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18화 (18/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18화

5. 유럽 여행(3)

“아핳핳핳하핳.”

어제 있었던 일을 전해주니 장미래가 좋아 죽는다.

숨넘어가겠다.

“아, 진짷핳. 진짜 너무 웃겨.”

“…….”

장미래가 눈물을 닦고 내 볼을 감쌌다.

“우리 훈이 무서웠어요? 할아버지가 맛있는 거 사 주고 스마트폰 선물해 주시려고 해서 어디 가시는지 알았어요?”

‘요’가 붙었으니 분명 존대인데, 묘하게 거슬린다.

겨우 진정한 장미래가 턱을 괴었다.

“하긴. 나도 어렸을 땐 갑자기 엄마가 비싼 거 사 주면 우리 집에 무슨 일 있나 싶었지.”

“오해할 상황이었어요.”

의료 기술이 좋아져서 사람이 백 살까지 사는 세상이 올 줄 누가 알았겠나.

나 때는 육칠십이면 오래 살았다.

“그건 그렇고. 뭐 사고 싶어?”

“아무거나요.”

“왜? 기왕이면 좋은 거 사면 좋잖아. 디자인도 여럿 있고.”

“왜 사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음. 훈이가 어디 갔을 때 할아버지하고 전화도 해야 하고. 친구들하고도 연락하고. 필요할걸?”

전할 말이 있으면 편지를 보내면 되고, 급한 일이면 전보를 쓰면 될 텐데 굳이 백만 원이나 하는 물건을 사야 하나 싶다.

차라리 그 돈으로 물감을 사는 게 낫다.

“뭐가 좋으려나…….”

장미래가 가방에서 1호 캔버스만 한 뭔가를 꺼냈다. 단면을 톡톡 두드리니 화면이 나왔다.

“이건 뭐예요?”

“태블릿. 태블릿도 처음 봐?”

“스마트폰 같은 거예요?”

“응.”

“뭐가 다른데요?”

“어…… 화면이 크지?”

전화기, 핸드폰, 스마트폰, 태블릿.

모양만 다르면서 이름은 대체 왜 몇 개나 붙인 건지 모를 일이다.

“간단한 작업하기엔 화면이 큰 게 편하니까. 게임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그림?”

“볼래?”

장미래가 태블릿을 조작했다.

“이걸로 그리면 돼.”

펜을 쥐여준다.

“심이 없는데요?”

“흐흫. 해봐.”

미심쩍다.

그래도 이해하지 못할 일로 가득한 세상이니 속는 셈 치고 펜을 움직이니, 그림이 그려진다.

“어?”

“수정도 할 수 있어. 여기 이거 누르고 지워 봐.”

흰 네모 모양 그림을 누르고 펜을 움직이니 그 부분만 지워진다.

너무나도 깨끗하게,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 새하얗다.

소름 돋는다.

“계속 그릴 수 있는 거예요?”

“응. 얼마든지.”

장미래가 손으로 무엇인가를 누르자 한순간에 방금 지웠던 선들이 그대로 돌아왔다.

놀라서 말이 안 나온다.

“수진 선배가 엄청 엄하게 키우셨나 보다. 요즘 애들 철들기도 전에 익숙해지던데.”

마음대로 그릴 수 있고.

얼마든지 지울 수 있고.

게다가 실수로 지운 걸 다시 그대로 복구할 수 있다니.

이것은 기적이다.

신기해서 이것저것 만져보는데 아무래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

“자,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이렇게 묶어서 복사. 붙여넣기 하면…… 짠.”

“허어업.”

방금 그렸던 그림이 두 개가 되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똑같이.

“판화?”

“아핳핳핳. 너 리액션 진짜 좋다. 그럼 이건?”

장미래가 사진 한 장을 불러오더니 뭔가를 누르자 순식간에 유화가 되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태블릿과 장미래를 번갈아 보는데 잠깐 눈을 뗀 사이에 이번엔 흑백으로 바뀌어 있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아예 그림 자체가 파랗게 칠해져 있다.

너무 놀라 나도 모르게 몸을 들썩였다.

“어떡해. 너 너무 귀엽다. 그렇게 신기해?”

“이게 뭐예요?”

“필터라고 이 애플리케이션 기능이야.”

“필터?”

뭔가를 거른다는 말인가?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가져야 한다.

“살래요.”

