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1화
6. 태양의 화가(3)
반 고흐 미술관을 찾기 위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향한다.
할아버지와 함께 공항이라는 곳에 왔는데 배는커녕 바다도 안 보인다.
“배는 어디 있어요?”
“배?”
할아버지가 눈썹을 좁히며 고개를 갸웃했다.
배로 가는 게 아닌 모양이다.
“차로 가요?”
다시 생각해 보니 배가 아무리 빨라졌어도 자동차만큼 빠르진 않을 것 같다.
“비행기로 가야지.”
비행기가 뭐지.
무슨 말씀인지 이해할 수 없으니 할아버지가 ‘에어플레인’이라고 하셨다.
공기와 면의 합성어 같기는 한데 도통 이해할 수 없다.
“아무튼 훈아, 유럽에 있을 때 그 목걸이 꼭 가지고 있어야 한다. 절대로 잃어버리면 안 돼.”
할아버지가 장미래가 만들어 준 목걸이를 잃어버리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셨다.
나와 할아버지의 이름과 전화번호, 한국 주소가 각 나라 언어로 적힌 목걸이다.
‘창피한데.’
네덜란드에서 길을 잃다니.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설사 길을 잃더라도 말은 통할 테니 걱정하실 필요 없는데 말이다.
“자, 가자.”
기나긴 통로를 가로지르던 중 유리창 밖으로 엄청나게 큰 자동차들이 눈에 들어온다.
지금까지 본 자동차와는 생김새가 무척 다르다.
양옆에 날개 같은 것이 돋쳐 있고 바퀴도 작은 걸 보면 그리 효율적이진 않을 것 같다.
‘중심을 잡으려고 했나?’
앞뒤로 길쭉하고 높이도 상당하니 확실히 날개가 있어야 균형이 잡힐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타기 위한다면 버스라는 자동차를 이용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지 않을까 싶다.
‘아.’
하지만 막상 안으로 들어오니 이 비효율적인 자동차에 타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지금 몸이 작긴 하지만 다리를 쭉 뻗고 눕고도 공간이 한참 남는다. 넓고 커튼을 치면 시야를 가릴 수도 있다.
심지어 정면에 태블릿이 붙어 있으니 오랜 여정의 심심함을 조금은 달랠 수 있겠다.
이 거대한 자동차는 분명 돈 많은 이를 위한 사치품일 터.
이 넓은 방에 사람도 나와 할아버지 그리고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뿐이다.
할아버지 덕분에 이런 호사를 누려본다.
“할아버진 잘 건데. 훈이도 좀 자는 게 어떠냐.”
“전 이거 읽을래요.”
할아버지가 준 암스테르담 관광 가이드 책을 보고 싶다. 몇 주 뒤엔 눈으로 직접 구경할 수 있겠지만 어떻게 바뀌었는지 미리 좀 알아보고 싶다.
“그래. 오래 걸리니까 적당히 보다가 졸리면 자고.”
“네.”
아침 일찍 일어나셔서 피곤하신 모양. 숨소리가 금방 고요해졌다.
‘어디.’
책을 펼쳐 가장 먼저 확인한 건 관광 명소로 소개된 반 고흐 미술관.
세계에서 나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을 가장 많이 보유한 미술관이라고 한다.
사실 이렇게 책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다.
스스로 만족할 만큼 성장하지도 못했고, 이제 좀 괜찮은 그림을 그려갈 즈음 찾아온 마비와 발작 때문에 결국엔 끝을 볼 수밖에 없었다.
그때까지 팔아 본 그림이라곤 <붉은 포도밭>과 소품 몇 점.
테오나 로트렉처럼 응원해 주는 사람은 몇 있었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작은 촌구석의 무명 화가일 뿐이었다.
그런 나를 위한 미술관이라니.
믿을 수 없다.
「반 고흐 미술관은 <까마귀가 나는 밀밭>, <해바라기>와 같은 반 고흐의 대표작은 물론, 그가 남긴 200여 점의 유화와 500여 점의 소묘, 그의 편지, 수집품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동시대에 살았던 여러 화가의 작품이 함께 전시되고 있습니다.」
화가로 살기로 마음먹고 10년간 900점 정도 그렸던 것 같다.
자살하기 직전에는 점차 몸이 굳어오는 게 느껴져서 하루에 한 점씩 그리는 날이 이어지기도 했다.
