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79화 (34/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79화

20. 휘트니 비엔날레(3)

“우와.”

차시현이 호들갑을 떨었다.

“254명 중에 10등이래.”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니까.”

“근데 왜 웃어?”

“중요하지 않아도 날 좋게 보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니까.”

“솔직하게 좋다고 하면 되잖아.”

그것도 그렇다.

“좋아.”

“뭐얔.”

차시현이 웃었다.

-한국에서 개인전을 했던 고는 개막일에는 참가하지 못하고 5월 1일에 합류한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새 작품을 가지고 나올 듯한데, 작업이 어디까지 완성되었는지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아시겠지만 그는 최근 몇 달간 정말 바쁜 시간을 보냈으니까요.

휘트니 비엔날레에 참가한 뒤에는 캘리포니아라는 곳으로 가야 한다.

그곳에서 크리스틴 노먼과 만나기로 했다. 내가 그녀의 상상을 충분히 표현해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한 번쯤 도전해 보고 싶다.

그런 뒤에는 독일에도 들러야 하니 바쁘긴 하다.

알렉스 팩토리란 채널의 영상은 이후로도 여러 작가를 언급했다.

유명한 사람을 추린 영상에도 이렇게나 모르는 사람이 많다.

알렉스 팩토리가 선정한 두 번째 작가가 되어서야 익숙한 이름을 볼 수 있었다.

TOP 2

Henry Marceau

(France, Age 32)

-다음은 앙리 마르소입니다. 두말할 필요 있나요? 작년과 재작년 2년 연속 가장 많은 수입을 올린 천부적인 작가죠.

“나 이 아저씨는 알아. 저번에 네 그림도 샀지?”

“응.”

“친해?”

“아니.”

“왜? 밖에 있는 조각상 이 아저씨 아니야?”

“……사정이 있어.”

치울 데가 없어서 정원에 두긴 했는데 비에 맞으면 또 부식이 일어날 테고.

어쩔 수 없이 스펀지빵 우산을 씌우고 우비까지 걸쳐주었다.

방태호의 간곡한 부탁으로 나도 할아버지도 이제는 그냥 포기했다.

-자신을 탐미하는 그의 집착은 정말 놀랍죠. 이번에는 또 어떤 작품으로 우리를 놀라게 할지 기대해 봅니다.

“근데 이 아저씨가 돈 제일 많이 벌었다면서 왜 2등이야?”

“글쎄.”

기준이 뭔지 모호하다.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해서 가장 유명하고 뛰어난 작가는 아니지만, 인지도를 기준으로 잡은 듯한 영상에서 앙리 마르소를 넘어서는 작가가 있을까 싶다.

할아버지와 장미래도 참가하지 않는데 말이다.

TOP 1

Ferdinando González

(USA, Age 39)

“페르디난도 곤잘레스?”1)

처음 보는 이름이다.

이름만 보면 스페인 사람처럼 보이는데, 미국인인가 보다.

-대망의 1위는 페르디난도 곤잘레스입니다. 우리 주변의 사물과 이미지를 그보다 잘 활용하는 작가가 있을까요? 명실상부 이 시대 최고의 거장 중 한 명입니다.

주변 사물과 이미지를 활용한다는 말이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

차시현도 마찬가지인 모양.

검색해 보니 개념미술가라고 소개된다.

“개념미술이 뭐야?”

“모르겠어.”

유럽에서 여러 미술관을 다니긴 했지만 과거 작품을 즐기는 것조차 다하지 못하여 현대 미술에 대한 지식은 거의 없다.

내가 아는 최근 작가라고 해봤자 파블로 피카소인데, 그조차 1881년에 태어나 1973년에 죽었다.

그의 여러 그림이 근대 미술로 분류되니.

동시대 미술로 불리는 이 시대의 미술은 내겐 아직 미지의 영역이다.

“……아니지.”

그런 구분은 중요하지 않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 행하는 미술이야말로 현대 미술이고 그런 의미로 동시대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을 터다.

미지의 영역이 아니라.

할아버지, 장미래, 앙리 마르소의 작품 모두 동시대 미술의 일부다.

내 그림도 말이다.

“응?”