“흐흫. 마음에 들어? 이제 사야 할 것 같아?”

이런 걸 사지 않으면 평생 후회하고 말 것이다.

“이게 있으면 재료비가 없어서 그림 못 그리진 않을 거 아니에요.”

얼마든지 고칠 수 있는 이것이 있다면 캔버스를 살 수 없어 그림 위에 그림을 덧그리는 일도 없을 것이다.

“장기적으로 보면 캔버스에 그리는 것에 비해서 돈이 덜 들긴 하지. 물감도 안 들고.”

그뿐만이 아니다.

작업 시간도 훨씬 짧아질 테고 지금까지 상상도 못 했던 작업을 마음껏 할 수 있을 거다.

여러 색상의 색연필만으로도 대체 무엇을 그릴지 두근거렸거늘.

이것은.

그런 차원을 아득히 넘어버린 신의 축복이다.

“빨리 가요. 다 팔리겠어요.”

“괜찮아. 언제든 살 수 있어.”

대체 이놈의 세상은 어떻게 돼먹은 거지.

고작 130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러한 기적이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된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음. 요즘은 WH 것도 파인애플 물건도 다 괜찮던데. 훈이가 쓰기엔 WH가 더 쉬우려나.”

“물감을 다양하게 쓸 수 있는 게 좋아요.”

“응. 다 쓸 수 있어.”

“붓도 여러 개면 좋겠어요.”

“어떤 앱이든 붓이 모자라서 불편하진 않을걸?”

“그럼 뭘 고민하는 거예요?”

“작업 환경이 다르거든.”

거듭 생각하지만.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잘 모른다.

아이들이 ‘왜?’라는 질문을 반복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그런데 훈아, 이런 걸로 그린 그림하고 캔버스에 그린 그림하고는 좀 달라.”

“어떤 점이요?”

“예를 들어서 해바라기는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 따라 그려도 진품과 가품을 구별해낼 수 있잖아?”

“네.”

“그런데 이렇게 파일로 그리게 되면 누구나 쉽게 복사할 수 있어. 아까처럼.”

“…….”

그건 문제가 될 수 있겠다.

“어떤 그림이 진짜인지 모른단 뜻이죠?”

“응. 그런데 그런 단순한 문제는 아니야. 훈이 그림 방향성이 달라지게 돼.”

“방향성?”

“캔버스에 그리면 고유한 가치를 가지기 때문에 앙리 마르소처럼 훈이 그림을 비싸게 사는 사람도 있을 거야.”

앞으로 더 많아지면 좋겠다.

“하지만 여기에 그리면 훈이 그림을 굳이 비싸게 살 필요가 있을까? 백 장, 천 장, 만 장 똑같이 가질 수 있는데?”

“어…….”

“그래서 이걸로 그린 그림은 파는 방법이 완전히 달라. 훈이가 인기가 정말정말 많아지면 더 벌 수도 있고 아니면 아예 못 벌 수도 있어.”

다시는 돈이 부족해서 구차하게 살고 싶지 않다.

“그럼 됐어요.”

“장점도 있는데.”

“무슨 장점이요?”

“일단 한 번 그리면 변하지 않고 영원히 보관할 수도 있고. 캔버스에 그린 건 사진으로 찍어도 미묘하게 느낌이 전달되지 않잖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처음부터 여기에 그리면 그런 이질감은 없지. 그만큼 많은 사람이 훈이 그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고.”

“…….”

“또 캔버스에 그린 걸 직접 보려면 아무래도 힘든 일이 많아. 대신 인터넷에 올리면 세계 어느 나라에 있는 사람이든 훈이 그림을 볼 수 있어.”

정리해 보면 캔버스에 그린 그림은 고유한 가치를 가지고 있고 이 태블릿이란 물건에 그린 그림은 많은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다는 말 같다.

하지만 굳이 돈이 아니더라도 유화나 수묵화를 포기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또 이 신비하고 새로운 방식을 포기하고 싶지도 않다.

“양쪽 다 하면 되잖아요.”

장미래가 눈을 몇 번 깜빡인다.

“그러게?”

* * *

고수열은 손자 고훈에게 여러 거장의 걸작을 직접 보여주고 싶었다.

배우고 느끼는 게 있을 테고 그로 인해 새로운 영감을 얻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었다.

내년부터는 학교에도 다시 보내야 하기에 이번 겨울이 아주 좋은 시기였다.

