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6화
7. 불쌍한 사람(3)
앙리 마르소는 늦은 오전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을 들으며 눈을 떴다.
침대에 걸터앉아 황금 실로 수놓은 실크 잠옷을 여미는 손 끝에서 여유가 묻어나왔다.
앙리 마르소가 세면대로 향했다.
미지근한 물로 세수하고 물을 닦아내는데, 거울 속 자신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가늘고 분명한 눈썹.
이마에서 콧잔등까지 떨어지는 선은 경이롭기까지 했다.
그 옆에 자리한 에메랄드빛 눈동자는 세상 그 어떤 보석보다 빛났다.
아름다운 그림을 찾아 수없이 헤매다 결국 스스로 그리는 데 이르렀으나, 그는 아직 자신만큼 아름다운 작품을 만난 적 없었다.
그의 작품은 오로지 본인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함이었다.
어떠한 잡념도 없이 순수한 아름다움. 그것이야말로 앙리 마르소가 추구하는 미학이었다.
오늘도 그는 거울 속 자신의 고운 자태를 감상하는 데 30분을 할애했다.
‘좋아.’
자신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만끽함으로써 하루를 시작할 힘을 얻은 그가 밖으로 나섰다.
차릉차릉-
“기침하셨습니까.”
앙리 마르소가 복도 선반 위의 종을 울리니 비서 아르센이 다가와 정중히 물었다.
“뛰고 올 거야. 이지도르는?”
전속 피부 관리사 이지도르가 어찌하고 있냐는 질문에 아르센이 고개 숙여 긍정했다.
“대기하고 있습니다. 식사는 어떻게 준비할까요?”
“케일 주스.”
앙리 마르소는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고 저택 밖으로 나섰다.
세나르 숲(forêt de Sénart)에 자리한 마르소 가문의 대저택은 30만 평의 광활한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다.
저택 부지에 마련된 산책로를 따라 뛰기 시작한 그가 오늘 할 일을 정리했다.
‘작업 기간을 좀 더 가졌으면 좋겠는데.’
현재 작업 중인 자각상 <마르소의 보석>의 세부 작업이 늦어지고 있었다.
파리 시내에 위치한 자신 소유의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준비 중인 그는 일주일 정도 일정을 미루기로 마음먹었다.
이미 한 달 이상 홍보된 일이라 여러 문제가 따르겠지만, 작품의 완성도보다 중요한 일은 없었다.
그 외 자잘한 문제 따위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었다.
타인의 시간을 살 수 있는 그에게 불가능한 일은 적었다.
언제 일어나든 상관없었다.
약속 시각에 늦어도 상대는 기다리는 일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날 기분이 내키지 않아 약속 자체를 취소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모든 일을 마음대로 처리했으나 누구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도리어 많은 사람이 거액 자산가이자 수많은 추종자를 거느린 아티스트 앙리 마르소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애썼다.
전시회를 미루는 일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그저 고개를 숙이고 받아들일 것이 뻔했다.
“후.”
한 시간 정도 뛴 앙리 마르소가 미지근한 물로 샤워하고 곧장 저택 내 에스텍틱으로 향했다.
전속 피부 관리사 이지도르에게 마사지를 받던 중, 비서 아르센이 케일 주스를 들고 들어왔다.
“오늘 일정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얼굴을 마사지 받던 앙리 마르소가 손을 들어 재촉했다.
“오후 3시에 귄터 페르디난트 부사장과 미팅이 잡혀 있습니다.”
세계적인 자동차 제조업체 페르디난트와 앙리 마르소는 한 가지 일을 기획하고 있었다.
그의 열렬한 팬이자 사업파트너 귄터 페르디난트는 앙리 마르소의 완벽한 미적 감각을 적용한 슈퍼카를 100대 한정 출시할 예정이었다.
“오후 6시부터는 귄터 페르디난트 부사장과 저녁이 예정되어 있고, 이후는 개인 작업 시간으로 비워두셨습니다.”
“내일부터는 모든 일정 빼. 작업에 집중할 테니.”
“네.”
