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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반 고흐-74화 (29/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74화

19. 친구(3)

오늘 내내 불안해하던 차시현이 점심시간이 되자 꿍얼거렸다.

“나 그냥 안 할래.”

학우들과 같이 놀아 보자고 제안했는데 무서운 모양이다.

어제 차시현의 말을 듣고 유심히 살피니, 학우들이 차시현을 대놓고 따돌리진 않아도 은근히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계속 같은 반인데 이대로 있어도 괜찮아?”

고개를 젓는다.

“그래도.”

지금도 힘들지만 괜한 행동으로 관계가 더 나빠지는 걸 걱정하는 듯하다.

이런 상태면 억지로 무엇을 하는 게 도리어 상황을 나쁘게 만들 수도 있겠다 싶다.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가장 좋은 건 반 아이들이 차시현에게 먼저 다가가는 거지만 쉽지 않다.

공통의 주제라든지 뭔가 계기가 있어야 할 테니 말이다.

그렇게 고민하던 차.

박현우의 책상 서랍에 이상한 것이 삐쭉 튀어나와 있음을 발견했다.

‘뭐지?’

슬쩍 보니 팔 같은데 툭 하고 떨어졌다. 사람 형태의 장난감이다. 인형이라고 하기엔 떨어질 때 소리가 둔탁했다.

“가랜드다.”

차시현은 알고 있는 모양.

“그게 뭔데?”

“몰라? 엄청 센 슈퍼 로봇.”

“만화영화야?”

“응.”

“무슨 내용인데?”

“사실 나도 잘 몰라. 딱 한 번 봤어.”

어깨를 으쓱이곤 박현우의 장난감을 주워주려고 할 때 박현우가 얼굴이 잔뜩 빨개진 채 교실 문 앞에 서 있었다.

“이거 네 거지? 떨어졌.”

가랜드란 장난감을 줍자 성큼성큼 걸어와 냉큼 집는다.

“내 거 아니야.”

그러고는 쓰레기통에 버린다.

황당해서 지켜보니 말을 더듬는다.

“내가 그런 장난감을 가지고 놀 리 없잖아. 열 살이라구.”

차시현도 그렇고 얘도 그렇고.

이 학교 다니는 애들은 대체 집에서 어떻게 교육하길래 이러는지 모르겠다.

얼마나 대단한 집안이면 한창 놀아야 할 아이들이 이런 식으로 행동하게 하는지 모를 일이다.

할아버지가 가끔 ‘고훈’의 아버지, 어머니가 괴롭힌 건 아니냐고 물으셨는데.

이 아이들에게 묻고 싶은 심정이다.

“뭐 어때. 가지고 놀면.”

“……내 거 아니야.”

무슨 말을 더 해줘야 할지 몰라 차시현을 데리고 식당으로 갔다.

오늘 점심은 일식에 도전했다.

유럽에서 유행했던 우키요에 덕분에 그러지 않아도 관심이 많다.

식문화도 발달해 있다고 어딘가에서 들은 기억이 있어 기대된다.

미소시루(된장국), 오히다시(나물), 츠케모노(절임야채), 가라아게(닭튀김), 멘타이코(명란), 타마고야끼(계란말이) 등 처음 보는 음식이 함께 나오는 듯하다.

막상 음식을 받아보니 생각보다 눈에 익은 음식이 많다.

역시 인접한 나라라서 조리 방법이나 먹는 게 비슷한 듯.

미소시루라는 된장국은 달래된장찌개보다는 편하게 먹을 수 있었다.

바삭-

아아.

이 무슨 식감이란 말인가.

여리디여린 튀김 옷 아래 육즙을 가득 머금은 닭다리살이 농밀한 육질을 숨기고 있었다.

지방과 단백질의 가장 이상적인 조화가 아닐까.

튀김이란 음식의 궁극적 목표는 이 가라아게가 아닐까.

입안에서 살짝 감도는 후추 향에 순식간에 혀를 정복당하고 말았다.

“그렇게 맛있어?”

차시현이 신기한 듯 쳐다본다.

“먹어 봐.”

가라아게를 먹어 보라고 권하니 고개를 젓는다.

“그런 표정으로 먹는데 어떻게 먹어.”

“후회하지 말고 줄 때 먹어. 이건 가장 바람직한 닭튀김이야.”

차시현이 의뭉스러워하며 하나 집어 먹었다.

“그냥 가라아게 맛인데?”

“담배 피워?”

