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0화
6. 태양의 화가(2)
할아버지의 생일을 축하하며 저녁을 먹었다.
“뭘 또 이런 걸.”
생일 선물로 초상화를 그리려 하는데 자꾸 거절하려 하신다.
“오래 안 걸려요.”
“그래요. 훈이 첫 초상화 모델이시잖아요?”
“크흠.”
내가 설득할 땐 괜찮다고 거절만 했으면서 장미래가 말하니 못 이기는 척 자세를 잡으셨다.
차분히 할아버지를 관찰했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보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내겐 정 많고 장난도 좋아하는 사람이다.
비록 두세 달뿐이었으나.
나는 비로소 가족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아버지에게 나는 그저 부끄러운 존재였다.
큰아버지도 심지어 누이동생도 나를 그저 귀찮고 쓸모없는 인간으로 대했다.
어머니께선 그저 안타까워하셨고.
오직 테오만이 내가 예술가의 영혼을 지녔다며 응원해 주었다.
그런 내게.
가족의 따뜻함을 가르쳐 준 사람.
내가 그린 그림을 누구보다도 깊이 이해하며, 가식 하나 없이 대해준다.
저 부리부리한 눈매가 나를 향할 때만큼은 그보다 애틋할 수 없다.
저 탄탄한 몸이 나를 안을 때만큼은 그렇게 포근할 수 없다.
그 사랑에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나는 이분이 나의 조부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색연필을 들었다.
할아버지도, 장미래도 형태는 정확히 잡아냈다.
파블로 피카소와 달리 다소간의 과장과 생략 없이 최대한 자세히 표현했다.
표현 방식에 차이가 있을 뿐 어느 쪽도 틀렸다고 할 순 없다.
도리어 양쪽 모두 정답이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뛰어나다.
피카소는 사물의 본질을 끌어내 단순히 표현하고 할아버지와 장미래는 현실에 없는 미학을 사실처럼 그린다.
다만 이렇게 다른 피카소와 두 사람 사이에도 공통점은 있다.
색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작품에 옷을 입힌다는 것.
특히 할아버지와 장미래의 색에 대한 이해도는 내 기대와 예상을 한참 벗어났다.1)
색이 가진 심상을 이들보다 명확하게 다루는 화가가 또 있을까.
‘후.’
다시 한번 자세히 관찰한다.
부리부리한 눈매와 그 주변을 이루는 세월의 흔적.
주름과 피부는 형태를 잡은 뒤에 신경 쓸 일이다.
‘따뜻하게.’
할아버지의 피부는 살짝 구릿빛이 감도는 건강한 색이지만 좀 더 따뜻하고 포근하게 표현하고 싶다.
밝은 복숭아색(라이트 피치)으로 바탕을 깔고.
그보다는 좀 더 뚜렷한 피치 베이지로 질감을 잡아나간다.
굴곡과 주름 깊은 곳의 그림자는 베이지와 복숭아색으로 덧입혀 전체적으로 밝은 분위기를 잡아갔다.
이마와 눈 아래의 어둠을 잡아가는데 주름이 짙다.
예순넷.
이분의 평생을 함께하진 않았지만.
나를 대하는 모습으로.
한참 어린 제자가 매일같이 찾아와 안부를 전하며, 그런 제자를 존대하는 모습만으로도 알 수 있다.
현관 앞에 잔뜩 쌓인 선물도.
작업실을 가득 채우고도 남는 수많은 작품도 이분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말해 준다.
주변은 사랑으로 대하고.
가슴 속 강인한 의지는 오직 화폭에 담았을 것이다.
화가 중에 이런 인격자가 또 있었나.
나는 이분을 실로 존경한다.
밝은 암갈색(라이트 엄버)으로 흔들림 없는 동공과 콧구멍 등 그림자의 경계를 만들었다.
그러다 이마에 손이 갔을 때.
잠시 망설였다.
검은 머리 사이마다 희끗희끗 드러난 흰 머리카락은 세월의 흔적일 뿐.
늙고 노쇠함을 말하지 않는다.
고수열이란 화가가 지켜온 가치와 그것이 얼마나 오래 뿌리내렸는지 알려줄 뿐이다.
암갈색에 이어 검게 칠하는 것보단 따듯하고 옅은 회색(웜 그레이)이 좋을 것 같다.
하얗고 따뜻하게 칠했다.
‘음.’
좀 더 어두운색으로 강조할 부분을 더해 느낌을 살리고, 전체적으로 색을 넣었다.
혈색이 도는 느낌을 주기 위해 옅은 붉은색을 볼과 코, 눈 주변에 넣으려다가 노란색과 푸른색 계통을 살짝 더하기도 했다.
‘밀도를 높여 사실적으로 보이게 하는 것도 좋겠지만.’
색연필의 질감을 살리는 쪽이 더 운치 있게 느껴진다.