스케줄러를 조정한 아르센이 어제와 오늘 앙리 마르소가 언급된 뉴스를 정리했다.
“르 몽드에 작가님 기사가 올라왔습니다. 다음 주로 예정된 전시회에 관한 추측 기사입니다.”
“아, 그거. 일주일 미룰 거라고 미셸한테 전해. 언론에 보도자료 풀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앙리 마르소는 몸의 긴장을 한껏 풀곤 비서 아르센이 전하는 기사를 들었다.
마사지를 받는 90분 동안 아르센이 전하는 자신의 기사가 끊이지 않아야 만족했다.
“르 몽드 뵈브메리란 곳에서도 크게 언급되셨습니다.”
“뵈브메리?”
앙리 마르소가 눈을 감은 채 눈썹을 들어 올렸다.
“네. 르 몽드의 산하 주간지입니다. 이번에 한국에서 난 기사를 인용했는데…….”
며칠 전 한국을 방문하긴 했지만 특별한 일은 없었다.
앙리 마르소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뭐라는데?”
“고훈과의 인터뷰에서 언급되었습니다. 작가님이 그의 그림을 왜 샀을 것 같냐는 질문입니다.”
“후.”
앙리 마르소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앙리 마르소는 얼마 전 한국에서 만난 <해바라기>를 떠올리며 미소 지었다.
황금을 녹여 바른 듯한 눈부신 노란색에 앙리 마르소는 마치 자신을 만난 듯했다.
그 고귀한 빛이야말로 자신에게 어울렸다.
“아량을 베풀었지.”
그러나 결코 200만 유로를 줄 상황은 아니었다.
신인은 꿈도 못 꿀 거액.
적어도 한 국가 단위에서 명성을 떨치는 화가여야 욕심이나 낼 수 있는 금액이었다.
어디까지나 자신에게 어울리는 그림을 그린 기특한 꼬맹이에게 앞으로도 분발하라는 의미로 값을 치른 것이었다.
“그래서?”
물어보긴 했지만 감사하다는 말을 온갖 미사여구를 붙여 대신했을 것이 뻔했다.
“첫눈에 반해서랍니다.”
앙리 마르소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작가님께서 해바라기에 반해서 살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했습니다.”
앙리 마르소가 몸을 일으켜 아르센이 들고 있던 태블릿을 빼앗았다.
“하.”
앙리 마르소는 기가 찼다.
<해바라기>를 팔 때도 그랬지만 여간 영악한 녀석이 아니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어린애.
고작 열 살 먹은 꼬마의 철없는 말에 대응할 정도로 한가롭지 않았다.
“그런데…….”
아르센이 말끝을 흐렸다.
“왜?”
“후속 기사가 마음에 걸립니다. 직접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신경질적으로 다음 기사를 찾은 그가 눈매를 좁혔다.
[앙리 마르소의 진심은?]
<해바라기>의 작가 고훈은 최근 자국 언론을 통해 앙리 마르소가 자신의 그림에 반했다고 주장했다.
평단의 반응에 따르면 강렬한 노란색을 사용한 <해바라기>는 지금껏 앙리 마르소가 추구했던 황금색 화풍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고 한다.
일각에서는 고훈의 순수한 색 활용법이 앙리 마르소의 자아도취적 심상보다 매력적이라는 평을 내면서, 어쩌면 앙리 마르소가 자신에게는 없는 순수함을 갈구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
앙리 마르소의 입술이 씰룩였다.
“뭐가 어쩌고 저째?”
감히 자신을 열 살 꼬마와 비교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보다 못하다는 논조의 기사였다.
‘일각의 의견’이 정말인지도 의심스러웠다. 출처가 없는 것으로 보아 향후 문제의 소지가 될 것을 고려한 장치 같았다.
평소라면 버러지의 헛소리로 무시했겠지만 이어지는 댓글에 앙리 마르소의 이성이 끊어졌다.
└앙리 마르소 그림이 예쁘긴 한데 깊이가 부족한 건 팩트지.
└200만 유로나 준 이유가 있었네. 질툰가?
└더 멋진 거 아냐? 자신보다 나은 그림을 산 거잖아. 공개적으로.
