진 않았다.

어째 <그림자>를 보러 온 사람이 어제보다 더 많아진 것 같다.

“안 보여.”

차시현이 입을 내밀고 볼을 부풀렸다. 어떻게든 보고 싶은지 폴짝폴짝 뛰어도 소용없었다.

나도 그 경이로움을 다시 한번 느끼고 싶은데, 이곳을 떠나기 전에 제대로 볼 수 있을까 싶다.

“다른 거 보러 가자.”

“응.”

차시현과 함께 전시실을 돌다가 문득 페르디난도 곤잘레스의 작품이 눈에 들어왔다.

감상하는 사람 때문에 자세히 보기 힘든 다른 작품들과 달리, 두 개의 벽시계는 이곳에 처음부터 있었던 물건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의미일까.’

어제는 경황이 없어 충분히 생각하지 못했는데 기성품을 배치하는 것만으로 미술이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적어도 나는 저 행위가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할 수 없고.

공장에서 생산된 물건을 자신의 작품으로 선보이는 그의 사고방식도 이해할 수 없다.

그런데.

분명 그러할진대 함께 움직이는 두 개의 벽시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꾸만 궁금하다.

‘음?’

지금 보니 완벽하게 함께 움직였던 어제와 달리, 오늘은 왼쪽 시계가 미세하게 늦다.

고작해야 1초도 안 되는 차이지만 차이는 확실하다.

그리고 어제는 없었던 부제가 달려 있다.

‘완벽한 연인.’

제목 없이 부제만 달아둔 것은 또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지만, 이로써 저 두 시계가 연인을 상징한다는 건 확실해졌다.

시간을 함께 보내는 연인을 말하고 싶은 걸까.

의아하게도 이 작품을 설명하는 도슨트가 없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차, 차시현이 지루했는지 다른 작품 앞으로 향했다.

나도 더는 이 작품에서 무엇을 끄집어낼 수 없을 듯해서 막 발을 떼려는데.

한 남자가 곁으로 다가와 제목이 없는 두 개의 벽시계 앞에 섰다.

올려다보니 목이 아플 정도로 키가 크다.

“페르디난도 곤잘레스?”

뉴튜브 채널 알렉스 팩토리에서 소개했던 페르디난도 곤잘레스다.

주머니에 손을 깊숙이 찔러넣은 채 흰 마스크를 쓰고 있다.

그가 고개를 돌리더니 씩 하고 웃었다. 쭈그려 앉아서 나와 눈높이를 맞춰주었다.

크고 선이 굵은 코와 우수에 찬 깊은 눈, 큰 골격을 감싼 튼튼한 근육이 남성성을 과시한다.

“안녕?”

고개를 끄덕였다.

반가운 마음에 악수라도 하려고 했지만 그는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지 않았다.

마스크도 그렇고 위생에 신경을 많이 쓰는 사람 같다.

“반가워요. 고훈이에요.”

마스크를 써서 표정이 정확히 드러나진 않지만 눈은 분명 웃고 있다.

“나도 반가워. 아주 멋지던데?”

“뭐가요?”

휘트니 미술관에 걸린 내 그림을 본 건가 싶어서 물으니 진지한 목소리로 답했다.

“박치기. 마르소가 코피 흘리는 장면을 볼 수 있을 거라곤 생각 못 했거든. 아주 강렬한 이미지였어.”

말없이 그를 보다가 웃고 말았다.

엉뚱한 사람이다.

두 시계가 조금 차이가 보이는 게 신경 쓰여서 작품을 눈짓하니 그가 작게 감탄했다.

“신경 쓰여?”

내가 말하기 쉽게 물어봐 준다.

“초침이 조금 차이가 나는 것 같아요. 의도한 거예요?”

내 섣부른 판단으로 단정할 수 없어 물었다.

페르디난도 곤잘레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완벽하게 같은 시각을 가리키도록 한 것이 그의 의도라고 생각했는데, 두 시계에 차이가 발생하는 것조차 구상이라면 ‘완벽한 연인’이라는 부제는 대체 무엇을 의미할까.

함께하고 싶지만 어긋날 수밖에 없는 관계를 말하고 싶은 걸까.

그가 굳이 왜 이런 방법을 택했는지 역시 아직은 와닿지 않는다.

“훈아, 여기 좀 봐.”

차시현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페르디난도 곤잘레스가 몸을 일으켰다.

“친구가 찾는 거 아니야?”

“맞아요.”

페르디난도 곤잘레스가 차시현이 있는 방향을 힐끔 보고선 다시 시선을 맞추었다.

“발표식 기대할게.”

“고마워요.”

* * *

오후 1시 50분.

휘트니 미술관 3층에 미술계 유력 인사와 언론, 방문객이 운집했다.

고훈이 이번 비엔날레에 전시하기로 한 작품이 공개되기 때문이었다.

휘트니 미술관의 배려로 현장은 휘트니 미술관의 가상 전시관과 뉴튜브 채널을 통해 생중계되고 있었다.

페르디난도 곤잘레스와의 인터뷰를 놓친 김지우 기자는 치열한 자리 경쟁 끝에 겨우 앞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이번에도 괜찮을 거야.’

김지우는 주먹을 쥐었다.

고훈의 이번 작품은 큰 기대를 받는 만큼이나 우려되었다.

올해 초 첫 개인전을 연 고훈에게는 시간이 부족했고, 무리하게 참가한 것 아니냐는 의문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었다.

그것은 고훈을 맹목적으로 비난하는 이들뿐만 아니라, 그를 진심으로 위하는 이들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가장 앞줄에 앉아서 다리를 거만하게 꼬고 있는 앙리 마르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받침대 위에 천으로 가려진 고훈의 작품을 꿰뚫듯이 노려보았다.