조금 떨어져서 보니 제법 괜찮은 느낌으로 완성되었다.
장미래에게 자극받아 즉흥적으로 그린 것인데 아무래도 그녀만큼 사실적인 느낌은 부족하다.
하지만 이런 식의 표현도 가능하고 즐겁다는 걸 알았으니 앞으로 그림 그리는 행위가 더욱 즐거울 것이다.
지금은 이 강인하면서도 상냥한 할아버지에 만족한다.
“다 됐어요.”
그림을 들고 할아버지에게 다가가니 그렇게 거절하셨으면서 반가워하신다.
“어디 보자.”
그림 그리는 내내 곁에서 태블릿을 만지고 있던 장미래도 다가왔다.
“…….”
“큽.”
그동안 익힌 색연필로 나름대로 새로운 시도를 한 초상화인데 장미래가 웃었다.
“아니. 웃겨서 그런 게 아니라. 진짜 잘 그렸어. 데생엔 약한 줄 알았는데 언제 이렇게 늘었대?”
할아버지의 그림을 보고 그간 연습해 왔다.
“호랑이 같다. 근엄하면서도 차분한 백호. 이미지 진짜 잘 잡았다. 흡.”
또 웃는다.
“백호가 뭐예요?”
“하얀 호랑이.”
“호랑이?”
장미래가 태블릿으로 호랑이를 검색해 보여 주었다.
그녀의 말대로 강인하면서도 인자한 면이 느껴지는 것이 할아버지와 똑같다.
“고맙다.”
할아버지가 내 머리를 쓰다듬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석연치 않은 반응이다.
‘마음에 안 드시나?’
오랜 세월 쌓아온 인품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는데 이번 그림은 실패한 듯하다.
언젠가 다시금 그려드려야겠다.
다음 날.
밤새 태블릿으로 그림을 그리다가 늦잠을 자고 말았다.
일어나 보니 점심때가 다 되었는데 집에 아무도 없다.
인류의 축복 냉장고에서 신선한 우유를 꺼내 마시고 있으니 할아버지가 돌아왔다.
“어디 다녀오셨.”
할아버지의 머리가 아주 검다.
물감이라도 발랐는지 멋스러운 새치가 하나도 없다.
“머리 어떻게 된 거예요?”
“염색했다. 젊어 보이지?”
“흰 게 멋진데…….”
“건강해 보이고 좋지 않아? 내 입으로 말하기 좀 그렇지만 미용실 사람들이 전부 10년은 젊어 보인다고 하더라. 하하핳!”
아쉽게 되었다.
* * *
내일 유럽으로 떠나야 해서 이것저것 확인하느라 분주한데 누군가 찾아온 모양이다.
신경 쓰지 않고 어떤 색연필을 가져갈지 고민하던 중.
“훈아, 이리 좀 와 봐라.”
할아버지가 부르셨다.
나가 보니 처음 보는 남자가 반갑게 웃었다.
서글서글하니 좋은 인상이다.
현대 사람들은 나이보다 어려 보이는 듯하니 대충 40대 초반 정도 되지 않을까 싶다.
“반가워, 훈아.”
장미래가 가르치는 학생도 그렇고 이 사람도 그렇고 내 이름을 어떻게 아는지 모르겠다.
“안녕하세요.”
“아저씬 배움 미술관 큐레이터 방태호라고 해.”2)
배움 미술관이라면 할아버지와 함께 구경했던 첫 번째 미술관이다.
그런 곳의 기획자가 찾아왔다면 혹시나 전시회를 기대해도 되는 건가.
“실은 서울 미술관에서 해바라기를 봤거든. 너무 멋지더라.”
“괜찮았어요?”
“응. 뭐라 설명할 순 없지만, 생기 넘치는 작품이었어. 상처 입은 해바라기가 내는 황금빛이 괜히 나도 그럴 수 있다고 말해 주는 것 같고.”
내 의도가 정확히 전달되었다.
“감사합니다.”
방태호가 싱긋 웃었다.
“그래서 훈이 그림 전시해 보고 싶어서 찾아왔는데. 그동안 그린 그림 보여 줄 수 있을까?”
할아버지가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요.”
할아버지가 내게 안 좋은 사람을 소개해 줄 리도 없고, 내 그림을 통해 나와 대화를 나눈 사람이니 믿을 만하다.
할아버지가 꾸며준 내 작업실로 안내했다.
그동안 색연필과 수묵화에 빠져 연습만 해온 탓에 마음에 드는 작품은 몇 없다.
“편하게 보세요.”
“고마워.”
방태호가 천천히 작업실을 둘러보았다. 몇몇 작품 앞에서 멈추더니 대부분은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난감한 듯 턱을 매만진다.
“수묵화를 많이 그렸구나.”
“네. 연습하고 있거든요.”
“수채화나 유화는 없고?”
