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80화
21. 휘트니 비엔날레(4)
7일째.
또 실패했다.
단순히 덧그려서는 아무리 서둘러 그려도 시간 차이가 생긴다.
밑그림은 녹이지 않고 그리기에 상관없지만.
덧칠한 그림은 벗겨냈을 때의 질감을 살리기 위해 녹여서 그려야만 했다.
그림을 단 한 번의 붓칠로 그려낼 수는 없는 법이니 부위 별로 마르는 시간이 제각각일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물감을 벗기는 기법에 문제가 발생한다.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고민이다.
“훈아, 밥 먹으러 가자.”
할아버지가 부르셨다.
“나가서 먹어요?”
“계속 집에서만 있었잖아. 외출해서 기분 전환도 해줘야 해.”
좋은 구도와 적절한 색감은 엉덩이에서 나오지만 할아버지 말씀도 일리가 있다.
가끔은 주의를 환기할 필요가 있다.
오랜만에 할아버지와 함께 밖으로 나섰다.
겨우 일주일 사이에 밖은 제법 화사해졌다. 이곳저곳에 꽃이 피어 눈이 즐겁다.
내가 모르는 꽃과 곤충이 많아서 특히나 좋다.
아무래도 프랑스와 이곳의 환경이 다른 만큼, 자생하는 식물과 곤충도 다른 모양이다.
나중에 찬찬히 관찰해 봐야겠다.
할아버지를 따라 도착한 식당에 들어섰다. 차림표가 처음 보는 음식으로 가득하다.
“규카츠?”
소고기 채끝살을 사용한 튀김이라고 한다.
얼마나 맛있을지 몰라도 1인분에 15,000원이나 하는 상당히 고가의 음식이다.
“할아버지도 처음인데 미래 이모가 맛있다고 데려가 보래.”
장미래는 신기하고 재밌는 걸 많이 알려주니 믿고 먹어볼 만하다.
“주문할게요.”
할아버지가 점원을 불렀다.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만면에 웃음을 보이며 다가왔다.
“네.”
나와 할아버지를 번갈아 본다.
“이 규카츠 두 개 주시고. 훈아, 과일 사이다 마셔볼래?”
그냥 사이다도 맛있는데 과일 맛 사이다라니 이건 안 먹을 수 없다.
“네.”
“멜론, 복숭아, 사과 맛있습니다.”
“사과로 주세요.”
“사과 사이다로 둘 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혹시 필요하신 거나 불편하신 점 있다면 꼭 말씀해 주시길 바랍니다.”
남자가 주방으로 향했다.
“되게 친절하네요.”
“그러게나 말이다.”
음식을 기다리며 할아버지께 고민을 털어놓았다.
“내일부터는 학교 좀 쉬어도 돼요?”
“그래. 이제 2주밖에 안 남았으니 슬슬 집중해야지. 대신 작품 준비 끝나면 할아버지랑 열심히 공부하자.”
“네.”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진 않지만 충분한 시간 없이는 어떤 일도 이뤄지지 않는다.
제아무리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이라도 말이다.
“음료 먼저 나왔습니다.”
이번에는 젊은 여자가 음료를 가져다주었다. 기포가 보글보글한 것이 이건 분명 맛있겠다.
빨대로 쭉 들이켜자 청량감이 답답한 마음을 순식간에 씻어내리는 듯하다.
상큼한 사과 냄새가 코와 비강 목 뒤쪽으로 퍼진다. 입안에 감도는 단맛도 일품이다.
기분을 전환하기에 완벽한 음료다.
“맛있어요.”
“달아.”
할아버지 입맛에는 맞지 않는 모양. 살짝 찌푸리시더니 웃으신다.
“화로 놓아드리겠습니다.”
음료를 가져다준 점원이 이번에는 작은 돌 화로를 가져왔다. 긴 무엇으로 순식간에 불을 지폈다.
“이게 뭐예요?”
“음식이 나오면 취향에 따라 여기에 좀 더 익혀 드시면 돼요. 그냥 드셔도 되고.”
삼겹살 같은 건가 보다.
곧이어 음식이 나왔다.
선홍빛을 띤 소고기가 튀김옷을 두르고 있다. 이대로 먹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빨갛다.
화로에 더 익히는 쪽이 좋겠다.
할아버지와 함께 규카츠 몇 점을 화로에 올렸다.
“식지 않고 따뜻하게 먹을 수 있겠구나.”
“그러게요.”
나와 할아버지는 밥을 천천히 먹는 편인데 이런 것은 참 좋다.
