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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반 고흐-27화 (26/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27화

7. 불쌍한 사람(4)

“……네?”

“무슨 뜻이죠? 앙리 마르소와의 전시회를 거절하겠단 말씀인가요?”

“네. 안 해요.”

기자들의 눈이 거의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사진 찍는 소리와 함께 또다시 질문이 쏟아졌다.

“거절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정된 일 아니었습니까?”

하나하나 답변해 주고 싶지만 너무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물어오니 누구부터 상대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인기가 많긴 하네.’

전시회를 제안받은 것만으로도 이렇게 많은 사람이 찾아올 정도니, 앙리 마르소란 남자가 얼마나 사랑받는지 알 것 같다.

하지만 정작 난 그가 어떤 작품을 만들고 어떤 미학을 추구하는지 조금도 알지 못한다.

더군다나 WH배움 미술관과의 선약도 있다.

계약서도 안 썼고 하물며 약속한 것도 아니지만, 나도 방태호 큐레이터도 석 달 뒤에 다시 만나 이야기하자고 했다.

앙리 마르소의 전시회에 작품을 내버리면 방태호 큐레이터에게 보여줄 것이 없을 거다.

“이유를 말씀해 주세요!”

한 기자의 외침이 귀에 들어왔다.

“선약이 있어요.”

“선약?”

“혹시 한국에서 준비하고 계시다는 전시회 때문입니까?”

“네. 정해진 건 없어서 자세히 말씀드리진 못해요. 마르소의 제안은 고맙지만 거절합니다.”

할아버지가 내 어깨를 감싸며 기자들에게 말했다.

“미술관 입장객들에게 방해가 되기도 하고 또 오늘 일정이 있으니 여기까지 하지요. 필요한 일이 있으면 제 메일로 연락해 주길 바랍니다.”

할아버지의 말에 기자들의 기세가 죽었다.

“일정 조율은 고려하지 않으십니까?”

“앙리 마르소가 전시회를 제안한 건 처음 있는 일입니다. 그가 손자분에게 어떤 것을 발견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질문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조금 전처럼 무턱대고 달려들지 않는다.

서울 미술관도 그랬고, 케빈 씨도 그런 것처럼 할아버지를 대하는 게 상당히 조심스럽다.

그만큼 원로이자 거장으로 인정받기 때문이리라.

반 고흐 미술관에 들어서자 케빈 씨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왔다.

“괜찮으십니까?”

“아침부터 이게 무슨 난린지. 하하.”

할아버지가 웃어넘겼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훈이 많이 놀랐겠다.”

며칠 얼굴을 보며 대화도 많이 나눈 케빈 씨가 초콜릿을 주며 달랬다.

놀라긴 해도 초콜릿을 받을 정도는 아닌데, 이 시대의 초콜릿은 무척이나 농후하고 달달하니 넘어가자.

“앙리 마르소 때문입니까?”

케빈 씨가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그런 모양이에요. 쯧. 돼먹지 못한 놈.”

전부터 느낀 거지만 앙리 마르소를 무척 싫어하시는 듯하다.

무슨 사연이라도 있나 싶어서 물었다.

“왜 그렇게 싫어하세요?”

“태도가 마음에 안 들어. 멋진 작품을 만들면 뭐 하니. 이 할아버진 돈이면 다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싫구나.”

그의 속물적인 면 때문인 듯하다.

하지만 그렇게 말씀하시면서도 앙리 마르소의 작품은 인정하시는 듯하니 신기한 관계다.

“아무튼 잘했다. 그런 녀석하고 어울려 봐야 좋을 거 하나 없어.”

“선약이 있으니까요.”

“그렇지. 구두로 한 이야기라도 지킬 건 지켜야 해.”

* * *

개인 작업실에서 <마르소의 보석>을 다듬고 있던 앙리 마르소가 눈매를 좁혔다.

망치와 끌을 내려놓고 대리석상에서 조금 떨어져 <마르소의 보석>을 관찰했다.

대리석이라곤 생각할 수 없는 질감과 이란에서 공수해 온 골드 이란 마블(대리석)의 눈부신 색상은 마음에 들었으나 자신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가장 중요한 눈.

어떻게 표현하려 해도 에메랄드빛 눈동자에 어울리는 보석만은 찾을 수 없었다.