조급했으니까.
조금이라도 더 많이 그리고 싶었으니까.
“…….”
그때의 간절함을 알아준 사람이 있었던 걸까.
지금은 의문으로 가득하나 반 고흐 미술관에 도착하면 그곳의 비밀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나저나.’
대체 내 편지는 왜 모아둔 건지 모를 일이다. 남에게 보이기 부끄러운 내용도 많은데 말이다.
‘……설마 그걸 다 읽는 사람이 있겠어.’
쓸데없는 걱정이다.
비행기란 자동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큰 자동차를 위해 대규모의 도로를 놓을 정도로 발전한 시대.
정말 많은 것이 달라진 만큼 그때의 나도 달리 받아들여지고 있을까.
그럴 리 없다고 의심하면서도 작은 기대를 걸어보게 된다.
‘음?’
창문을 통해 보이는 풍경이 달라진다. 급격히 가속하더니 시야가 조금씩 높아진다.
“어?!”
맙소사.
아마 심장이 약했다면 이대로 멎었으리라.
자동차가 땅에서 자꾸만 멀어진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다급한 마음에 왼손을 휘둘러 할아버지를 깨웠다.
“므허?”
“잘 때가 아니에요! 떴어요! 떴다고요!”
할아버지가 이 위급한 상황도 모르고 세상 편안히 눈을 비볐다. 창밖을 확인하더니 허허하고 웃는다.
“그래. 떴구나.”
그러곤 다시 잠을 청한다.
이 심각한 상황에 태평한 것도 정도가 있지.
“할아버지!”
“그래. 그래. 신나지?”
다시 깨우려 했으나 할아버지는 눈도 뜨지 않는다.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창밖을 보니 어느새 지면과 너무나도 멀리 떨어졌다.
이렇게 두려웠던 적이 또 있었을까.
더는 아래를 볼 수 없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다.
“…….”
그래도 이런 풍경은 생전 처음 보는데.
오금이 저리지만 상공에서 바라본 지면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서 참을 수 없다.
스케치북과 색연필을 꺼냈다.
몹시 흔들리는 탓에 제대로 그릴 수가 없다.
* * *
한숨 푹 자고 일어난 고수열은 손을 들어 승무원에게 물을 요청했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비행기를 타서 신난 손자가 무얼 하고 있나 고개를 돌렸다.
고훈은 잔뜩 움츠린 채 무엇을 서둘러 그리다가 창밖을 힐끔 내다보길 반복하고 있었다.
“뭐 하고 있어?”
고수열이 고훈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그러자 고훈이 표독스러운 얼굴로 돌아보았다.
“우리 훈이가 왜 이렇게 씅이 났을까?”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아, 이 두려운 상황을 홀로 버텨내야 했던 고훈을 편히 잠들었던 고수열이 이해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고훈이 자기가 그린 스케치를 보여주었다.
“하늘에서 보는 풍경은 처음이라서 그려봤어요. 상상만 해봤지 직접 보는 건 처음인데 바다가 이렇게 넓은 거 아셨어요?”
두세 시간 정도 잠든 것 같은데 그 짧은 시간에 여덟 장이나 되는 스케치를 그린 손자에게 놀랐다.
“많이도 그렸다.”
고훈이 다시 창밖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저렇게 무서워하면서 그동안 해외여행은 어떻게 다녔는지 모를 일이었다.
‘……하긴. 기억이 없으니.’
고수열은 기억이 온전치 못한 손자를 안타깝게 여기며 머리를 쓸어내렸다.
‘그나저나 출출한데.’
마침 물을 가지고 온 승무원이 식사 메뉴를 물었다.
“훈아, 밥 뭐 먹을래.”
“밥이요?”
뭐가 그리도 신기한지 큰 눈을 깜빡거렸다.
“백숙이랑 해물찜 중에 고를 수 있어요.”
승무원의 안내에 고훈이 고민했다.
“백숙은 뭐고 해물찜은 뭐예요?”
“닭 삶은 게 백숙이고 해산물을 매콤하게 찐 게 해물찜이지.”
“그럼 백숙 먹을래요.”
매운 음식에 약한 손자가 백숙을 골랐다.
“백숙으로 둘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승무원이 자리를 피하자 고훈이 물었다.
“밥도 줘요?”
“그럼. 가는 내내 굶을 순 없잖으냐.”
