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76화
19. 친구(5)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않은 탓도 있지만, 프랑스에서 살 적에도 소묘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다.
대상을 잘 표현하는 방법은 복사가 아니라 그것이 가진 특징을 끄집어내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탓이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없지만.
섬세한 묘사를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그 당시에도 사실적으로 그리는 사람은 많았지만, 이 시대에는 고등학생조차 기본 소양으로 여기고 있다.
그 이유는 아마도 다양한 표현을 위한 기반이기 때문일 터.
할아버지와 장미래, 앙리 마르소의 작품을 보면 사물을 정확히 그리는 것을 바탕에 깔고.
그 위에 의미를 더한다.
그것만이 정답은 아니라 할지라도 내 가슴을 움직이는 것만은 사실이다.
때문에 지난 몇 달간 꾸준히 연습해 왔고 아직은 썩 만족스럽진 못하다.
<기암성>의 콘셉트 아트를 그리려면 바지런히 준비해야겠다.
기분 전환도 할 겸 연습한 도화지를 옆으로 치워두고 새 종이를 놓았다.
무엇인가를 열심히 그리는 차시현을 찬찬히 느낀다.
오해로 억눌렸던 어린 마음이 환희에 차 있다. 입꼬리 하나 올라가지 않은 얼굴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입을 씰룩이며 고민하고 고치고 다시 그리는 과정이 사뭇 진지하다.
푸른색.
아주 맑은 하늘처럼 순수함이 어울리겠다.
명도와 채도가 낮아지면 자칫 우울해 보일 수 있으니 색 배합에 신중해야 한다.
‘색연필로 표현할 수 있을까.’
연습했던 도화지를 뒤집어 라이트 블루와 프러시안 블루를 칠해 보았다.
라이트 블루와 프러시안 블루를 겹쳐 보기도, 필압을 조절해 비율을 조정해도 마땅치 않다.
라임 그린을 들어 라이트 블루 위에 가볍게 칠하니 제법 나아졌지만 타협할 정도는 아니다.
“색 찾고 있어?”
미술 선생님이다.
“네. 물감처럼은 잘 안 되네요.”
색연필은 꽤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다. 색을 효율적으로 섞을 수 없다.
“그럼 오일 파스텔 한번 써볼래?”
“오일 파스텔?”1)
파스텔이라면 마네와 드가도 즐겨 쓴 도구로 유럽에서 크게 유행했었다.
하지만 앞에 오일이라는 단어가 붙으니 뭔가 개량된 물건인가 싶다.
“응. 훈이 그림 보면 잘 쓸 것 같아서. 잠깐만.”
처음 듣는 그림 도구에 설레며 기다리니 미술 선생님이 작은 종이 상자를 가져다주셨다.
36개 색상의 파스텔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크기는 작지만 얇은 종이가 감싸고 있을 뿐, 전부 안료다.
“아.”
쥐어보니 뭐가 다른지 알겠다.
안료를 가루로 내어 굳힌 파스텔과 달리 점성이 있다. 아마 오일을 섞어서 그런 듯.
“써 봐도 돼요?”
“그럼.”
선생님의 허락을 받고 도화지에 쭉 그어 봤다.
엄청나게 부드럽고 발색도 선명하다. 특히 색 밀도가 높아서 마치 유화 물감처럼 사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손가락으로 문질러 보니 파스텔처럼 번진다.
다만 덧칠하면 색이 섞이기보다는 덮어버리는데, 새로운 색을 만들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선생님이 드라이기를 가져와 오일 파스텔에 열을 가했다.
그러자 굳어 있던 오일 파스텔이 녹아 마치 물감처럼 되었다. 액체가 되니 색도 아주 잘 섞인다.
“어때?”
이걸 일찍 알았다면 ‘달콤한 행복’이 좀 더 풍성해졌을 거다.
물감으로 녹아내린 초콜릿을 표현하기 상당히 고생했는데.
이것을 잘 활용하면 특유의 표면을 효과적으로 그려낼 수 있을 것 같다.
역시 미술 선생님이다.
“이런 게 있는 줄 몰랐어요.”
“일반 크레파스하고는 좀 다를 거야. 전문가용으로 나온 거거든.”
크레파스는 또 무엇인지 나중에 알아봐야겠지만 생각지도 못한 도구를 알아 기쁘다.
‘굵어.’