‘이곳저곳 다니려면 기간을 길게 잡아야 할 텐데.’

큰 박물관 같은 경우에는 며칠을 잡아도 부족했다.

‘두 달. 아니 석 달은 잡아야 하나.’

한국에서 학교를 보낼지, 해외에서 지내게 할지도 결정해야 하기에 고수열의 고민은 더욱 깊어졌다.

‘파리에서 사는 게 좋으려나. 런던도 괜찮고. 베니스랑 베를린도 선택지인데. ……뉴욕도 나쁘지 않지.’

미술을 하기에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생각에 어떤 도시도 정할 수 없었다.

대도시는 여러 문화를 접할 수 있었고 그림을 전시하기에도 좋았다.

반면 고훈의 감수성을 고려해 좋은 풍경에 한적한 마을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아마 아들 부부도 이런 고민 때문에 고훈을 데리고 이곳저곳에 다니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렇게 고민하던 차 스마트폰을 사러 나갔던 고훈이 장미래와 함께 귀가했다.

“할아버지!”

손자가 웬일로 반갑게 부르며 달려왔다.

고수열이 웃으며 반겼다.

“어이구. 무슨 일로 기분이 이렇게 좋아?”

“이거요! 이거 아세요? 그림을 그릴 수 있는데, 합성이란 것도 할 수 있어요. 합성 아세요?”

“그래? 그게 뭔데?”

모른 척하니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열심히 설명하는 손자가 그저 귀여울 뿐이었다.

“엄청 꼼꼼하게 살피더라고요. 이것저것 같이 보느라 좀 늦었어요.”

“고마워요. 고생했어요.”

“고생은요. 어? 여행 가시게요?”

장미래가 여러 도시 사진을 비추고 있는 컴퓨터 모니터를 보며 물었다.

“훈이랑 유럽 여행 좀 할까 해서요.”

“좋겠다. 어디로요?”

“이곳저곳 생각해 두고 있어요.”

고수열이 잠시 고민했다.

고훈은 어느새 태블릿에 빠져 이것저것 만지고 있었다.

“훈아, 어디서 살고 싶어?”

고훈이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여기서 사는 게 좋아? 아니면 유럽이 좋아? 거기서 오래 살았잖니.”

고훈이 눈을 깜빡거렸다.

“예를 들어 런던이라든가.”

“비도 많이 내리고 공기도 안 좋고 살인 사건도 많아서 싫어요.”1)

“……그럼 파리는?”

“똥 냄새 나서 싫어요. 쥐도 많고.”

고훈 뒤에서 장미래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학생 시절 부푼 꿈을 안고 파리로 유학 갔다가 크게 실망한 경험을 떠올린 것이다.

“그럼?”

“여기가 좋아요. 할아버지 이거 보세요. 이걸로 그림도 찾을 수 있어요. 파……. 파. 블……. 로. 로. 피카……. 소.”

고훈이 더듬더듬 파블로 피카소를 검색해서 자랑하듯 보였다.

고수열은 손자를 쓰다듬으며 다시 고민했다.

그 역시 미국과 프랑스, 런던에서 공부했으나 그곳이 결코 살기 좋은 도시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얻을 수 없는 지식과 경험을 쌓을 수 있다는 건 변치 않았다.

“정말 괜찮겠어?”

“그림은 어디서든 그릴 수 있어요.”

태블릿에 빠져 정신없는 고훈이 내뱉은 말에 고수열이 빙그레 웃었다.

“그래. 급한 일 아니니 여행 다니며 천천히 생각해 보자.”

“네.”

“그래, 어디부터 가보고 싶으냐.”

고훈이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반 고흐 미술관이라는 곳 정말 있어요?”

“암. 있고말고. 가고 싶으냐?”

“네.”

“그래. 가자. 한 번쯤 갈 만한 곳이지.”

* * *

1)잭 더 리퍼.

1888년 8월 31일부터 11월 9일에 이르기까지 영국 런던 이스트엔드 지역에서 벌어진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

빈민가 구제 정책, 과학 수사 도입, 모방 살인 등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미쳐 만화, 뮤지컬, 영화, 게임 등 여러 소재로 활용되었고 그만큼 당시 유럽에 큰 충격을 준 사건이다.

당시 영국-프랑스 등에서 살았던 빈센트 반 고흐도 알고 있었단 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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