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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반 고흐-17화 (17/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17화

5. 유럽 여행(2)

통장을 만들었다.

할아버지가 대신 수령했던 <해바라기>의 판매대금을 곧장 넣어주시고, ATM이라는 물건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알려주셨다.

화면에 숫자 2,436,840,000이 적혀 있다.

원천징수라는 걸 떼간 금액인 듯하다.

“왜 안 가져가셨어요.”

“씁.”

돈 갚는단 이야기만 꺼내면 이렇게 역정을 내신다.

약속을 지키자는 뜻인데 무작정 거부만 하시니 어쩔 도리가 없다.

“자, 여기를 이렇게 누르고. 뽑고 싶은 만큼 금액을 설정해서 출금하면 되는 거야.”

3만 원을 누르고 비밀번호를 입력하자 카드를 꺼내라는 안내 음성이 나왔다.

지폐도 나왔다.

이렇게나 돈을 편리하게 관리할 수 있다니.

“세상 참 좋아졌네요.”

“흫흐흐흐. 그래. 이 녀석아. 좋아졌지?”

할아버지가 머리를 잔뜩 헝클었다.

작은 상자를 건네주시기에 받았다.

전위적인 노란 스펀지가 그려진 지갑이 들어 있다.

병원에 있을 때 그림이 움직이는 게 하도 신기해서 봤을 뿐인데 내가 이 녀석을 좋아한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이다.

“감사합니다.”

지갑 안에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이 넣어져 있다.

“이건 뭐예요?”

“돈 많이 벌라는 뜻에서 넣어서 주는 거야.”

내가 살 적에도 비슷한 일을 했다.

이렇게나 발달한 시대에도 이런 미신적인 행동이 남아 있으니, 정말 많이 변한 것 같기도, 달라지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할아버지의 차에 올라탔다.

집으로 가는 방향이 아니다.

“어디 가는 거예요?”

“세무서. 돈을 벌었으니 사업자를 내고 세금도 내야 한단다.”

세금을 내야 하는 건 이해하지만 세무서라든지 사업자라든지 모르는 단어가 많다.

“그게 뭔지 모르겠어요.”

“지금은 몰라도 괜찮아. 할아버지가 해줄 거니까. 하지만 확실히 공부해야 한다. 그림을 파는 것도 중요하지만 팔고 남은 돈을 어떻게 관리하는지도 그만큼 중요해.”

“네.”

“지금 네가 큰 돈을 벌었지만 관리하지 않고 마구 쓰면 금방 없어질 거야. 돈이란 게 그래. 오늘은 할아버지하고 법인 만들고, 돈 관리하는 법 알아보자.”

모르는 단어를 많이 쓰셔서 이해하지 못하는 문장도 있지만 적어도 갑자기 큰돈을 번 인간이 망가지는 꼴은 많이 봐 왔다.

아마 그것을 경계하라는 뜻이리라.

“법인이 뭐예요?”

“법으로 인정받는 회사라고 생각하면 돼.”

“……네?”

“네가 회사를 만드는 거야. 네 수익은 그 회사의 수익이 되는 거지. 넌 네가 만든 회사에게 돈을 받고.”

하나도 모르겠다.

“제가 만든 회사라고 하셨잖아요?”

“그래.”

“제가 번 돈이 회사 소유가 되고, 회사가 저한테 돈을 준다고요?”

“잘 이해했구나.”

“하나도 못 했어요. 왜 그렇게 복잡하게 해야 하는데요?”

“수입이 커지면 그만큼 내야 할 세금도 많아져. 보통 일정 금액을 기준으로 세율을 정하고. 법인은 그 세율을 유리하게 가져올 수 있어. 기업이 성장할 수 있도록 나라에서 혜택을 주는 거야.”

“그럼 그 법인이란 걸 안 만들면 세금을 많이 내요?”

“그렇지. 할아버지 닮아서 이해가 빠르구나.”

단언하건대 난 아직 이 이야기를 이해 못 했다.

앞으로도 쉽지 않을 것 같다.

전혀 모르겠다.

중요한 일인 것 같은데 아무것도 모르겠으니 답답해하던 차, 할아버지가 마음 편하게 웃으셨다.

“천천히 알아가면 돼. 네가 처음부터 다 이해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네.”

그림만 잘 그리면 되던 예전과 달리 현대의 화가는 이것저것 신경 쓸 게 많은 것 같다.

할아버지와 함께 법인이란 걸 만들었다.

뭔지는 모르겠고 회사 이름을 지으라고 하기에 고민하다가 그냥 고훈이라고 적었다.

“자, 그럼 이제 핸드폰 사러 가자.”

“핸드폰이 뭐예요?”

“전화기 말이다.”

“전화기는 뭔데요?”

“이거. 이게 전화기 아니냐.”

할아버지가 스마트폰을 꺼냈다.

“스마트폰 아니에요?”

“그래. 핸드폰.”

오늘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많이 생긴다.

“……수수께끼?”