차시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고개를 저었다.

“나도 처음 보는 사람이야.”

비록 이 알렉스 팩토리란 채널을 운영하는 개인의 선택이라고는 하나, 앙리 마르소를 제치고 1위로 소개될 정도면 어떤 작품을 만드는 사람일지 궁금하다.

“얘들아, 밥 언제 먹을까?”

그때 할아버지가 작업실로 들어오셨다.

나와 차시현 그리고 그 주변을 보시더니 눈을 크게 떴다.

여기저기 널려 있는 과자들을 들키고 말았다.

“세상에. 이게 다 뭐야? 과자를 이렇게 많이 먹으면 어떡해? 응? 과자 가게 차려도 되겠다. 이래서 밥 먹겠어?”

“이거 드셔 보세요. 맛있어요.”

차시현이 할아버지께 고래칩을 권했다. 웃으면서 두 손으로 공손히 대하니 할아버지가 화를 내지 못하신다.

“그래. 이따 잘 먹으마. 시현이도 밥부터 먹고 먹자? 과자가 건강에 얼마나 안 좋은데.”

할아버지의 말씀에 과자 만드는 회사 아들이 충격받았다.

할아버지께 귓속말했다.

“쟤네 아버지가 과자 회사 사장이래요.”

할아버지가 아차 싶은 듯 손뼉을 쳤다.

“시현아, 내 말은 너무 많이 먹으면 안 좋다는 거야. 응? 이렇게 맛있는 거 만드는 아버지가 얼마나 좋은 일 하시는데. 시현이도 그리 생각하지?”

“네. 히. 아버지도 많이 먹으면 안 된다고 하셨어요. 그만 먹을게요.”

“그래. 그래.”

차시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할아버지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조금 재밌다.

“아, 할아버지. 이 사람 알아요?”

조금 전에 본 영상을 돌려서 페르디난도 곤잘레스의 얼굴을 보여드리자 반가워하신다.

“그럼. 모를 리가 있나.”

“어떤 작품 하는 사람이에요?”

“흠. 훈이 네가 지금까지 봤던 작품과는 많이 다를 거다. 오, 이 친구도 휘트니 비엔날레에 참가하는 모양이구나.”

“그렇대요.”

“그럼 할아버지가 설명해 주는 것보다 직접 보는 게 좋겠어. 괜히 먼저 설명 듣는 것보단 낫지.”

할아버지 말씀에 공감한다.

궁금하긴 하지만 작품을 있는 그대로 접해야 그 즐거움을 온전히 느낄 수 있으니까.

앙리 마르소와 페르디난도 곤잘레스라.

휘트니 비엔날레가 더욱 기대된다.

* * *

휘트니 비엔날레에 출품할 작품은 자화상으로 결정했다.

어느새 굳어버린 이미지를 탈피해서 지금의 나를 보여주고 싶다.

그런 의미로 물감을 벗겨내고 그 아래 또 다른 그림이 있는 형상을 표현하고 싶다.

스케치는 따 두었는데.

좀처럼 이것을 효과적으로 표현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오일 파스텔이라면 쉽게 해낼 수 있을 것으로 믿었지만 좀처럼 쉽지 않다.

평소보다 좀 더 두껍게 펴 바르고 칼로 조심스레 긁어냈음에도 맥없이 주저앉는다.

더군다나 할아버지 말씀처럼 캔버스에 바르니 도화지처럼 착 달라붙지 않아 정착액도 뿌려야 했다.

이대로면 구상을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

‘골치 아픈데.’

학교에 다녀와서 오일 파스텔을 다루기만 벌써 5일째.

잠들기까지 쉬지 않고 도전해도 큰 진전이 없다.

눈을 뜬 후 처음 맞이한 막막함이다.

작품은 진행되지 않고 뉴욕으로 가기로 한 날짜는 성큼 다가온다.

초조한 마음을 달래보려 해도 마음처럼 되진 않는다.

‘다시 한번.’

이번에는 좀 더 넓적한 칼을 찾았다. 오일 파스텔이 종이처럼 벗겨져야 하는데 이번에도 실패다.

이런 실력으로는 작품을 그린다 해도 도중에 망가질 게 뻔하다.

