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23화 (23/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23화

6. 태양의 화가(5)

이 얼마나 가슴 떨리는 말인가.

농부의 식탁에 작은 희망을 놓고 싶었던 내게 이보다 과분한 말은 또 없을 것이다.

“다음 작품 보러 가시죠.”

케빈의 안내를 따라 방을 옮기니 방 한가운데를 가로막은 기둥에 <감자 먹는 사람들>이 걸려 있다.1)

“빈센트 반 고흐의 초기 작품 중에서도 그가 무엇을 그리고 싶었는지 가장 잘 드러난 그림입니다.”

<감자 먹는 사람들>을 보는 케빈 씨의 눈이 따뜻하다.

“농부 가족이 등불 하나에 의지해서 저녁을 먹고 있죠. 그림자가 짙고 전체적으로 어둡습니다. 사람들의 손과 얼굴을 통해 그들의 삶이 얼마나 각박한지 알 수 있죠.”

지금 보면 참 못 그린 그림이다.

하지만 케빈 씨의 말대로 무엇을 그리고 싶은지 깨닫고 그린 첫 번째 그림이라 애착이 가는 작품이다.

“하지만 고개 숙인 남자와 그를 걱정스레 바라보는 여자. 차를 따르는 모습이 그들의 가혹한 삶만 보여주는 건 아닙니다. 도리어.”

“서로를 보듬으며 살아가는 모습을 그리고 싶었죠.”

내 말에 케빈 씨가 잠시 멈칫하더니 빙그레 웃었다.

“그렇습니다. 가족의 숭고함이 잘 드러나 있죠. 반 고흐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시네요. 좋아하시나요?”

좋아하지 않는다.

마을에선 미친놈으로 취급받고.

많은 사람에게 아쉬운 말을 꺼냈으며 끝내 마지막 지지자였던 동생 테오에게도 슬픔만 남기고 말았다.

실패에 실패를 거듭한.

그런 나를 좋아할 수 있을 리 없다.

그저 나와 내 그림을 높이 평가하는 케빈 씨에게 위안을 얻을 뿐이다.

“그렇게 오고 싶어 했으면서 왜 풀이 죽었어?”

할아버지의 말에 씁쓸히 웃을 수밖에 없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에서 내리자 키 작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노란 집>이 눈에 들어왔다.2)

프랑스 남부의 작은 마을 아를.

내 인생에서 가장 아늑하고 행복한 시절을 보냈던 아를을 보니 그때 겪었던 일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쪽빛 하늘과 노란 집, 그 사이의 녹색이 절묘하죠. 반 고흐는 이런 식의 색 배치를 즐겨 했습니다.”

케빈 씨가 설명을 시작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무너진 바람에 지금은 이렇게 그림으로만 찾을 수 있죠.”

대체 무슨 일이 있었으면 세계 대전이라는 거창한 이름이 붙은 걸까.

제2차라고 하니 그런 일이 두 번이나 있었던 듯.

그럼에도 이렇게 눈부신 성장을 이뤘으니 인간이란 참으로 알 수 없는 존재다.

‘다시 한번 가보고 싶었는데.’

여름 낮은 밭마다 황금이 넘실거리고 겨울밤 하늘은 군청색 드레스가 춤추듯 일렁이던 그곳.

집 앞 카페에서 시끄럽게 술 마시던 이들마저 그립다.

“아를은 빈센트 반 고흐에게 있어 새로운 시작을 상징하는 곳이었습니다. 파리에서의 생활에 염증을 느낀 그는 아를의 자연을 그리며 점차 자신만의 화풍을 만들어 갔죠.”

케빈 씨의 말대로 당시 파리는 속물들로 가득했다.

거리는 똥과 쥐로 가득했고 사람들은 코가 삐뚤어질 것처럼 향수를 뿌려댔다.

씻지 않아 생기는 악취를 감추려고 하니, 진한 향수 냄새와 함께 구역질이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그 어떤 곳이라도 테오와 함께라면 좋았다.

“파리에서의 생활이 전부 나쁜 건 아니었어요.”

“왜 그렇게 생각해?”

할아버지의 질문에 고개를 들자 케빈 씨도 흥미롭단 표정을 짓고 있다.