“무슨 소리야!”

“담배도 안 피우는데 미각이 왜 그래. 조리사를 경애해도 부족한데.”

“난 네 할아버지가 만들어주신 오리탕이 더 맛있었어.”

“그것도 맛있었지. 할아버지 음식은 보통 맛이 이상한데, 그건 신기하더라. 그건 뭐야?”

“스파나꼬피따랑 수블라키.”

“뭐?”

“그리스 음식이래. 이건 돼지고기. 먹어 볼래?”

마음이 바뀌기 전에 냉큼 고개를 끄덕이자 차시현이 자기 몫의 절반을 주려 했다.

“야, 다 주면 넌 뭐 먹게.”

“난 많이 안 먹어.”

“어릴 때 잘 먹어야 나중에 안 골골대. 한 입이면 돼.”

“……고작 한 살 많으면서.”

즐거운 식사를 마치고 교실로 돌아오니 한 아이가 차시현을 가리키며 크게 외쳤다.

“왔다!”

쓰레기통을 가리키며 차시현에게 말했다.

“너 학교에 장난감 가지고 왔지? 다 봤어!”

“아, 아니야.”

“너 말고 누가 그런 걸 가지고 노는데? 선생님한테 다 이를 거야!”

“이를 거야!”

또 다른 아이도 거들었다.

주식이 어쩌고 환율이 어쩌고 해도 애는 애다.

친구를 괴롭히는 못된 행동은 어릴 때 잡아야 한다.

이 아이들에게 악의가 있진 않다고 믿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잔인한 행위가 허용되진 않는다.

예전에는 훈육을 소리치고 때리는 것으로 대신했지만 나는 가장 위대한 스승을 통해 무엇을 가르치는 법을 배웠다.

“아니라고.”

차시현이 울먹인다.

시선을 돌리니 박현우는 자기도 놀림 받을까 봐 모른 척하고 있다.

“내 거야.”

차시현을 놀리던 두 아이가 당황한다.

“뭔가를 좋아하는 건 대단한 일이야.”

차시현도 그렇고 박현우도 그렇고 이 반 아이들은 모두 무엇을 좋아하는 마음을 거세당했다.

가장 순수한 마음을 억제당했으니, 그것을 마치 아주 나쁜 것처럼 인식하고 있다.

잘못되었다.

“기쁘고 즐거운 일이야. 정말 나쁘고 슬픈 건 좋아하는 마음을 숨기는 일이야.”

그것이 설령 로봇이든 만화영화든 무엇이든 좋아하는 마음은 결코 잘못이 아니다.

박현우가 알아듣길 바라며 말했다.

“남은 속일 수 있어도 자기는 못 속여. 스스로한테 거짓말해 봤자 점점 더 슬퍼질 뿐이야.”

그런 일을 반복하면 결국 자신을 증오하게 된다.

로봇을 좋아하는 나를 부정하면서 남들에게 감춰야 할 것이 생기고 그런 내가 미워짐으로써 자존감은 바닥나게 된다.

아주 어릴 적부터 어머니와 함께 그리던 낙서 같은 그림.

화상이 되어서도, 전도사가 되어서도 잊지 못했던 그림을 향한 갈망을 인정하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내 이름을 되찾은 듯했다.

어떤 일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던 내가 비로소 나를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가만히 있던 아이들이 짜증을 냈다.

“뭐래. 너랑 안 놀아!”

* * *

차시현은 신기했다.

두 사람이 마구 말하는데도 어떻게 조금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지 그저 신기하고 멋있었다.

이런저런 지식은 많이 있지만 아직 아이일 뿐인 차시현은 고훈이 왜 박현우를 감싸주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단 하나.

사랑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말은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무엇을 좋아하는 건 대단한 일이라고, 정말 슬프고 나쁜 건 그걸 부정하는 일이라는 말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차시현은 할아버지를 싫어하는 아버지의 눈치를 보고 살았다.

아이라도 눈치는 있었다.

아버지가 할아버지와 그림을 환멸하니까, 그런 아버지가 슬퍼하지 않도록 그림을 좋아하는 자신을 숨겼다.

그럴수록 자신은 아버지가 싫어하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어 더더욱 철저히 숨겼다.

영특한 아이는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성적에 영향이 없도록 하며 그림은 오직 태블릿에만 그렸고 그마저도 혹시나 들킬까 봐 저장하지 않았다.

그런 차시현이.