“수수께끼는 무슨 수수께끼야. 흐흐흫. 엉뚱한 말 말고 가자.”

몇 번 더 고민해 봤는데 아무래도 세 단어가 모두 동의어 같다.

그러지 않으면 할아버지의 말을 이해할 길이 없다.

대체 왜 하나의 물건에 이름이 셋이나 붙었는지 모를 일이다.

요란한 매장에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얘가 쓸 핸드폰 좀 사려고요.”

직원이 가식적인 미소를 보이며 물었다.

“사고 싶은 거 따로 있어?”

뭘 알아야 사고 싶은 게 있을 텐데 그런 게 없다.

“제일 좋은 거로 보여주세요.”

할아버지가 대신 답해주었다.

“네. 이쪽으로.”

직원이 내 손목에서 팔꿈치까지 오는 길이의 스마트폰을 보여주었다.

“WH에서 저번 달에 나온 신제품입니다. 화면도 크고 카메라 화질도 4억 화소고요. 디스플레이도 244㎐라서 우리 학생 공부할 때 영상도 잘 볼 수 있습니다. 만져볼래?”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일단 너무 크다.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그나마 몇 번 다뤄본 적 있는 할아버지가 쓰는 것과 같은 물건을 구하고 싶다.

“할아버지랑 같은 게 좋아요.”

“내 거?”

할아버지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자 직원 표정이 갑자기 굳어졌다.

그나마 가식적이라도 웃던 얼굴에 귀찮음이 어렸다.

장사 오래 못 할 친구다.

“요즘엔 아무래도 여러 애플리케이션이 나오다 보니 사양이 좋은 걸 사야 하거든요. 학생 공부할 때는 더 그렇고요.”

“그래요?”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훈아, 이 아저씨가 그렇다는데 좋은 거 사는 게 어때.”

할아버지는 아는 게 많지만 이런 일에 대해서는 무지한 듯하다.

자꾸 공부 들먹이는데, 애초에 공부를 할 거면 스마트폰을 잡고 있으면 안 되지 않은가.

“할아버지, 스마트폰 여기서만 살 수 있어요?”

“그건 아닌데. 왜. 맘에 드는 게 없어?”

“네. 천천히 살래요.”

“흠. 그래. 그러자꾸나.”

100만 원이 넘는 물건을 아무런 정보 없이 사는 건 무모하다.

“잠시만요. 할아버님. 저희가 오늘 이 할인 마지막 날이라서요. 오늘 구입하시면 매달 2만 원씩 요금 할인받을 수 있으세요.”

“음.”

“어차피 핸드폰은 다 사 주셔야 하거든요. 요즘엔 학교 다니는 아이들 다 스마트폰 가지고 있어서 없으면 괜히 무시당하고 그런 일도 있어요.”

“그래요?”

잔뜩 걱정하는 모습이 이 스마트폰 장사꾼에게 반쯤 넘어가셨다.

“학교 안 다녀요.”

할아버지를 손을 잡고 끌었다.

“가만있어 봐라. 사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친구들은 다 있다고 하잖니.”

남들 다 있는 거라며 사야 할 것처럼 만드는 건 장사꾼의 기본 기술이다.

내가 일하던 화상에서는 이 그림이 없으면 교양 없는 인간 취급하라고 했다.

예나 지금이나 장사꾼의 기술은 다르지 않을 터.

“나중에 사요.”

“왜 그래? 할아버지가 축하 선물 주고 싶어서 그런데. 이건 어떠냐.”

직원 표정이 밝아졌다.

사면 안 되는 물건이다.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거짓 협박이라도 해야겠다.

“안 나가면 저 여기 누워서 울 거예요.”

“얘가 왜 이래?”

“진짜로요.”

일부러 미친 척한 적도 있는데 고작 드러눕고 떼쓰는 건 일도 아니다.

“허.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다음에 올게요.”

“아. ……네.”

아쉬워하는 직원을 뒤로하고 할아버지를 끌고 나왔다.

“허참. 할아버지가 사 준다는데 그렇게 싫어?”

“나중에 미래 이모한테 물어보고 사요. 할아버진 물건 함부로 샀다가 큰일 나겠어요.”

“할아버지가 얼마나 합리적인데. 할인이 오늘까지라고 하지 않느냐. 어차피 살 거 할인받고 사는 게 낫지.”

“그 할인 다음에 와도 할 거예요.”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장사하는 사람은 다 그래요.”

“이 녀석이 누굴 닮아 이렇게 고집이 세?”

“할아버지 닮았겠죠.”

* * *

저녁을 먹고 집에 돌아왔다.

삼겹살이라고 베이컨 만드는 부위를 두껍게 썰어, 돌판 위에서 구워 먹는 음식이었다.

포테이토 피자, 쟁반짜장과 함께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음식이 아닐까 싶다.

풍부한 육질과 터지듯 뿜어져 나오는 육즙, 고소한 향미까지.