‘좀 더 눕혀서.’

칼날을 좀 더 눕히고 조심스레 힘을 주니 조금은 낫다.

하지만 만족스럽진 않다.

“훈아, 오늘은 일찍 자지 그러냐.”

할아버지가 들어오셨다.

기지개를 켜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조금만 더 하고 잘게요.”

안타까운 듯 머리를 쓰다듬으며 주변을 살피셨다.

“긁어내는 걸 연습하고 있구나.”

“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할아버지에게라면 무엇을 그리려 하는지, 어떻게 표현하려 하는지 말씀드릴 수 있다.

“자화상을 그리려는데 얼굴을 긁어내고 싶어요. 원점을 중심으로 바깥을 향해서.”

“흠.”

“사과 껍질처럼 벗겨지면 좋겠지만 생각보다 잘 안 되네요.”

할아버지께서 오일 파스텔을 바라보시더니 고개를 저었다.

“어렵겠어. 그렇게 하려면 아주 두껍게 발라야 할 거야. 게다가 완전히 마르기 전에 벗겨내야 할 테고. 또 적당히 마르기 전에 긁어내면 뭉뚱그려질 테지.”

“맞아요.”

구상을 다시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쉽지 않다.

사실 이제는 정말 가능한 일인지 의심스럽기도 한데.

할아버지는 왜 이런 표현을 하고 싶은지, 다른 걸 그려보는 건 어떻겠냐는 말씀은 조금도 꺼내지 않으셨다.

얼마나 흘렀을까.

할아버지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어렸다.

“할 수 있을 거다. 너무 오래 고민하진 말고.”

어깨를 감싸며 격려해 주신다.

아마 할아버지는 답을 찾으신 듯하다. 굳이 내게 답을 알려주지 않는 이유는 나를 한 사람의 작가로 인정하기 때문이리라.

나 또한 할아버지가 말씀하시려 했다면 고개를 저었을 것이다.

이것은 내 일이다.

아직 빈센트 반 고흐로 남아 있는 나를 벗어내고.

지금도 고훈이란 이름보다는 고수열의 손자로 소개되는 상황을 탈피하여 전 세계에 나를 온전히 보이고 싶다.

번데기 껍질을 찢고 날개를 펼치는 나비처럼 보이기 위해 밑그림을 유지하되 겉을 벗겨내고 싶다.

되도록 벗겨진 표면이 형태를 유지하면서 말이다.

‘좋은 방법이 없을까.’

고민이 깊어진다.

밤이 깊어지고.

풀벌레 울음소리마저 잦아질 즈음 무거운 눈꺼풀을 비볐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 생각으로 팔레트에 굳은 오일 파스텔을 긁었다.

힘이 없어 몇 번 반복하자 겹쳐 둔 색이 위에서부터 드러난다.

스크라피토(Sgraffito)란 기법이다.

표면을 긁어 그 아래 물감을 부분적으로 드러내는 방법인데, 이번 작품의 원리이기도 하다.

다만 벗겨진 부분을 작품에서 떨어뜨리지 않고 그 역시 그림의 일부로 형태를 유지하길 바라는 욕심 때문에 손을 못 대고 있다.

‘오.’

이건 제법 내가 바라는 모습으로 벗겨진다.

역시 오일 파스텔이 얼마나 적당히 마르느냐가 중요하다.

하지만 그림 전체를 긁어내려면 시간이 들 수밖에 없고, 그러다 보면 지연되는 부분도 생길 수밖에 없다.

시간 차이로 인한 변형을 신경 써야 하니 긁어내는 숫자를 줄이되 면적은 넓혀야 한다.

사과 껍질처럼 벗겨진 물감이 형태를 유지하기에도 유리하고 말이다.

“아.”

고민을 거듭하던 날이 숫자로는 6일째 되던 날 새벽.

문득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시도해 보지 않는 것보단 훨씬 나을 거다.

* * *

1)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Félix González-Torres).

1957년생 쿠바계 미국인.

개념미술가로서 대중과의 접점을 만들어가기 위해 노력했다.

<다시 태어난 반 고흐>의 페르디난도 곤잘레스의 모티프가 된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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