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77화
20. 휘트니 비엔날레(1)
방태호가 계약서를 내놓고 설명을 시작했다.
“우선은 전시회에 집중하겠지만 그것만 하려는 건 아니야.”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했다.
“전시회를 자주 연다고 좋은 게 아니거든.”
할아버지도 전시 이력을 쌓는다고 마냥 좋은 게 아니라고 말씀하신 적 있다.
작품을 충분히 만들어내고 그중에서 엄선한 것으로 전시를 하는 편이 효과적이라고 하셨다.
“그렇다고 몇 년씩 놀 순 없으니까 사이마다 괜찮은 작품을 출품하는 쪽으로 갈 거야. 이번 휘트니 비엔날레라든지.”
“네.”
“중요한 건 훈이 네가 꾸준히 노출되는 거야. 인터뷰는 당연하고 TV나 대형 뉴튜브 채널에 출연하는 것도 생각해 두고 있어.”
“나가서 뭐 해요?”
“이야기하는 거지. 너의 작품관이 어떻고, 무엇을 추구하는지. 널 드러내는 거야.”
“그림이 아니라요?”
애초에 작품을 구상하는 행위 자체가 내가 무엇을 그리고 싶은지, 말하고 싶은 건 무엇인지 잘 드러내기 위한 행동인데.
그것을 말로 하라니 거부감이 든다.
“응. 지금 미술가들은 사실 엔터테이너라고 생각해야 해. 고전적인 방식으로 활동하는 사람도 있지만 결국 미디어에 얼마나, 어떻게 노출되는지가 정말 중요하거든.”
방태호가 말을 마치자 할아버지가 머리를 쓰다듬었다.
“병행해야 하는 일이란다. 작품으로 인정받고 싶다면 차츰 줄여나갈 수 있도록 좋은 작품을 그리면 된단다.”
하지만 고집만 부릴 수 없는 법.
할아버지와 방태호의 말을 들어 보면 언론은 떼어놓을 수 없는 요소 같다.
하긴.
시장에서 사과 하나를 팔 때도 소리 높여 알리는데, 전 세계를 상대로 함에 홍보가 없을 순 없겠다.
할아버지 말씀처럼 그것마저 싫다면 그림만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사실 노먼 감독 일은 생각지 못했어. 만약 네가 그런 방향으로도 활동하게 된다면 할 수 있는 일이 정말 많을 거야.”
“되도록 다양한 일을 해보고 싶어요.”
“오케이.”
방태호가 계약서 맨 뒤에 특약사항이라는 곳에 무엇인가 적었다.
“참. 각본은 어땠어?”
“재밌어요. 해보고 싶어요.”
“그럼 미리 이야기 전해둘게. 휘트니 비엔날레 참가하고 바로 만날 수 있게. 미국 갔을 때 같이 처리하면 편하니까.”
“네.”
방태호가 이번에는 태블릿에 뭐라고 적었다.
아마 잊지 않도록 일정을 기록한 것 같다.
“그럼 계약 내용으로 돌아와서. 다른 곳에 참가하는 형식이면 그쪽에 맡겨야 하겠지만 적어도 네 개인전은 내가 맡으려고 해.”
“잘 부탁해요.”
‘달콤한 행복’을 준비하면서 그의 실력을 충분히 확인했기에 믿고 맡길 수 있다.
“계약 기간은 3년.”
“3년이요?”
생각보다 너무 짧다.
“혹시 네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고. 내게도 적어도 3년은 달라는 뜻이야.”
한국 나이로 아직 11살인 내가 도중에 생각이 변할 수 있다는 걸 상정해 두면서.
자신에게 3년 정도의 시간은 달라는 말이다.
아무 생각 없이 쭉 함께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확실히 방태호의 제안이 합리적이다.
“나쁘지 않구나.”
할아버지께서도 동의하셨다.
이번 계약은 철저하게 나와 방태호의 계약으로 여기시고 옆에서 조언만 해주신다.
“좋아요.”
동의한다는 뜻을 내비치니 방태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입 정산은 내가 직접 전시회를 감독하는 경우에는 30%. 외부 활동으로 발생한 수익은 5%를 받고 싶어. 우리가 직접 하는 전시회는 장소, 프로모션, 기획까지 전부해야 해서 이해해 줬으면 해.”