앙리 마르소는 케일 주스를 한 모금 마시며 고민을 거듭했다.

유럽에서 구하기 어렵다면 세계 최대의 에메랄드 산지 콜롬비아에 가서라도 구할 용의가 있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선택지 중 하나.

앙리 마르소는 조급해하지 않고 다른 여러 방법을 구상했다.

그러던 차 비서 아르센이 작업실을 찾았다.

“작가님, 고훈이 답했습니다.”

“그래?”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들으나 마나 뻔한 일이었다.

앙리 마르소의 개인전에 초대되었다는 것은 크나큰 영예였다.

그 자체만으로도 화제가 되어 미술계에서 입지를 다질 기회.

누구도 거절할 수 없었다.

그것을 언론을 통해 공개적으로 제안했으니, 그 화제성 때문이라도 고훈은 응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마르소의 보석>을 완성하는 것만이 앙리 마르소의 고민이었다.

“거절한다고 합니다.”

비서 아르센의 말에 앙리 마르소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거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네. 다른 미술관과 선약이 있다고 합니다.”

“다른 미술관?”

“WH배움 미술관입니다.”

“……어디라고?”

“대한민국 서울에 위치한 사립미술관입니다. WH그룹에서 운영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국립박물관을 제외하고 가장 규모가 큽니다.”

“감히 날 거스를 정도로?”

“자국 인지도를 쌓는 측면에서 그럴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듯합니다.”

챙-

앙리 마르소가 케일 주스가 담겨 있던 유리잔을 던졌다.

참을 수 없었다.

세상 모든 일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그것이 정의였던 앙리 마르소에게는 견딜 수 없이 굴욕적이었다.

“감히 이 앙리 마르소의 제안을 거절한 것으로도 모자라 들어보지도 못한 곳과 뭘 한다고?”

이를 갈던 앙리 마르소가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그 녀석 어디 있어.”

“암스테르담에 있습니다.”

“한 시간 안에 출발할 수 있게 준비해 놔. 직접 말해야겠어.”

“네.”

비서 아르센은 씩씩대며 본관으로 향하는 앙리 마르소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세상 모든 것을 누리며 성장한 철없는 고용주가 너무나 안타까웠다.

조부 필리베르 드 마르소마저 세상을 떠난 지금.

독선적이고 무례하며 충동적인 그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얼마 뒤.

저녁때가 되어 암스테르담에 도착한 앙리 마르소는 때마침 반 고흐 미술관에서 나오는 고훈을 발견할 수 있었다.

“너!”

앙리 마르소가 저돌적으로 다가서자 깜짝 놀란 케빈이 그를 막아섰다.

“무슨 짓입니까.”

“비켜.”

앙리 마르소가 두 눈을 불태우며 케빈을 노려보았다.

반 고흐 미술관 관리처장 케빈은 흥분한 그가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생각에 물러설 수 없었다.

“내가 누군지 몰라?”

“압니다. 앙리 마르소 씨.”

“그런데 감히 내 앞을 막아서?”

케빈이 침을 꿀꺽 삼켰다.

“앙리 마르소 아니야?”

“맞네. 잘생겼다.”

“여긴 왜 왔지? 구경하러 왔나?”

“싸우는 거 같은데?”

때마침 폐관 시간에 따라 미술관을 나서는 사람들의 이목이 쏠렸다.

“작가님.”

비서 아르센이 앙리 마르소를 부름으로써 주의를 주었다.

주변 시선을 인지한 앙리가 숨을 크게 내쉬곤 흥분을 가라앉혔다.

“무슨 일이에요?”

고훈이 케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서서 물었다.

“내 초대를 거절했다고?”

“네.”

앙리 마르소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돋아났다.

“이유는?”

“선약이 잡혀 있어요.”

“고작 그런 이유로?”

고훈이 눈썹을 찡그렸다.

기사를 통해 초대한 것도, 하루 만에 찾아와 으름장을 놓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마르소 씨야말로 고작 그런 이유로 여기까지 찾아와 행패 부리는 거예요?”

“뭐? 행패?”

“그래요. 행패. 대체 왜 이렇게 집착해요? 내 그림이 그렇게 좋아요?”

앙리 마르소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어머. 진짠가 봐.”

“얼마나 마음에 들었으면 초대하려고 암스테르담까지 찾아왔을까.”

“전시회 거절해서 저러나?”