“지금은 안 그리고 있어요.”
아쉬워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하루에 한 작품씩 그려대긴 했지만 수묵화를 접한 지 얼마 안 되기도 하여 만족스러운 그림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색연필화도 할아버지의 초상화를 제외하곤 썩 마음에 드는 것이 없고.
28억 원에 <해바라기>를 판 ‘고훈’의 그림이 아니라 <해바라기> 같은 그림을 찾는 사람인 것 같아 신뢰가 간다.
“세 달 뒤에 다시 와주세요.”
“어?”
“지금은 수묵화 연습하고 있어서 유화는 없어요. 유럽 여행 다녀오고 나서 몇 점 그려놓을게요.”
두 달 동안 여행을 가도 한 달이나 여유가 있다.
부지런히 그리면 20점 이상은 준비할 수 있다.
그리고 싶은 것은 산더미처럼 많으니까.
“음. 그래. 기대할게. 선생님.”
방태호가 할아버지에게 고개를 숙였고 할아버지도 함께 인사했다.
그를 배웅하기 위해 거실로 나가던 중 방태호가 여행 이야기를 물었다.
“유럽은 공부하러 가는 거야?”
“네. 미술관 구경하러 가요.”
“오. 어디?”
“반 고흐 미술관이요.”
“크. 좋지. 반 고흐 좋아하는 것 같더라. 해바라기도 왠지 모르게 반 고흐가 동양화를 접한 느낌이었거든.”
“…….”
귀신이다.
뭐 하는 사람인가 싶어서 빤히 바라보니 손바닥을 보이며 부정했다.
“아, 절대 나쁜 뜻이 아니니까. 그만큼 대단하단 뜻이었어. 정말 엄청난 노란색이었거든. 반 고흐의 표현을 빌리자면 황금이 녹아내린 듯한.”
고작 20분 정도 함께했지만 마음이 가는 사람이다.
“감사합니다.”
그가 싱긋 웃었다.
“그럼 기대할게. 여행 재밌게 즐기고.”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 오늘 실례했습니다. 다음에 또 인사드리겠습니다.”
“그래요. 고생했어요.”
방태호가 나서고 문이 닫히자마자 할아버지가 물었다.
“왜 다시 오라고 했어?”
“지금 있는 그림은 마음에 안 드니까요.”
“음.”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물었다.
“마음에 안 드는 그림을 보여 준 거야?”
“그것도 제 그림이니까요. 보고 싶다는 데 숨길 필요 있어요?”
할아버지가 엉덩이를 툭툭 두드렸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뭔가 흐뭇해하시는 눈치다.
* * *
고훈의 그림을 둘러보고 나선 방태호가 허탈하게 웃었다.
좋은 그림이 많았지만 <해바라기>처럼 마음을 움직이는 그림은 발견할 수 없었다.
아쉬운 마음에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데 고훈이 먼저 나섰다.
석 달 뒤에 다시 찾아오라고.
‘처음부터 전시할 생각이 없었던 거야.’
아직 전시할 만한 작품이 없으니 다시 찾아와 달라는 말이야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상대가 WH배움 미술관 큐레이터라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국내 미술관 중 가장 많은 사람이 찾는 곳이며, 그곳에 초대되는 것만으로도 화제가 되는 WH배움 미술관이었다.
특히나 방태호 큐레이터와 함께할 수 있다면, 많은 화가가 어떻게든 자신의 작품을 피력하고자 했다.
그러나 열 살 소년은 달랐다.
WH배움 미술관에 초대되는 것이 얼마나 크고 영광스러운 일인지 모르기도 하겠지만, 현재 자신에게 전시할 만한 작품이 없다고 판단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더욱이.
‘연습하고 있다고 했지.’
습작을 보이는 데 망설이지 않았다.
아직 어리고 순수한 탓일까.
자신의 미숙한 점을 보이는 게 달가울 리 없거늘 고훈은 부족하고 어색한 그림도 빠짐없이 보여주었다.
그중에는 전시해 봐도 괜찮겠다 싶을 정도로 양질의 작품도 있었지만 방태호는 석 달 뒤에 다시 오라는 고훈과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본 <해바라기>를 믿었다.
‘세 달이면 몇 점 정도 완성하려나. 여행도 다녀올 테니 네다섯 점 정도면 많이 준비한 거겠지.’
비록 개인전을 할 만한 작품 수는 아니지만.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통해 미술을 접하게 된 방태호는 마치 그를 연상케 하는 고훈에게 기대를 걸어보았다.
* * *
1)“미래의 화가는 지금껏 없었던 컬러리스트일 것이다.” 1888년 빈센트 반 고흐
2)큐레이터(Curator): 박물관, 미술관 등에서 작품을 수집, 관리하며 전시회를 기획하는 직업.
라틴어 큐라레(curare: 보살피다)에서 유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