“……테오와 함께 있었으니까요.”

“확실히 형제 사이가 각별했죠.”

케빈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140년도 전에 있던 일이라, 나에 대해 잘 아는 케빈 씨도 파리에서의 생활은 잘 모르는 듯하다.

이렇게 크고 아름답게 꾸몄음에도 단 한 명의 관람객도 없는 미술관을 지켜주는 그를 위해 입을 열었다.

“빈센트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은 많지 않았어요. 테오는 그런 형의 말을 가장 잘 들어주었죠.”

“음.”

“예술가의 마음을 성찰한다든가 위대한 스승 장 프랑수아 밀레마저 괄시하는 당시 미술계를 비판하곤 했죠. 정말 진지했어요.”

장 프랑수아 밀레는 당시에 주목받지 못한 평범한 사람들을 그렸다.

<이삭 줍는 여인들>이나 <만종>과 같은 걸작을 만들었음에도 초기에는 조롱 섞인 비난을 받았다.

“그랬구나.”

내 머리를 쓰다듬는 할아버지의 손이 위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음. 확실히 그런 내용이 반 고흐의 편지에 남아 있긴 하죠. 하지만 테오도르도 직장 생활을 하느라 바쁘지 않았을까 싶은데. 그럴 시간이 있었을까요?”

나를 잘 알고 있는 케빈 씨답게 정확한 지적이다.

“맞아요. 워낙 바빠서 밤늦게 들어왔거든요. 어쩔 수 없이 늦은 새벽까지 이야기했죠. 그렇게 각별했어요.”3)

늦은 밤, 하늘이 푸르스름해질 때까지 테오와 예술을 말하던 그때가 그립다.

“만약 그랬다면 테오가 형을 아를로 보낸 게 이해가 되는구나.”

할아버지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그렇잖으냐. 밖에서 힘들게 일하고 왔는데 쉬지도 못하고 형에게 붙잡혀 이야기를 들었으면 꽤 괴로웠을 테지.”

“…….”

“확실히 그럴 가능성도 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에게 아를로 가서 지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한 사람은 동생 테오도르니까요.”

“……아니에요. 파리 집세가 너무 비싸서.”

“같이 살지 않았나? 집세가 부담되진 않았을 텐데.”

“……제수씨, 아니, 요한나도 있고 테오의 사생활도 있으니까.”

“그렇지. 그거구나. 테오가 형을 보내고 싶었던 거야.”

“화가로 활동하기엔 파리가 더 좋은 환경이었죠. 빈센트 반 고흐의 건강 문제와 함께 테오 본인도 힘들었다는 복합적인 이유로 설명하는 게 설득력 있겠습니다.”

할아버지와 케빈 씨가 내 아련하고 소중한 추억을 객관화한다.

“이 녀석, 그림만 그리는 줄 알았더니 공부도 많이 했구나.”

“설명할 이야기가 좀 더 풍부해졌네요. 좋은 추론이었습니다.”

할아버지의 칭찬과 케빈 씨의 밝은 미소가 서글프다.

나를 기념하기 위한 미술관이라고 해서 한 번쯤 꼭 와보고 싶었는데 상처만 생기는 것 같다.

‘사람도 없고.’

이른 아침이라고는 해도 사람이 너무 없다.

나와 할아버지 그리고 안내해 주는 케빈 씨까지 세 명을 제외하곤 이 넓은 장소에 아무도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이렇게나 좋은 미술관을 만들어줬는데.’

몇몇 소수에게나마 좋은 평가를 받는 것도 내겐 과분한 일이나.

역시 대중이 좋아해 주지 않으면 이 넓고 반듯한 미술관도 의미가 없다.

그저 민망할 뿐.

“다음 그림 보러 가시죠.”

케빈 씨를 따라 발을 옮겼다.

<노란 집>이 걸린 벽을 돌아서니, 유리관 안에 몹시 기분 나쁜 그림이 보관되어 있다.

폴 고갱이 그린 <해바라기를 그리는 빈센트 반 고흐>다.4)

내 미술관에 저런 그림을 전시해 두다니.

