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75화
19. 친구(4)
차재우는 갑자기 오열하는 아들의 등을 쓸어내렸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라 당황하기도 했지만, 아들이 왜 이렇게까지 몰려 있었나 싶어 혼란스러웠다.
“아빠가 시현이 왜 미워해.”
“끄윽끄으으윽.”
차재우는 닭똥처럼 떨어지는 아들의 눈물을 훔쳤다.
“그렇게 하고 싶었어? 말을 하지 왜 그랬어.”
“그치만. 그치만. 그림 그리지 말라고. 끙. 끕.”
차재우는 지난 일을 돌이켜보았다.
아들에게 직접적으로 그림 그리지 말라고 했던 기억은 없었다.
다만 불필요한 자극을 주고 싶지 않아서 집에 남아 있던 아버지의 흔적을 치워냈었다.
그러다 문득.
아버지와 완전히 갈라서게 되었던 날이 떠올랐다.
‘그만 좀 하시라고요! 대체 뭐가 부족해서 시현이한테까지 이래요?’
‘얘는 재능이 있어. 미술 시켜야 한다니까?’
‘제발 좀 그만해요. 아버지 이러는 이유를 제가 모를 것 같아요? 아버지가 못 한 거 시키려는 거잖아요!’
‘그래! 손자한테 할애비 못다 한 꿈 이뤄주길 바라는 게 뭐 잘못됐냐!’
‘잘못이죠! 아주 큰 잘못이죠! 시현이, 그림 그리지 마! 안 그려도 돼! 애가 뭘 안다고 하루 종일 붙잡아두고 그림 그리게 해요?’
‘조기 교육도 몰라? 요즘에는 다 그렇게 한다더라. 어렸을 적부터 훈련이 되어야 나중에.’
‘학대예요! 아버지 머릿속에 찬 욕심 때문에 애를 얼마나 괴롭혀야 직성이 풀리겠어요. 어머니랑 저로는 부족했어요?’
‘너, 너!’
‘시현이 밥은 먹였어요? 대체 언제부터 이랬는데요!’
오랜만에 아내와 함께 외출하고 들어왔을 때.
불도 켜지 않고 어두컴컴한 집 분위기에 부부는 놀랐다.
밥을 먹은 흔적도 없었고 혹시나 외출했나 싶어 아버지 방에 들어가니, 아들이 잔뜩 울먹이며 선을 긋고 있었다.
‘아니지. 손목에 힘을 주고 곧게 그리라고 했잖아.’
‘재미없어.’
‘씁. 재미없어도 하는 거야.’
하기 싫다는 아들을 다그치는 모습에 지난 수십 년간 억눌렀던 분노가 터지고 말았다.
그 모든 것을 참았어도 아들을 괴롭히는 일만큼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때의 대화 중에.
그림 그리지 말라고 했던 적이 있었다.
“……시현아, 아빠가 그림 그리지 말라고 했던 건.”
“잘못했어요. 죄송해요.”
“아니야. 시현이 잘못한 거 없어. 괜찮아.”
차재우가 아들을 꼭 안았다.
설마.
다섯 살 아이가 지나가듯 한 말을 가슴에 품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생전 투정 한 번 부리지 않았던 아이가 이렇게 서럽게 울 정도로 힘들어하고 있을 줄도 몰랐다.
자식으로서 부모의 언행에 상처받은 탓에 아들을 지극정성으로 대했지만.
정작 부모의 말이 자식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몰랐던 것이다.
“아빠는 시현이가 하고 싶은 건 뭐든 응원해.”
차재우가 아들을 안심시켰다.
“아빠가 그림 그리지 말라고 했던 건, 시현이가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그랬던 거야. 그때 기억나?”
차시현이 고개를 저었다.
소년이 그날의 일을 기억하는 이유는 상냥하던 아버지가 처음으로 소리치며 화를 냈기 때문이었다.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기에.
단지 아버지가 불같이 화내는 모습만이 각인된 것이었다.
차재우가 아들의 머리를 쓸어넘기며 말했다.