기획부터 전시실을 빌리고 홍보 및 스폰서를 얻어내는 일, 해설까지 모두 맡기게 되니 30%라면 만족스러운 비율이다.
“전시회를 언제 할지도 모르는데 그때까지 회사는 어떻게 유지할 생각인가? 자네도 수입이 있어야지.”
할아버지도 나서서 물었다.
방태호가 빙그레 웃었다.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할아버지가 눈썹을 들어 올리며 의아해하자 방태호가 자신만만하게 반가운 이야기를 꺼냈다.
“실은 전부터 친분이 있던 분께 훈이 매니저 맡게 되었다고 하니 관심을 가지더군요.”
“누군데요?”
“로베르트 마이어라고. 쉬민케 마케팅팀 팀장이야.”
쉬민케라면 <해바라기>를 그릴 때 썼던 물감이다.
부드럽게 발리고 발색도 마음에 들었는데 그런 물감을 만드는 곳에서 연락을 주었단 말에 깜짝 놀랐다.
할아버지도 반가워하신다.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쉬민케 물감으로 작품을 그려 달라고 합니다. 또 관련 내용을 홍보 용도로 사용할 수 있게 말이죠.”
“흠. 훈이도 좋아하니 그 정도는 문제 없을 것 같다만.”
“네.”
할아버지가 확인하시듯 고개를 돌리시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마음에 걸리는 건 뒤셀도르프에 있는 본사에 한 번 방문해 주길 바란다고 합니다.”
“역시. 따로 홍보 모델로도 활동하길 바라는 거겠지.”
“그렇습니다.”
사진이라도 찍는 건가 싶다.
“쉬민케 쪽에서는 훈이가 앞으로 1년간 쉬민케 물감으로 유화를 그리고, 쉬민케 물감의 우수함을 알리는 광고 영상을 찍어주길 바랍니다. 물론 유화에 한해서요.”
“훈이 생각은 어때?”
“1년이면 크게 문제없을 것 같아요. 유화만 그리라는 조건도 아니고.”
방태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면 얼마나 준대요?”
조건이 나쁘지 않으니 남은 문제 중 가장 중요한 건 돈이다.
“40만 유로까지 맞춰 보겠대.”
40만 유로라고 하면 아직 잘 감이 안 와서 스마트폰으로 검색해 보니 한화로 5억 원이 조금 넘는다.
특별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너무나 큰 보상을 받는 기분이다.
할아버지가 생각에 잠기신 듯 신음하다가 입을 열었다.
“제시한 조건이면 외부 활동이니 5퍼센트일 테고.”
“그렇습니다.”
“2,500만 원으로 되겠나?”
“하하. 첫 수입이니까요. 더 벌고 싶으면 일을 가지고 와야죠. 사실 아직 훈이랑 정식 계약을 안 해서 적극적으로 움직이진 못하고 있습니다. 쉬민케와의 이야기도 어디까지나 논의 단계고요.”
“그럴 테지.”
할아버지가 고개를 돌렸다.
“어떠니, 훈아. 이해할 수 있어?”
“네. 계약 비율도 좋고 무엇보다 태호 아저씨 말고 다른 사람은 생각도 안 했어요.”
방태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또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제가 잘되어야 아저씨도 잘될 테니 서로 열심히 하겠죠.”
“응. 믿어줘.”
그가 믿음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추가하고 싶은 조건이 있어요.”
방태호가 눈을 깜빡였다.
할아버지도 의아해하신다.
“선플라워라고 했죠? 회사 이름.”
“응.”
“선플라워에 투자하고 싶어요.”
“엉?”
믿음직했던 방태호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어벙해졌다.
“왜?”
“저한테는 안전장치라고 생각해요. 제 돈이 들어가 있으면 선플라워 운영에 발언력도 생기니까요.”
방태호를 믿지 못하는 게 아니라.
사업 초기 그가 자금 운용에 어려움을 겪어서 충분히 활동할 수 없게 됨을 견제하는 거다.