이보다 모욕적일 수 없다.

“이 그림은 폴 고갱이 그린 빈센트 반 고흐입니다. 1층에서 본 인상과는 많이 다르죠?”

몹시 불쾌하여 화를 억누르고 있으니 케빈 씨가 설명을 덧붙였다.

“가끔 반 고흐의 자화상보다 고갱의 반 고흐 초상화가 더 사실적이지 않냐는 질문을 받습니다. 타인이 보는 시선이 더 객관적일 수 있으니까요.”

“…….”

“하지만 고갱의 그림은 사실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자의적 해석이 강하죠. 한 사람의 화가가 마땅히 갖춰야 할 덕목이지만 타인을 하찮게 여기는 그의 성격이 문제였죠.”

정확히 알고 있다.

케빈 씨마저 사실을 몰랐다면 이 분한 마음을 어쩌지 못했을 것이다.

“반 고흐는 이 그림을 보고 정말 크게 화를 냈습니다.”

지금도 내고 있다.

“고갱과는 전부터 서로 지향하는 바가 달라 언쟁을 잦았지만, 이 그림으로 인해 갈등이 본격화되었죠. 해바라기는 반 고흐의 상징과도 같은데, 그것을 그리는 반 고흐를 이렇게 무기력하고 보잘것없이 표현했으니까요.”

폴 고갱 그 친구의 잘못을 정확히 지적했다.

“두 사람 모두 미술사에 없어선 안 될 천재지만 끝까지 호의적이었던 반 고흐와 달리 고갱은 좋은 친구가 아니었단다.”

할아버지가 작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특히 폴 고갱은 인간으로선 최악이었어. 아주 쓰레기였지.”

“하하.”

케빈 씨가 할아버지의 말에 난감하다는 듯, 조금은 동감한다는 듯 웃었다.

“아내에게 성공해서 돌아온다고 해놓고 타히티에서 미성년자랑 결혼했지. 그러곤 평생 안 돌아갔어. 그게 말이나 되는 일이야?”

“그리 매력적인 인물은 아니었죠. 성공한 다른 화가에게 열등감을 느껴 비방하고 다니니 동료 화가들에게도 기피되었습니다.”

아를을 떠난 뒤에도 가끔 편지를 주고받긴 했으나.

내가 죽은 뒤에도 그렇게 살았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그뿐인가. 프랑스에서 파견한 공식 화가라며 타히티 사람들을 속이고 생활비를 얻어냈지. 허세와 가식으로 가득한 아주 쓰레기야.”

한때 그를 멋진 남자라고 생각했던 것이 후회된다.

‘빈센트, 난 너 같은 패배자와 이딴 시골에서 썩을 생각 없어.’

그가 아를을 떠나기 전 했던 말이 저주처럼 잊히지 않는다.

“그러니 훈아, 넌 반 고흐처럼 저런 쓰레기를 친구로 두면 안 된다. 사람 보는 눈을 키워야 해.”

진심으로 대하면 언젠가는 반드시 통할 거라는 믿음이 어쩌면 틀릴지도 모르겠다.

아를에서 내 귀를 잘라냈음에도.

그가 작품활동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사실을 숨겨주었던 내 마음은 대체 어디로 갔는지.5)

그토록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거짓으로 가득한 삶을 살았던 오랜 벗이 원망스럽다.

‘대체 왜 그랬나.’

이렇게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밝혀질 얕은 거짓말에 기댈 정도로 내몰렸던 건가.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이유라도 있었는지 묻고 싶다.

기분이 좋지 않다.

“다음 작품 보러 가시죠.”

케빈 씨가 다음 그림을 보러 가자고 권했지만 내키지 않는다.

아무리 좋은 말을 들어도 그리 마음에 와닿지 않는다.

안 좋은 기억만 떠오를 뿐.

결국 남는 건 이 텅 빈 공간이지 않은가.

케빈 씨가 나의 억울함을 상세히 설명해 주고, 내 그림을 좋게 말해 준다 한들 찾는 사람이 없으면 아무 소용 없다.

“왜. 어디 안 좋아?”

할아버지가 걱정스레 물었다.

“이렇게 넓은 곳에 우리밖에 없네요.”