“좋아하면 그려도 돼. 그림 말고 다른 것도.”
“정말요?”
닭똥 같은 눈물을 떨어뜨리던 차시현이 눈물을 닦아내고 물었다.
“그럼. 하지만 아빠랑 약속 하나 하자.”
차시현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공부할 때는 아빠가 뭐든 해 줄 거지만 언젠가 시현이가 커서 대학도 가고, 군대도 다녀오고 하면 그때는 씩씩하게 살 수 있어야 해.”
아직 어린 아들에게 책임감이란 걸 주고 싶진 않았다.
삶의 무게를 지워주어 부담을 느끼게 하고 싶진 않았다.
다만, 언젠가 그래야 하는 날이 오리라는 것은 가르쳐야만 했다.
그날이 오기까지 충분히 사랑하고 보호해 주되 언제까지고 함께할 순 없었다.
차재우는 그것이 부모 된 도리라고 생각했다.
“약속할 수 있지?”
차재우가 새끼손가락을 보이자 차시현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손가락을 걸었다.
“약속.”
* * *
학교 가는 길이 이렇게나 즐거웠던 적이 있었나.
나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는지 할아버지가 웃으며 물었다.
“그렇게도 좋아? 노래까지 부르고.”
“미술 시간이잖아요. 네 시간이나.”
한국 초등학교의 시간 배정은 극단적이면서도 합리적인 부분이 있다.
다닌 지 2주 동안 일반 과목만 하다가 겨우 돌아온 미술 시간.
한 시간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했는지 하루를 통째로 배정해 두었다.
“하하. 너무 기대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요즘 초등학교에서는 뭘 가르치나?”
“뭐든 배우는 게 중요하죠.”
미술에 관련한 거라면 무엇이든 좋다.
인터넷과 할아버지, 장미래에게 이것저것 배우고는 있지만 아무리 익혀도 만족스럽지 못하다.
방대한 범위에 적용되고 세밀하게 분류된 현대 미술에 그저 감사할 뿐이다.
학교 앞에 도착했다.
“오늘 방 대표네 가기로 한 거 기억하지?”
“네!”
방태호와 정식으로 계약서를 쓰기로 한 걸 잊을 리 없다.
오늘은 정말 최고의 날이다.
“다녀오겠습니다!”
차에서 내려 교실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아이들이 나를 보더니 시선을 피한다.
어제 있었던 일 때문이리라.
신경 쓰지 않고 자리로 가 앉으니 차시현이 방실방실 웃고 있다.
“안녕.”
이 녀석도 미술 시간이 퍽 기쁜 모양. 안 하던 인사를 먼저 건넨다. 그러고는 여러 붓을 자랑했다.
어제 아버지께 말씀드린다고 하더니 이야기가 잘 풀린 듯하다.
“뭐야?”
“아버지가 그림 그려도 된대. 흐히힣.”
해맑은 미소를 보니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뭔가 잘못 알고 있었나 봐. 막 안아주셨어.”
“거봐. 널 사랑한다고 했잖아.”
“응.”
역시 중요한 건 대화다.
대화하는 방법도 중요하지만, 그조차 대화가 없으면 아무 소용없는 일이다.
서로에게 솔직한 마음을 내비칠 작은 용기만 있으면 많은 갈등이 일어날 리 없다.
“이따가 붓 관리하는 방법 알려줄게. 오일 있어?”
“아니? 필요해?”
“쓰다가 물감이 굳으면 오일로 씻어야 해. 클리너도 있는데, 할아버지가 쓰시는 천연 오일이 더 좋더라.”
차시현이 눈을 깜빡인다.
줄곧 남에게 설명만 들어왔는데, 이 아이에게는 가르쳐 주는 입장이 되니 이 역시 기쁘다.
오늘은 여러모로 흡족하다.
붓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수업 시간이 다가왔다.
딱히 준비물 이야기는 없었지만 그래도 챙겨온 물건을 가지고 미술실로 향했다.
“오.”