‘실망시키지 마라.’

앙리 마르소는 자신이 인정한 어린 화가가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길 원치 않았다.

용납할 수 없었다.

2시 정각이 되자 마이클 핑이 마이크를 잡았다.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휘트니 비엔날레 큐레이터 마이클 핑입니다.”

관람객들이 박수로 환영했다.

└시작한다.

└빨리 좀 공개되면 좋겠다.

└시청자 수 무엇? 37만 찍네.

└죄다 영어니까 알아들을 수가 없네.

└어차피 그림만 보면 되니까 상관없잖아. 빨리 공개했으면 좋겠다.

└훈이 나온다.

마이클 핑이 고훈을 소개했다.

“올해 가장 열광적인 반응을 이끈 화가 고 주니어의 작품을 공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이클 핑이 고개를 돌려 고훈에게 신호를 주었다.

대기하고 있던 고훈은 고개를 돌려 고수열을 올려다보았다.

전 세계가 지켜보는 자리.

지금까지 사랑받았다고 해서 새 작품마저 그러리란 보장은 없었다.

긴장할 만도 한데.

고훈은 상기된 얼굴로 미소 지을 뿐이었다.

고수열은 손자의 새로운 도전을 응원하는 뜻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등을 떠밀어 주었다.

고훈이 씩씩하게 앞으로 나섰다.

카메라 플래시가 빗발쳤다.

“안녕하세요, 고훈입니다.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훈이 인사를 마치자마자 일부 기자가 다급히 질문했다.

“시간이 부족했다는 우려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작품 제작 기간은 얼마나 걸렸습니까?”

“앙리 마르소의 그림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마이클 핑과 휘트니 미술관 직원들이 그들을 제지하기도 전에 고훈이 입을 열었다.

“그림 공개하고 답변드릴게요. 너무 오래 참았거든요.”

오랜 기다림에 지친 관람객과 시청자들이 반갑게 반응했다.

고훈이 천을 잡고 숨을 한 번 고른 뒤 힘차게 걷어냈다.

다부진 표정의 한 아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의지에 찬 눈빛과 살짝 찡그린 눈썹에서 느껴지는 불안.

앙다문 입은 다소 긴장한 듯 보였다.

굽이굽이 이어질 듯 끊어지는 필치.

선명한 보색 활용.

빈센트 반 고흐의 그것이었다.

“…….”

회장이 차게 식었다.

분명 빈센트 반 고흐가 직접 그렸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훌륭한 그림이었으나.

오일 파스텔을 녹여 물감으로 사용한 독특한 질감을 제외하고는 좋은 작품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항상 반 고흐와 연관되었던 고훈이 직접 빈센트 반 고흐의 화풍을 따라 그렸으니 기자들도 관람객도 미술계 종사자도 어찌 반응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반 고흐?”

“저래도 돼?”

회장이 술렁이기 시작했고.

마이클 핑과 존 카터 및 휘트니 미술관 관계자들의 얼굴에 암운이 드리웠다.

앙리 마르소의 얼굴이 뒤틀렸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흘러나올 때마다 그의 입술이 씰룩였다.

‘무슨 짓이야.’

앙리 마르소 역시 고훈에게서 빈센트 반 고흐의 일면을 보았다.

그럼에도 그의 그림을 사랑했던 이유는 쉽게 볼 수 없었던 동양의 여백을 남기는 구도와 임파스토 기법과는 달리 붓을 좀 더 크고 자유롭게 쓰는 방식.

그리고 눈부신 색 표현과 보색 활용이었다.

그렇게 완성된 고훈의 그림은 매우 강렬하여 작품을 이해하려는 노력 없이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19세기를 살았던 거장들의 작품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는 그저 모작에 불과했다.

앙리 마르소가 분을 못 이겨 의자를 박차고 일어난 순간.

그의 눈이 흔들리며.

회장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 * *

실패를 겪으며 찾아낸 방법이지만 정말 이래도 되는지 모르겠다.

저들에게 내 목소리가 전달될까.

더 이상 빈센트가 아니라 고훈으로 다가가는 것이 가능할까.

그 마음을 표현하기에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무엇일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물감을 벗겨내서 그 아래 새로운 그림이 나타나도록 시도했지만 무리였고.

그렇다고 단지 회화적인 방식으로 표현해내고 싶진 않았다.

과거와 연결된 이미지에서 벗어나려면 좀 더 극적인 효과가 필요했다.

그래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선택했다.

주머니에 넣어둔 칼을 꺼냈다.

“어?”

객석에서 누군가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것은.

의지의 표명이다.

망설이면 안 된다.

칼을 반대로 쥐고 높이 들어 <가면>을 베었다.

“저, 저!”

칼을 버리고 벌어진 틈을 양쪽에서 붙잡아 벌렸다.

평소 쓰던 캔버스라면 쉽게 찢어질 리 없지만, 이 두꺼운 도화지는 힘을 주면 어렵지 않게 찢을 수 있었다.

예전 방식으로 그렸던 자화상이 넝마처럼 벗겨져 벌어진 공간을 통해.

자화상 아래 숨겨두었던 두 번째 그림, 해바라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잔뜩 긴장하고 힘을 쓴 탓에 거칠어진 호흡을 고르며 뒤돌자.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린 사람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가장 앞에 서 있는 앙리 마르소는 지금껏 보여주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다.

놀랐는지 자리에서 일어난 엉거주춤한 자세로 있다가 <가면>을 노려보았다.

존 카터도 마이클 핑도.

객석 왼쪽에 앉아 있던 페르디난도 곤잘레스도 다른 모든 사람이 <가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Awesome!”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갤러리들이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온몸을 때리는 열렬한 답장에 거친 호흡조차 억누를 수 없는 희열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