먹기 힘들었던 김치조차 돼지기름에 튀기듯 구워 함께 먹으니 다음 작품은 삼겹살로 해야 할 듯싶다.

기나긴 하루의 끝으로 너무나 훌륭한 저녁이었다.

‘오늘 대체 뭘 한 거지.’

통장을 만들고, 법인을 설립하고, 다시 법인 계좌를 만들고, 통장을 분할하고 또 주식 계좌를 만들었다.

다 기억하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내일은 또 장미래가 핸드폰 사러 가 준다고 했으니 얼마나 머리가 복잡할지 모르겠다.

“흐흐흐. 힘들어?”

“알아야 하는 것 같은데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처음엔 다 그래. 할아버지가 다 해줄 수도 있지만, 언젠가는 훈이 너 스스로 해야 하는 일이니까.”

할아버지가 안쓰럽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었다.

“할아버지가 네가 그 큰돈을 가지고 있게 두는 것도 그 때문이야. 주머니가 넉넉하다고 막 쓰고 다니면 안 돼. 잘 관리하고 아껴 쓰면 네가 죽을 때까지 돈 걱정 없이 그림만 그리며 살 수 있는 돈이지만, 자칫 엇나가면 네 삶이 힘들어질 수도 있단다.”

할아버지는 내게 경제 관념을 확실히 심어주고 싶으신 듯하다.

장담하건대 아이는 물론이고 성인들도 오늘 일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아이고. 오랜만에 돌아다니느라 할아버지도 힘들다.”

그럼에도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바른 경제관념을 심어줌으로써 당신이 없는 날을 준비하시는 것이리라.

나이에 비해 젊어 보여서 몰랐는데, 오늘 이것저것 보다 보니 할아버지가 예순네 살이나 되었다.

충격이었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연세다.

“……오래 사세요.”

“이 녀석아, 할아버지 아직 한창이야. 예순넷밖에 안 됐어.”

그렇게 생각하고 싶으실 거다.

나도 마찬가지고.

“내년에 퇴임하면 천천히 여행도 다니고 그간 미뤄두었던 작업도 할 수 있겠지. 그러면 할아버지랑 그림 구경도 하러 다니자꾸나.”

마음이 무겁다.

아무렇지 않게 말씀하시지만 오늘 일도 그렇고 마치 이별을 위한 여행을 준비하시는 듯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갑자기 많은 걸 알려주고, 스마트폰을 사 주려 하시고, 삼겹살처럼 값진 음식을 먹일 리 없다.

“그렇게 해요.”

“음?”

할아버지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 녀석아, 왜 울어? 어?”

“안 울어요.”

비록 함께한 지 얼마 안 되었고.

잘못된 만남이었다고는 하나 이분에게서 받은 사랑 덕분에 새 삶에 적응해 나갈 수 있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데 뭐가 아니야. 여행 가기 싫어?”

끝까지 감추고 싶으신 걸까.

내가, 고훈이 아직 어리고 부모를 여읜 지 얼마 안 되어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나 죽음을 앞둔 그를 외롭게 둘 수만은 없다.

가족에게도 괴짜 취급당했던 날 진심으로 대해주셨으니까.

가족의 따뜻한 정을 다시금 깨닫게 해주셨으니까.

“……얼마나 남으신 거예요?”

“뭐가?”

“모른 척하지 않아도 돼요. 얼마 남지 않은 거죠?”

“얘가 갑자기 무슨 말이야? 뭐가 남질 않아?”

목이 메어 물어보기 힘들다.

“살…… 날이요.”

“뭐?”

정곡을 집었는지 눈을 크게 뜨고 놀라신다.

“얼마 안 남았죠?”

“이 녀석이 왜 이래? 남긴 뭘 얼마 안 남아? 백 살까진 거뜬히 살 거다!”

“저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러나 사람이 백 년이나 살 수 있을 리 없다.

예순넷까지 건강하게 사신 것만으로도 장수하신 거니까.

“좋은 추억 많이 만들어요. 여행도 가고. 그림도 많이 보고.”

“떽! 할아버지 나이에 죽을 준비하면 사람들이 욕해요! 노인정 가면 받아주지도 않아!”

“거짓말하지 말아요.”

“거짓말은 무슨 거짓말이야? 이 녀석이 오늘 왜 이래? 왜, 누가 나 죽는다고 하디?”

“그럼 법인 왜 만들었어요?”

“그래야 네가 세금도 내고 할 거 아니야?”

“갑자기 스마트폰 사 주려 하셨고.”

“요즘 없는 애들이 없다더라!”

“삼겹살 같은 고급 요리도 사 주셨잖아요.”

“뭐?”

“저 그런 거 없어도 돼요. 할아버지가 건강한 게 더 좋아요.”

“쓸데없는 소리 말고 빨리 가서 손이나 씻어! 아니 얘들은 애한테 뭘 먹였길래 삼겹살 먹었다고 이렇게 난리야? 누가 보면 최후의 만찬이라도 한 줄 알겠다!”

“…….”

뭔가 오해가 있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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