└딸리는 거 인정하는 자세는 멋있다.
└<해바라기>는 진짜 직접 보고 싶더라. 전시회 같은 데 안 나오나?
└ㅋㅋㅋㅋ앙리가 자기 작품보다 나은 걸 보여줄 리 없지.
└에이. <해바라기>가 멋지긴 해도 앙리 마르소가 열 살 아이한테 질투할 수준은 아니지.
└그건 모르지 ㅋㅋㅋ
르 몽드 뵈브메리라는 들어보지도 못한 삼류 언론에서 써낸 자극적인 기사를 사람들이 진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거 정리해서 숌즈에게 넘겨. 다 고소해. 형사, 민사 가리지 말고!”
앙리 마르소의 지시에 아르센이 마르소 가문의 전속 변호사 숌즈에게 전달할 이야기를 메모했다.
그러고도 앙리 마르소의 분은 풀리지 않았다.
‘감히.’
고훈이 곧 두각을 드러낼 인재란 사실은 인정하나 이번 일은 별개였다.
자신과 고훈의 차이를 명백히 가려야만 속이 풀릴 듯싶었다.
“고훈 어디 있어.”
“기사 내용을 보면 암스테르담에 있는 것 같습니다.”
“거긴 왜?”
“반 고흐 미술관에서 도슨트를 하는 모양입니다.”
앙리 마르소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평론가와 해설가를 화가와 관람객 사이에서 기생하는 존재로 여기는 그로서는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이 가능성을 인정해 준 화가가 그런 짓이나 하고 있으니 참을 수 없었다.
“그림 안 그리고 무슨 짓이야? 그렇게 한가해?”
앙리 마르소의 말에 아르센이 입을 열었다.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개인전? 그 꼬맹이가?”
“그럴 계획이라고 합니다.”
잠시 고민하던 앙리 마르소가 피식 웃었다.
“일주일 연기하기로 한 전시회. 잠깐 중단해.”
“예?”
“격의 차이를 보여줘야지.”
꼬맹이가 불쌍하긴 하지만.
앙리 마르소는 자신이 어떤 예술을 하는지 대중에게 확실히 보여줄 생각이었다.
“르블랑한테 전화 걸어.”
아르센이 르 피가로의 편집장 모리스 르블랑에게 전화를 걸고 앙리 마르소에게 넘겼다.
-오, 마르소. 무슨 일인가?
“기사 하나 부탁하려고.”
-음?
“오늘 기사 보는데 재밌는 말이 있더라고. 이 앙리 마르소가 열 살 꼬맹이보다 못한다느니 질투한다느니.”
-하하하. 뭘 그런 걸 가지고. 그게 아니라는 건 자네가 제일 잘 알지 않나.
“단 한 사람이라도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되지.”
-흠. 그래, 뭘 적으면 되겠나?
“내가 내 개인전에 고훈을 초대한단 내용이면 돼.”
-음? 어린애에게 너무 가혹한 거 아닌가. 나란히 두고 보면 차이가 확연할 텐데. 도리어 자네 이미지가 나빠질 수도 있어.
“무슨 말이야? 어디까지나 전도유망한 후배를 후원하는 일인데. 내 갤러리에 전시하는 게 쉬운 줄 알아?”
앙리 마르소의 의도를 알아챈 모리스 르블랑이 잠시 고민했다.
르 피가로에게 큰 광고를 여러 번 준 앙리 마르소의 요청을 마냥 거절할 수도 없었다.
더욱이 앙리 마르소가 말한 것처럼 유망한 화가를 조명하기 위한 초대란 명분이 있다면 비난도 어느 정도 피해갈 수도 있을 터였다.
-알았네. 준비해 놓지.
앙리 마르소가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다음 날.
일간지 르 피가로에 실린 기사로 미술계가 발칵 뒤집혔다.
[앙리 마르소, “고훈, 내 갤러리에 그림 걸어라.”]
현재 가장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미술가 앙리 마르소가 고훈과 함께 전시회를 열길 바란다는 소식이었다.
바로 전날까지 앙리 마르소와 고훈을 비교하는 글이 속속들이 올라온 탓도 있었지만.