미술실은 지나치게 넓었다.
40~50명은 수용할 수 있을 정도라서 공간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그리파.’
신기하게도 프랑스 왕립 미술원이 교육용으로 사용했던 석고상들이 여기에도 있다.
그렇게 많은 화가가 저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거늘 한 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
지구 반대편에서도 쓰이니 그 영향력이 참으로 대단하다.
‘묘사력을 키운다는 좋은 명목도 있으니까.’
만약 일정 수준의 교양을 위한 교육이라면 그렇게까지 나쁘게만 볼 필요는 없으리라.
박현우와 아이 둘이 함께 앉았고.
나와 차시현이 나란히 앉았다.
미술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젊은 남잔데, 부임한 지 얼마 안 된 모양. 조금 긴장한 듯 땀을 흘리고 걷는 모습도 어색하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선생님과 인사했다.
“다들 미술 좋아해요?”
“네.”
나와 차시현만 답했다.
“좋아요. 미술이라고 하면 보통 그림만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조각이나 구조물, 건축물. 서화 등 우리 주변에는 미술로 가득해요. 여러분이 교과서로 쓰는 태블릿 디자인도 미술의 한 영역이죠.”
옳은 말씀이다.
이 시대는 정말 미술이 영향을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일률적인 그림을 그리게 했던 아카데미는 조금도 관심 없지만, 좀처럼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이 시대의 미술을 어떻게 설명해 줄지 너무나 기대된다.
“음. 그러니까 차근히. 그래요. 차근차근 알아가 보도록 해요. 어…… 그러면 오늘은 첫 시간이니까. 첫 시간이죠?”
너무 긴장한 탓인지 말을 더듬는다. 내 시선도 묘하게 피하는 기분이다.
“오늘은 선생님이 나눠주는 종이에 그림을 마음껏 그려보도록 해요.”
선생님이 종이를 두 장씩 나눠주었다. 8절지 크기의 작은 도화지다.
지우개와 6B, 4B, 2B 연필과 색연필도 한 세트씩 받았다.
차시현이 연필을 들고 번갈아 보다가 묻는다.
“뭐가 좋아?”
보통 4B를 많이 쓰는 것 같지만 특유의 부드러움과 잘 지워지지 않는 것 때문에 2B를 선호한다.
연필 묘사는 처음인 차시현은 지우개를 많이 쓸 테니 2B가 쓰기 더 편할 거다.
하지만 내 생각일 뿐이다.
“한 번씩 다 써 봐. 마음에 드는 거 쓰면 돼.”
“응.”
차시현이 도화지에 선을 쭉쭉 그었다. 저 과감함이 그림을 그릴 때도 나타난다면 좋은 선을 쓸 수 있을 거다.
‘어디.’
최근에는 묘사력을 키우기 위해 정밀한 소묘를 많이 그렸는데, 오늘도 연습 삼아 그려봐야겠다.
가장 좋은 대상은 인물.
신체를 그리는 것만큼 묘사력을 키우기에 좋은 건 없다.
“뭐 그릴 거야?”
차시현이 물었다.
2B 연필을 쥔 것을 보니 감이 좋다.
“너.”
“나?”
차시현이 고개를 갸웃한다.
“나 왜?”
“물건보다 사람 그리는 게 어려워. 연습하는 거야.”
“재미없을 것 같아.”
“의외로 재밌어. 넌 뭐 그리게?”
“비밀. 히힣.”
“비밀이라고 해봤자 좀 있으면 다 알잖아.”
“다 그릴 때까지 보면 안 돼.”
차시현이 도화지와 재료를 챙겨 일어나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고는 거침없이 선을 긋는다.
보통 흰 종이를 주면 무엇을 그려야 할지 모르는 사람이 많은데 저 아이의 가슴은 그리고 싶은 것으로 가득한 모양이다.
앳된 얼굴을 관찰하다가 연필을 쥐었다.
미술 선생님과 박현우가 이쪽을 자꾸 힐끔거려 신경 쓰이는 것도 곧 잊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