“그렇지. 그러고 보니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구나.”

“네. 곧 있으면 개관하니 천천히 감상하긴 어려우실 겁니다.”

무슨 말이지?

“곧 있으면 개관한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본래 개관 시각은 아홉 시입니다. 오늘은 고수열 경께서 특별히 요청하셔서 한 시간 일찍 모셨고요.”

할아버지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정말이에요?”

“크흠. 내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할아버지가 훈이 위해서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어떠냐. 할아버지 멋지지?”

감사한데 하나도 안 감사하다.

전문가의 말도 좋지만 평범한 사람이 내 그림을 어떤 표정으로 보는지 보고 싶었다.

“그럼 평소에는 사람이 얼마나 찾아와요?”

“평균적으로 따지면 하루에 5,000명 이상 찾고 있습니다. 연간 200만 명이 빈센트 반 고흐를 만나러 오고 있죠.”

케빈 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바로 아래 1층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의아해하며 계단 아래로 고개를 내미니 수십 명이 보이고 그 뒤에도 사람들이 줄지어 들어오고 있다.

“…….”

이 마음을 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감정이 벅차올라 움직일 수 없다.

“나 이거 알아. 임파스토란 거야.”

“해바라기는 몇 층에 있대?”

“와, 이거 봐. 그림이 울렁거리는 것 같아.”

얼마 지나지 않아 2층도 사람들로 가득 차버렸고, 내 그림을 구경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을 지켜보는 일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키가 작아서 그들이 무슨 그림을 보고 있는지도 알 수 없지만.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어떤 표정을 짓는지.

그것을 관찰하다 보니 눈물이 차올랐다.

할아버지가 슬며시 입을 열었다.

“훈아.”

고개를 돌리자 할아버지가 엄지로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이 녀석아, 울긴 왜 울어?”

황급히 소매로 눈물을 닦아내며 진정하려는데 케빈 씨가 입을 열었다.

“저도 가끔 이곳에 있으면 울컥하곤 합니다. 특히나 저 해바라기를 보는 사람들을 보면 말이죠.”

<해바라기> 앞에 사람들이 입을 막고 있다든가 고개를 내밀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반 고흐는 농부에게 은혜와 용기를 주고 싶었습니다. 밀이 자랄 수 있도록 햇살을 비추는 태양처럼요. 그런 자신을 투영한 해바라기 정물화는 빈센트 반 고흐의 자화상이나 다름없습니다.”

용기.

“그런 이유 때문인지 반 고흐 이후 해바라기를 그리는 유행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키르히너처럼요.”

유행.

“미술사에서는 반 고흐를 후기 인상주의 혹은 탈인상주의로 분류하기도 하지만 저는 그런 분류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는 이미 하나의 상징이자 장르입니다.”

사랑도 가족도.

그림과 삶마저 포기해야 했던 패배자에게 가당키나 한 말인가.

주제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젓는데 케빈 씨가 기어이 날 울리고 말았다.

“이름 그대로 이겨낸 거죠. 그를 속박하던 모든 장애로부터요.”

“끄으읍으.”

“빈센트란 이름은 승리한 사람이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유래되었단다.”

할아버지의 말에 간신히 참아내던 한이 설움이.

결국 터져 나오고 말았다.

* * *

1)감자 먹는 사람들, 빈센트 반 고흐, 캔버스에 유채 물감, 1885

2)노란 집, 빈센트 반 고흐, 캔버스에 유채 물감, 1888

3)빈센트 반 고흐는 인기 없는 전도사였다고 한다.

화가가 되기 전 반 고흐는 인부들을 상대로 설교를 하곤 했는데, 노동에 지친 그들에게 반 고흐의 두세 시간에 걸친 장황한 설교는 너무나 괴로운 시간이었다고.

4)해바라기를 그리는 빈센트 반 고흐, 폴 고갱, 캔버스에 유채 물감, 1888

5)빈센트 반 고흐의 귀에 관련한 이야기는 여러 설이 존재한다.

<다시 태어난 반 고흐>에서는 여러 설 중 고갱이 반 고흐의 귀를 잘랐다는 추측을 기반으로 작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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