자신 외 미술가에게 엄격한 앙리 마르소가 고작 열 살 아이와 전시회를 함께하길 바란단 소식은 충격이었다.
미술계도 크게 호응했다.
└앙리가 고훈을 진짜 높이 평가하는 듯. 마르소 갤러리에 다른 작가 작품 전시된 적 있었나?
└ㄴㄴ 없었음.
└이거 비교당하니까 여론 바꾸려고 하는 짓 아님? ㅋㅋㅋ
└어제 난 기사 대응을 이렇게 빨리 한다고? 첨부터 같이할 생각이었다고 봐야지.
└ㅋㅋㅋㅋㅋ재밌긴 하겠다. 현재 가장 인기 있는 작가랑 주목받는 신예 콜라보면.
└아 진짜 그림 그리는 입장에서 개부럽다. 앙리 마르소가 그림 사 주고 전시회 같이하자고 한 것만으로 이렇게 유명해지는데.
└이건 가고 싶은데.
└고훈이 누구?
└고수열 손자.
└고수열 경? 한국?
└ㅇㅇ.
전시회를 가질 때마다 큰 화제를 일으킨 앙리 마르소와 그가 구입한 <해바라기>로 유럽 내 인지도를 쌓기 시작한 고훈.
두 사람의 합동 전시회에 대한 기대감은 클 수밖에 없었다.
포털 사이트 프랑스 야호의 ‘오늘의 트렌드’는 앙리 마르소, 고훈과 관련한 단어로 가득했고 저녁이 될 즈음에는 일간지 르 피가로의 기사가 메인 배너에 걸리기까지 했다.
앙리 마르소와 고훈의 합동 전시회가 언제 열리는지 알고 싶은 사람들은 후속 기사를 기다렸으며.
기자들은 그러한 여론 반응에 발 빠르게 대응했다.
* * *
미술관을 찾은 사람들의 표정이 너무 좋아서 오늘은 그들을 그려보고자 한다.
반 고흐 미술관 앞에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다.
개관 시각이 가까워지면 제법 길게 줄을 서지만 오늘은 평소보다도 더 많다.
“오늘 무슨 날이에요?”
“글쎄다. 기자들 같은데.”
할아버지도 모르는 일인 듯.
의아해하며 입구로 향하니 모여 있던 사람들이 큰 소리를 내고 달려들었다.
“고수열이다!”
깜짝 놀라 나도 할아버지도 주춤거렸다.
카메라와 마이크를 들이대는데, 어찌나 많은지 도망갈 곳도 없다.
“고수열 경, 앙리 마르소가 손자분에게 제안한 합동 전시회를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언제로 예정하고 있습니까?”
“어떤 콘셉트입니까? 고훈은 무슨 역할을 맡습니까? 어떤 작품을 걸죠?”
“이번에도 해바라기입니까?”
이들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
앙리 마르소와 합동 전시회라니.
들어본 적 없다.
“자, 다들 진정하시고. 아이도 있으니 거리를 지켜주세요.”
할아버지가 헛기침하고 정중히 말하자 기자들이 조금 물러섰다.
“훈아, 앙리 마르소랑 전시회 하기로 했어?”
“아니요.”
“어제 앙리 마르소가 함께 전시회를 열길 바란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아직 전달 못 받으셨나요?”
한 기자가 태블릿을 보여주었다.
나보고 자기 전시회에 그림을 걸라는 말이다.
이런 이야기를 왜 직접 하지 않고 신문을 통해서 하는지 모를 일이다.
‘화제 만들기 위한 건가.’
그런 이유라면 그가 왜 인기 있는 화가인지 이해할 수 있다.
어떤 일이라도 이렇게 크게 키우면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으니까.
“이번에는 어떤 작품을 걸 생각이신가요?”
“앙리 마르소와의 친분은 어떻게 생겼습니까? 앞으로도 계속 함께 활동하실 계획이시죠?”
기자들이 모두 앙리 마르소와의 전시회를 상정하고 질문한다.
“안 해요.”
시끄럽던 주변이 갑자기 조용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