굵은 탓에 섬세한 작업에 제한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큰 화폭에 색과 질감을 활용하여 그리기에는 안성맞춤이다.
내가 지향하는 그림과 너무나 어울리는 도구라서 유화 물감을 대체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도화지에 착 달라붙어서 파스텔처럼 정착액을 바르지 않아도 충분할 것 같다.
“선생님, 이건 정착액 안 발라도 돼요?”
“도화지는 괜찮은데 유산지를 덮어주거나 캔버스에 그릴 땐 바르긴 해야 해.”
아쉽긴 하지만 적어도 물감처럼 말려야 하는 건 아니다.
이건 정말 혁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지 않아도 휘트니 비엔날레에 출품할 작품을 말리는 시간이 부족했는데, 오일 파스텔로 그린다면 훨씬 수월할 터.
할아버지께 말씀드려서 오늘 당장 사야겠다.
“이건 얼마나 해요?”
“4만 원? 좋은 건 10만 원에서 20만 원 사이.”
가격이 나가긴 하지만 이 성능에 비하면 도리어 싸게 느껴진다.
그때 차시현이 도화지를 들었다.
고개를 돌리니 배시시 웃는다.
“벌써 다 그렸어?”
“네.”
녀석이 선생님께 도화지를 보여주었다.
나도 뭘 그렸는지 궁금해서 고개를 내밀었다.
어제 봤던 가랜드라는 로봇이다.
“잘 그렸네? 만화영화야?”
“네.”
차시현이 웃으며 답했다.
못 그렸지만 특징은 잘 잡았다.
프랑스제 투구처럼 생긴 얼굴 윤곽과 가슴팍의 유리구슬 같은 상징물이 제법이다.
보고 그린 것도 아니고 오직 기억에 의존해서 그렸으니 관찰력과 기억력이 좋다는 뜻이다.
이 아이는 재능이 있다.
그림을 좋아하고 관찰력 또한 갖추었으니 기교를 익히는 건 일도 아니리라.
* * *
오일 파스텔의 질감을 익히고 색 배합을 하다 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찾아왔다.
오늘은 어떤 음식이 나올지 기대하며 손을 씻는데 차시현이 박현우를 불러세웠다.
“저기.”
신경 쓰인다.
“왜.”
“……이거 줄게.”
차시현이 오늘 그린 가랜드를 박현우에게 향했다.
그림을 지우기만 했던 녀석에게는 의미가 남다를 텐데, 그렇게 싫어하던 녀석에게 주는 게 의아하다.
박현우도 인상을 썼다.
“이걸 왜.”
“가랜드 좋아하잖아?”
“유치한 거 안 좋아한다고 했잖아.”
차시현이 박현우를 빤히 보았다.
녀석이 시선을 피하자 차시현이 잠깐만 기다려 달라며 가방에서 로봇을 꺼냈다.
“이거. 오늘 아침에 와서 깨끗하게 씻었어.”
“내 거 아니라니까 왜 자꾸 그래!”
박현우가 차시현을 밀쳤다.
아무리 어린아이들 싸움이라도 심한 것 같아 말리려고 나섰지만, 차시현은 물러서지 않았다.
“좋아하잖아. 어제 계속 생각났잖아?”
박현우가 다가오는 것만으로 피했던 겁 많은 아이가 또박또박 말했다.
정작 시선을 피하는 건 그간 차시현을 무시해 왔던 박현우다.
“나, 어제 아버지한테 그림 좋아한다고 말씀드렸어. 그러고 나니까 너무 행복해서. 그냥 말해주고 싶었어.”
“무슨 말이야.”
“좋아하는 거 감추지 마. 슬프잖아. 집에서 가랜드 못 가지고 놀게 하니까 학교에 가져온 거지?”
“……아니야.”
“무서워서 계속 피하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 조금만 힘내면 달라질 수 있어. 정말이야.”
차시현이 억지로 가랜드 장난감과 그림을 박현우에게 넘겼다.
“힘내.”
녀석은 말없이 장난감과 그림을 내려다보았다.
차시현은 얼른 가방을 챙겼다.
“그, 그리고 훈이는 나랑 놀 거야.”
차시현이 먼저 문밖으로 나갔다.
나도 따라 나서는데, 닫히는 문 사이로 눈물을 훔치는 박현우를 볼 수 있었다.
저 아이도 어서 자신에게 솔직해져 행복해지길 바란다.
“멋졌어.”