고훈이 고개를 끄덕이곤 또다시 물었다. 고수열은 호기심이 많은 손자가 그저 귀여울 뿐이었다.
“그럼 도착할 때까지 먹을 걸 다 가지고 출발한 거예요?”
“그렇지.”
“그래서 이렇게 크구나.”
또 나름대로 상황을 이해한 손자가 스케치북과 색연필을 정리했다.
“밥 먹고 좀 자. 앞으로 여덟아홉 시간 정도 걸리니.”
고훈이 눈을 깜빡였다.
“여덟아홉 시간이요?”
“너무 오래 걸리지?”
고수열은 이 좁은 공간에 반나절을 꼬박 있으려니 어린 손자가 답답할 만도 하다고 생각했다.
“한 달이 아니고요?”
“한 달이라니?”
“암스테르담 가는 거 아니었어요? 지구 반대편.”
“그래.”
“……이렇게 느린데 어떻게 그렇게 빨리 도착해요?”
고훈이 창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허허. 그건 너무 멀리 떨어져서 느려 보이는 거야. 너 60㎞/h로만 달려도 빠르다고 천천히 가라고 하지 않았느냐.”
“지금은 얼마나 빠른데요?”
고수열이 맞은편 스크린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적혀 있지 않으냐.”
그라운드 스피드 900㎞/h라고 적혀 있었다.
고훈이 고개를 갸웃하고 스크린을 의심스럽게 쳐다보았다. 자동차 속도에도 기겁하는 그가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고수열은 피식 웃곤 얼굴을 쓸었다.
* * *
대한일보 취재센터 사무실에 긴장감이 흘렀다.
일주일 전, 세계적인 화가 앙리 마르소가 열 살 소년의 그림을 200만 유로에 구입한 일 때문이었다.
대한일보도 다른 언론사와 같이 대대적으로 보도했으나, 그 기사에 문제가 있었다.
김준용 편집장이 선임 기자들을 불러놓고 조용히 타일렀다.
“어떻게 된 거야? 내가 고훈 인터뷰 따오라고 했잖아.”
김준용 편집장이 안경을 벗곤 얼굴을 쓸었다.
누구도 대답하지 않자 그가 연예취재부 최고 선임 이인호 기자를 지목했다.
“이인호. 설명해.”
“그게, 요청은 했는데 고수열 화백이 거절해서…….”
“그래서 예환지 뭔지 하는 월간지도 딴 인터뷰를 못 했단 말이야? 그걸로도 모자라 고대로 베껴다 쓰고?”
김준용 편집장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게. 저희 말고도…….”
“그걸 말이라고 해? 너 제정신이야? 편집장이 직접 지시한 일을 보고도 없이 베껴서 처리해?”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다야? 죄송하면 기사가 떨어져? 대한일보 저 새끼들 기레기 버릇 못 고쳤단 댓글이 없어져? 어떻게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고대로 가져다 쓰냐고! 너 미쳤어!”
김준용은 다그침에 아무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러니까 조회 수가 나와? 회사가 돈을 못 버는데 너희 월급 챙겨줄 수 있겠어?”
김준용이 숨을 크게 내쉬었다.
“이인호.”
“네.”
“마지막으로 기회 준다. 고훈 후속 기사 가져와. 전담하란 말이야. 알아들어?”
“저.”
“뭐.”
“미술은 전혀 모르는데…….”
“네가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그치? 넌 문예부 아니야?”
“…….”
“그만두고 싶어? 여기에 뭐 미대 나온 사람이라도 있어? 너라도 나서서 해야 할 것 아냐!”
이인호 기자는 다른 일로도 빠듯하다고 하소연하고 싶었으나 김준용 편집장과 눈을 마주하니 저항할 의지를 잃었다.
“고훈 걔 느낌이 와. 다른 데 뺏기지 말고 네가 케어하라고.”
“네. 알겠습니다.”
이인호가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김준용이 다른 기자들을 둘러보고 말했다.
“다들 잘 기억해. 제목만 그럴싸하게 써서 조회 수 뽑아먹던 시대 지났어.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기사를 쓰라고. 돈 받아먹고 다니고 싶으면!”
“네!”
“나가!”
김준용 편집장의 불호령에 기자들이 편집장실을 빠져나갔다.
‘하아.’
그들 사이에 치여서 나온 이인호는 그저 막막하기만 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