“그러게.”

주변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도 있었지만, 영어와 프랑스어는 그의 귀에 정확히 꽂혔다.

‘이 녀석 설마.’

앙리 마르소는 이 조그만 꼬마가 설마 자신을 이용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태도를 보니 그 외에 다른 이유가 없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WH배움 미술관이라는 들어보지도 못한 곳과의 선약이란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자신의 제안을 거절할 리 없었다.

생각해 보니 처음부터 그랬다.

<해바라기>를 팔 때도, 두 차례의 인터뷰도, 지금 ‘내 그림이 그렇게 좋냐’는 질문도 모두 앙리 마르소란 명성을 이용하려는 것 같았다.

지금도 앙리 마르소를 거절할 만큼 대단한 유망주란 명성을 기대하고 있을 게 뻔했다.

“하.”

앙리 마르소가 헛웃음을 지었다.

“이 영악한 꼬맹이가…….”

언론과 평단 그리고 일부 몰지각한 악플러에게 앙리 마르소의 위엄을 보이기 위한 일이었다.

자신을 이용해 유명세를 얻으려는 겁 없는 꼬맹이에게 수준 차이를 확실히 해야만 했다.

“그렇게 자신 있어?”

“뭐가요?”

“실력에 그렇게 자신 있냐고.”

뜬금없는 질문이었으나 고훈은 앙리 마르소를 불쌍히 여겼다.

대체 어떤 삶을 살았기에 그렇게 많은 돈과 인기를 가졌으면서도 이토록 신경질적으로 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가슴속에 큰 상처가 있기 때문이라고 여긴 고훈이 앙리 마르소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눈을 마주하곤 슬며시 그의 손을 잡았다.

“너무 조급해하지 말아요. 뜻대로 안 되는 것 같아도 언젠가는 진심이 통하는 날이 오더라고요.”

비록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죽었으나.

며칠간 반 고흐 미술관을 찾은 수많은 사람의 관심과 사랑 속에 행복과 용기를 되찾은 고훈은 진심으로 그리 생각했다.

앙리 마르소가 어떤 상처를 입었는지 알 순 없었지만 그가 어떤 심경인지는 유추할 수 있었다.

그 역시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환청과 발작, 마비 증세로 신경이 날카로워질 대로 날카로웠던 시절이 있었으니까.

고훈은 앙리 마르소가 부디 마음의 평화를 되찾길 바랐다.

“자, 이거 줄 테니까 전시회에 걸어요.”

고훈이 오늘 반 고흐 미술관을 찾은 사람을 그린 <손님>을 앙리 마르소에게 쥐여주었다.

“웃으면서 살아요. 분노와 증오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어요. 가능한 많은 것을 사랑해요.”1)

고훈의 말에 앙리 마르소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마치 떼쓰는 아이에게 장난감을 주는 듯한 태도에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그러나.

“어머. 어른스러운 것 봐.”

“그림 주는 건가 봐?”

“잘됐네. 마르소! 축하해!”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두 사람을 응원하고 나섰다.

전시회 초대를 거절당해 화가 난 앙리 마르소가 그토록 바라던 고훈의 그림을 얻었으니, 고훈의 어른스러운 태도와 따뜻한 마음씨가 그저 훈훈해 보였다.

비서 아르센이 귓속말했다.

“그만하셔야 합니다.”

당했다는 생각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자신을 올려다보며 싱긋 웃는 고훈.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칫.”

앙리 마르소와 그의 비서가 자리를 떠나자 일부 사람이 그를 쫓아갔다.

긴장이 풀린 케빈이 한숨을 푹 내쉬고 고훈을 보았다.

“너 정말 대단하다.”

“뭐가요?”

“앙리 마르소를 그렇게 대하는 사람은 아마 너뿐일 거야.”

케빈의 말에 고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가장 아플 때 마을 사람 대부분이 자신을 미친놈 취급하였다.

모든 속박에서 벗어난 지금 돌이켜보면 그들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충분히 이상한 사람으로 여길 만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당시의 서글픈 마음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기에 고훈은 앙리 마르소를 동정했다.

“불쌍한 사람이에요. 사랑으로 보듬어 줘야죠.”

고훈이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 진심으로 말했다.

* * *

1)“인생을 가장 멋지게 사는 방법은 가능한 한 많은 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빈센트 반 고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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