고훈의 말을 듣고 용기를 얻었다.

“오늘은 집에 갈래.”

차시현이 하교 준비를 하는 고훈에게 말했다.

“왜? 오늘은 안 그려?”

차시현이 침과 함께 각오를 삼키곤 말했다.

“나 아버지께 말씀드릴 거야.”

고훈이 눈을 깜빡였다.

“그림 그리고 싶다고. 공부 열심히 할 테니까 그림 그리며 놀게 해 달라고 할 거야.”

벌써부터 눈물이 그렁그렁한 주제에 제법 사내답게 말했다.

고훈이 빙그레 웃으며 차시현을 안아주었다.

“아버지가 아무리 무섭게 화내도 널 사랑한다는 것만 기억하면 돼.”

“날 사랑해?”

“그래. 사랑하지 않는데 네가 이렇게 깔끔하고 단정하게 다닐 리 없잖아.”

고훈은 오래전, 화가가 되기로 했던 시절을 떠올렸다.

생계를 유지할 방법조차 없이 무작정 그림만 그리겠다던 당시의 자신을 아버지가 왜 그리 반대하고 화내셨는지 이제는 충분히 이해했다.

“응.”

차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봐!”

친구에게 인사를 하고 차에 오른 소년은 무서웠다.

아버지가 화를 내는 것보다 실망하고 자기를 싫어하게 되는 것이 무서웠다.

‘아니야.’

고훈의 말을 떠올린 차시현은 터질 듯이 뛰는 가슴을 간신히 부여잡고 비서 정진호에게 말했다.

“아저씨, 아버지 회사로 가 주세요.”

“알겠습니다.”

차시현은 고개를 숙인 채 고훈과 함께 그림을 그리던 지난 며칠을 떠올렸다.

그 행복한 기억을 떠올리며 괜찮을 거라고, 포기하고 싶지 않다고 반복해 생각했다.

그렇게 EI제당 사옥에 이르고.

대표이사실 앞에 도착했을 때 차시현은 요동치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정진호가 안으로 들어가길 권했다.

차시현은 똑 부러지게 말씀드리자고 마음을 굳게 먹고 문을 열었다.

“시현아.”

그러나 아버지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런 각오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눈물만 나왔다.

“아버지이잉으잉.”

갑자기 찾아온 아들이 울기 시작하자 차재우 대표가 깜짝 놀랐다.

“뭐야? 왜 울어?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어? 응?”

아버지가 아들에게 다가가 얼굴을 감쌌다. 어디 맞은 곳은 없는지 몸 구석구석을 살폈다.

“흐끄윽. 흐끅.”

“무슨 일이야? 왜?”

“아법. 지.”

“응?”

“저, 저. 공부 열심히 할게요.”

차재우가 아들을 보다가 피식 웃었다.

“왜. 시험 점수 나빴어?”

평소에는 방과후 친구 집에 놀러가던 아이가 회사로 찾아온다는 말을 듣고선 의아하게 여겼는데, 오자마자 울더니 공부 열심히 하겠다고 했다.

고작 시험 한 번 잘 못 봤다고 우는 아들이 귀엽기도 안쓰럽기도 했다.

“괜찮아. 우리 아들 공부 열심히 하는 거 아빠가 다 아는데. 백 점 아니라도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 충분해.”

차재우가 아들의 엉덩이를 툭툭 두드렸다.

“흑. 흐읍.”

그러나 아들은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이렇게 서럽게 운 적은 없었다.

차재우가 입은 푸른색 와이셔츠가 차시현의 눈물로 젖어갔다.

“정말 무슨 일 있었어? 왜? 친구가 괴롭혔어? 선생님이 때렸어?”

차시현이 고개를 저었다.

“공부 열심히 하고옵. 밥도 끅. 잘 먹고. 방 청소도 열심히 할게요. 일찍 잘게요. 로션도 잘 바를게요.”

차재우는 아들의 이상 행동에 당황해 눈썹을 모았다.

“그러니까. 그러니까아.”

“그래. 그래.”

“그림 그리게 해 주세요.”

“그림?”

차재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음이 다급해진 차시현이 다급히 말을 쏟아냈다.

“그림 그리고 싶어요. 죄송해요. 훈이랑 그림 그리고 싶어요. 거짓말했어요. 너무 놀고 싶어서 거짓말했어요.”

“잠깐, 시현아.”

“나 미워하지 마세요으으으응.”

차시현이 아빠를 필사적으로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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