더군다나 내 자본이 선플라워에 투입되면 법인 주주로서 이익 배분을 받을 테니 방태호에게 주는 돈에서 일정 부분을 돌려받을 수도 있다.
‘똑똑하단 말이야.’
오늘 방태호와 계약서를 쓴다고 하니 차시현이 이것저것 알려주었다.
‘어디.’
계약서를 보니 자본금이 2억 원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2억 원 넣을게요. 수입 분배도 받을 거고요. 대신 비율을 조금 더 올리도록 해요. 전시회는 30퍼센트 유지하고, 외부 활동의 경우에는 10퍼센트로.”
방태호가 턱을 쓸었다.
* * *
방태호 선플라워 대표는 다소 당황했다.
고훈의 그림을 높이 평가하고 함께하고 싶었지만 이런 식의 사고가 가능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고훈이 2억 원을 투자하면 사실상 선플라워는 고훈의 의지로 움직이게 되었다.
유일한 계약 작가이자 수입원이고 더불어 방태호와 같은 지분을 가지게 되니 말이다.
법인 수익을 배분하게 되니 고훈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방태호로서도 득이 없는 건 아니었다.
아내 이한나가 걱정하지 않도록 호언장담하긴 했지만, 사실 기대 수익을 가늠하기 힘든 사업 초기.
자금은 많을수록 좋았다.
쉬민케와의 일이 이대로 잘 풀려서 2,500만 원을 얻는다고 해도 그것이 1년 총수입이 될 수도 있었다.
혹시라도 그 상태로 전시회를 하게 된다면 선플라워는 대출을 받아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고훈이 2억 원의 자본금을 투자해 준다면 그럴 필요가 없이 상당히 여유롭게 회사를 꾸려나갈 수 있었다.
만약 고훈과의 계약 수익 배분율이 변동되지 않는다면 장기적으로는 손해가 될지 모르겠으나.
대출 이자를 고려하면 충분히 고려할 만한 가치가 있는 제안이었다.
더군다나 고훈 스스로 배분율을 조정하자고 해주니 방태호로서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알고 있는 거야.’
선플라워가 원활히 돌아가야 자신에게 돌아올 이득이 커진다는 걸 인지하는 것이었다.
‘이걸 혼자 생각했다고?’
눈치를 보니 고수열도 짐짓 놀란 기색이었다.
사실 고훈과의 계약을 신중히 준비했던 방태호로서는 고수열과 고훈이 거절할 수 없는 좋은 조건을 만들어 왔고.
이대로 체결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고훈도 설명 듣는 내내 고개를 끄덕일 뿐 별다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는데.
마지막에 와서 양쪽 모두에게 좋은 조건을 제시했다.
“좀 놀랐어. 그런 방법은 생각 못 했거든.”
“좋은 자문가가 있었거든요.”
“자문가?”
“친구요.”
방태호는 장미래나 앙리 마르소가 아닐까 생각하며 작게 웃었다.
“좋아. 그럼.”
방태호가 수익 배분 영역과 특약사항을 수정했다.
그것을 고수열과 고훈에게 보였고.
고수열이 고심 끝에 고개를 끄덕이자 고훈이 서명했다.
“잘 부탁합니다, 작가님.”
“잘 부탁드려요, 대표님.”
두 사람이 악수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본 고수열이 입을 열었다.
“이런 날에는 맛있는 걸 먹어야지. 훈이 뭐 먹고 싶어?”
“선생님, 오늘은 제가 모시겠습니다.”
“아니야. 내가 기분이 좋아서 사는 거니 편하게 생각하게.”
“그럴 수 있나요. 훈아, 뭐 먹을래? 소고기 먹을까?”
“이렇게 좋은 날에 소고기를 먹어요?”
고훈의 반응에 방태호가 당황했다.
부유한 가정에서는 기념할 만한 날에 무엇을 먹는지 알 수 없었다.
“짜장면 정도는 먹어야죠.”
“…….”
방태호가 눈을 깜빡거렸다.
이 아이가 정말 소고기보다 짜장면을 좋아하는 건지.
아니면 영세한 사무실 때문에 자신을 배려하고 있는지 구분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