작은 화로가 계속 가열되니 그 위에 올려둔 고기가 익기도 할뿐더러 음식이 식을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된다.
좋은 냄새가 난다.
하나 들어 입에 넣자 지방이 가득 품고 있던 육즙이 흘러내리고 말았다.
뜨겁지만 절대 뱉을 수 없다.
이 부드러운 육질은 대체 어떻게 해야 나오는 걸까.
소를 두들겨 패기라도 한 것일까.
서둘러 한 점 더 먹었다.
“어때? 맛있어?”
“맛있어요.”
고기를 한 번 더 올리고 언제 먹으면 좋을까 관찰하던 차.
의문이 생겼다.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할 수만 있다면 그 위에 오일 파스텔로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거다.
액체 상태를 유지하되 시간 차이에 따라 굳는 정도가 달라지는 걸 막을 수 있을 터.
정확한 시간만 알 수 있다면 벗겨내는 게 훨씬 수월할 터다.
“할아버지, 이런 거 좀 큰 거 구할 수 있어요?”
“더 먹고 싶어? 고기 추가가 될 텐데.”
“고기 말고 화로요. 열 조절 되는 걸로요.”
“구하면 구할 수 있겠다만. 뭐 하는 데 쓰려고?”
“오일 파스텔이 굳기 전에 벗겨야 하는데, 부분별로 굳는 속도가 다 달라서 힘들었거든요. 계속 녹이면서 그린 뒤에 한 번에 굳히면 좋을 것 같아요.”
할아버지가 눈을 깜빡였다.
“굳지 않을 정도만 되면 괜찮으니 위험하진 않아요.”
“그렇게 해서 어떻게 하게?”
“겹칠 거예요. 칼로 벗겨내고.”
“음?”
할아버지가 고개를 갸웃하신다.
저번에 방법을 찾으신 눈치였는데 아무래도 나와 다른 결론을 내신 듯하다.
“그래. 한번 알아보마.”
* * *
고수열은 손자의 기상천외한 부탁에 난감했다.
그림을 겹치고 싶다고 하니 표면이 고른 판을 찾아야 했고 그 결과 철판요리용 철판을 구해왔다.
“이것밖에 없는데 괜찮겠어?”
“충분해요.”
고수열이 지켜보는 가운데.
고훈이 캔버스 크기에 맞춘 틀을 올렸다.
온도가 높으면 녹인 오일 파스텔이 끓어오를 테고, 열이 한쪽에 집중되면 철판을 구한 의미도 없었다.
다행히 솜씨 좋은 기술자를 구하여 철판 아래에 온선을 촘촘히 깔고 온도조절을 할 수 있었다.
적당한 온도에 이르자 고훈이 미리 녹여둔 오일 파스텔을 덜어내 색을 만들었다.
고훈이 철판에 물감을 칠하기 시작했다.
굳지 않는 물감을 다룬 적은 처음이라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머릿속으로 수백 번 생각했던 자화상의 이미지를 철판 위에 투영했다.
그러나 수천 번 유화를 그렸던 그조차 이번 일은 쉽지 않았다.
머릿속 이미지를 반전시켜 그려야 했기 때문.
더군다나 바탕을 잡고 긁어내거나 덧칠하여 세부 묘사를 하는 기존 방식의 역순으로 그림을 그려야 했다.
그러나 곧 고훈이 생각지 못한 문제가 발생하고 말았다.
녹은 오일 파스텔은 조금만 흔들려도 형태가 망가졌다.
많은 것을 상정하고 또 10년 이상 물감을 다뤄온 본인을 믿었으나 결코 쉽지 않았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한 고훈이 전원을 내렸다.
첫 시도에 성공하리라곤 생각하지 않았어도 상상 이상으로 섬세한 작업이었다.
고수열이 다가갔다.
“쉽지 않구나.”
“네.”
고훈의 요청을 들어주기만 했던 고수열이 처음으로 손자의 생각을 물었다.
“이렇게 그릴 생각은 어떻게 했어?”
“규카츠 화로 보니까 팬케이크 만드는 사람이 생각났어요.”
“팬케이크?”
“네. 반죽으로 그림을 그리더라고요.”
고훈이 뉴튜브에서 팬케이크 반죽으로 그림을 그리는 영상을 찾아 보여주었다.
색이 다른 반죽을 분리하고 쌓아 올리듯 팬에 발라서 뒤집으니 귀여운 캐릭터가 나왔다.
고수열이 감탄했다.
“허. 신기하구나. 그래도 섬세한 묘사는 힘들 것 같은데.”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본래 묘사에 크게 연연하지 않긴 했지만 캔버스에 그리는 것과 같을 수 없었다.