기특한 마음에 차시현의 등을 툭툭 치자 녀석이 얼마나 긴장했는지 알 수 있었다.
몸이 잔뜩 굳었다.
“히.”
손바닥을 보이자 차시현이 제법 다부지게 맞부딪쳤다.
* * *
방태호의 사무실로 가던 중 할아버지에게 어제와 오늘 있었던 일을 말씀드리자 껄껄 웃으셨다.
“훈이도 시현이도 멋진 친구가 되어주었구나. 잘했다.”
역시 사랑으로 해결할 수 없는 건 없다.
“아, 할아버지. 오일 파스텔 사고 싶어요.”
“좋지. 돌아가는 길에 화방에 들르면 되겠구나. 미술 시간에 썼어?”
“네. 선생님이 추천해 주셨는데 바르는 느낌이 좋았어요. 물감을 그대로 바르는 것처럼.”
“재밌게 쓸 수 있지.”
“휘트니 비엔날레 출품작도 오일 파스텔로 그리려고요.”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저런 조건이 합당하다고 생각하신 거다.
“익숙하지 않은데 괜찮겠어?”
“조금만 써보면 될 것 같아요. 좋은 생각이 났거든요.”
“어떤?”
“오일 파스텔 가열하면 녹죠?”
미술 선생님이 보여주신 것처럼 기름과 안료를 섞어 굳힌 거니 당연히 쉽게 녹는다.
“그렇지. 그렇게도 사용한단다.”
“오일 파스텔로 그림을 그리고 중간중간 녹여서 붓칠할 거예요.”
“흠. 녹인 오일 파스텔을 물감처럼 쓴단 말이지?”
“네.”
“그냥 녹이는 것도 좋고. 테레핀유랑 섞어도 재밌는 질감이 나오지.”
역시 할아버지.
오일 파스텔을 활용하는 방법을 여럿 설명해 주신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의 영역을 벗어나서 어떤 효과를 얻을 수 있을지 기대된다.
태블릿으로 오일 파스텔을 활용하는 방법을 검색하다 보니 어느새 방태호의 사무실에 도착했다.
나도 할아버지도 처음이다.
복도에 화환이 줄지어 있다. 나와 할아버지가 보낸 것도 보인다.
“축하 많이 받았나 봐요.”
“그러게나 말이다. 사회생활을 잘한 거야.”
이렇게 많은 사람이 개업을 축하했으니 당연한 말씀이다.
할아버지도 그를 한국 최고의 큐레이터라고 하셨으니, 명망과 실력을 고루 갖춘 든든한 아군이 틀림없다.
언젠가는 반드시 마르소 갤러리보다 멋진 전시회를 함께할 거다.
“들어가자.”
“네. 아저씨, 저 왔어요…….”
문을 열자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원형 테이블 하나와 업무용 책상만으로 가득 찬 데다 서류와 책은 바닥 이곳저곳에 성인 남자 키 높이만큼 쌓여 있다.
“훈이 왔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방태호의 목소리가 났다. 서류 더미 옆으로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환하게 웃지만 나와 할아버지는 웃을 수 없었다.
“오시는데 차는 안 막혔나 보네요. 하하. 좀 정신 사납죠?”
거짓말 안 하고 내가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서 머물렀던 다락방의 두 배는 될까.
서책을 치운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어때? 아저씨 사무실.”
밝게 웃는 방태호를 제대로 쳐다볼 수 없다.
안정적으로 고액 연봉을 받던 그가 이렇게 영세한 곳에서 사업을 시작하다니.
그게 나와 함께하기 위해서라는 걸 잘 알기에 마음이 아프다.
하지만 시작부터 거창할 순 없는 법이다.
“좁아요.”
“좁긴 해? 흐흐흐흫.”
함께 웃었다.
“꼭 크게 만들어요.”
“그럼. 당연히 그래야지.”
* * *
1)오일 파스텔:
크레파스는 일본에서 크레용과 파스텔이 합쳐진 신조어로 본래 오일 파스텔 상품 중 한 업체의 상품명으로 활용되었다.
그것이 한국으로 수입되어 크레파스라는 제품명이 오일 파스텔 전체를 뜻하게 되었지만, 본래 상품 이름은 오일 파스텔이다.
한편 오일 파스텔은 아이들이 쓰는 도구라는 인식이 있으나 피카소를 포함해 지금까지 여러 화가가 즐겨 쓰는 도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