지난 며칠간 여러 결과를 상정해 두고 연습해 왔기에 밀어붙였던 그로서도 잠시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고수열이 손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모든 작품은 실패 뒤에 완성된단다.”
지금껏 성공을 거듭했던 손자가 벽을 맞이해 실망했다고 생각한 고수열이 위로했다.
“목표에 이르기까지 도전하느냐, 아니면 현실과 타협하느냐. 할아버지는 그 선택지에 잘못은 없다고 생각해.”
고훈은 대꾸하지 않고 할아버지의 말을 그저 들을 뿐이었다.
“타협이란 말이 실패를 뜻하는 건 아니야. 새로운 목표를 잡아나가는 일이지.”
고수열은 어린 손자가 이런 시도를 했다는 것에 의의를 두었다.
설사 그것이 이루기 힘든 목표라고 해도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또 다른 곳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 번 더 해볼래요.”
고훈이 전원을 켜고 철판 위의 오일 파스텔을 긁어냈다. 녹은 오일 파스텔을 깨끗이 걷어내곤 다시금 붓을 들었다.
2호 둥근 붓으로 한 번의 붓칠도 신중히 했다.
‘완벽하게 같을 필요는 없어.’
고훈은 끊임없이 생각했다.
알려진 이미지, 부여된 이미지, 과거와 연결된 자신을 벗어내기 위함이기에.
벗겨질 얼굴이 드러날 얼굴과 같을 필요는 없었다.
도리어 차이가 있어야 의도가 명확히 전달될 듯싶었다.
‘자잘한 건 포기하자.’
고훈은 팬케이크 장인이 섬세한 작업이 가능하면서도 단순화된 캐릭터를 그린 걸 상기했다.
과감한 생략.
놀라운 색채감은 고훈의 최대 강점이었다.
이번에는 작업이 상당히 오래 진행되었다.
고수열은 혹시나 모를 사고를 위해 손자 곁을 지켜주었다.
30분 정도 흐르고 고훈이 마침내 가장 많은 면적을 차지하는 얼굴 피부를 덮기 시작했다.
명암은 단순할 수밖에 없었다.
세 단계로 구분하여 어둠과 밝음의 구획을 나눈 고훈은 녹인 오일 파스텔을 섞어 피부색을 만들었다.
그러던 차.
고훈이 전원을 껐다.
어차피 한 번 더 가열한다고 가정하면 굳힌 뒤에 피부색 물감을 바르는 게 안정적이라고 판단했다.
오일 파스텔이 굳길 기다리면서도 고훈은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다시 굳힐 거라면 바탕부터 칠해도 될 거야. 표면 위에 덧칠하는 게 쉬우니까. 단계별로 나눠서 그리고 식히고 반복하다가 나중에 다시 녹이면 형태가 유지될까?’
레이어를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컴퓨터 그래픽 작업이 활성화되기 전, 16세기 르네상스 시대에도 있었던 적층 기법이었다.
얼마나 흘렀을까.
오일 파스텔이 굳었음을 확인한 고훈이 피부색을 채워나갔다.
그것이 다시 굳기를 기다리니 이미 밤이 깊었다. 철판과 완전히 분리되려면 충분히 굳어야 하기에 고훈은 9일째 밤을 마무리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난 고훈은 세수하자마자 작업실로 향했다.
철판 위에서 밤새 굳은 오일 파스텔을 떼어내기 위해 조심스레 얇은 판을 가져갔다.
약간의 쓸림은 상정했던 일.
조금씩 힘을 주자 생각 외로 오일 파스텔이 쉽게 떨어졌다.
조심스레 판에 옮긴 뒤 그림을 뒤집은 고훈이 입술을 깨물었다. 세부 묘사를 포기한 덕에 형태는 어느 정도 유지되었지만 그뿐.
이곳저곳이 섞이거나 이탈해 있었다.
소년은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고 철판 위를 정리했다.
‘처음부터 찢어진 것처럼 그리면 돼.’
고훈은 여러 방법을 떠올렸다.
굳이 찢어진 부분을 물리적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회화적 기법만으로도 느낌은 줄 수 있었다.
그러나 벗겨진 느낌이 실제와 같을 순 없었다.
입체감을 준다고 해도 실제로 입체적인 작품과는 같을 수 없었다.
고훈은 어떻게든 찢어내고 벗겨진 것을 표현해내고 싶었다.
그렇게 다시금 고민에 빠졌다가.
“아.”
번뜩인 생각이 뇌리를 스침과 동시에 행동을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