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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반 고흐-16화 (16/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16화

5. 유럽 여행(1)

앙리 마르소는 전시관 직원을 기다리는 동안 고훈을 노려보았다.

주제를 모르는 아인 줄 알았다.

그러나 짧은 대화 끝에 현실감각도 없어 보이던 꼬맹이가 달리 보였다.

고훈은 자신의 그림이 얼마나 대단한지 말하지 않았다.

어떤 의미를 두고 어떤 기법으로 무슨 재료를 사용해 만든 건지에 대해서 조금도 설명하지 않았다.

그것을 알아본 앙리 마르소의 식견을 바탕에 깔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해바라기>의 가치가 자신에게 달렸다고 했다.

시건방진 신인 작가들이 저지르는 아집이 아니었다.

‘이 내가 사러 왔다는 말이지.’

그림을 사러 온 사람은 다름 아닌 프랑스 최고의 화가이자 수집가 앙리 마르소.

그런 사람이 왔으니 그에 어울리는 가격을 제시한 것이었다.

당신 같은 사람이 사고 싶어 하는 <해바라기>가 200만 유로의 값어치도 없냐며 말이다.

어떻게든 한 푼이라도 더 받기 위해 아양 떨고, 수작 부리는 이들에 비해 이 얼마나 순수한 도전이란 말인가.

꼬맹이의 그림은.

그럴 가치가 있었다.

태양을 삼킨 듯 빛나는 한 송이 해바라기.

앙리 마르소는 그 그림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고전적인 기법을 사용했으나 결과물은 이 세상에 없었던 완전히 고유한 작품이었다.

이제는 거의 시장에 나오지 않는 단순 정물화일 뿐인데, 의지를 빛내는 해바라기의 생명력과 의지가 느껴졌다.

왼쪽의 공백 또한 사색할 여지가 충분했다.

그러기를 얼마간.

이준호 관장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제3전시실에 들어섰다.

“아이고, 안녕하십니까. 서울 미술관 관장 이준호라고 합니다.”

앙리 마르소는 이준호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 뒤에 천천히 걸어오는 고수열과 장미래를 보았다.

수표에 200만 유로를 적고 서명한 앙리 마르소는 그것을 이준호 관장의 가슴에 떠넘기고 고수열에게 다가갔다.

“만나 뵙기 힘듭니다, 고수열 경.”

“끈질기군. 대체 무슨 생각인가?”

고수열이 앙리 마르소를 노려보았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해바라기>가 있는 곳을 눈짓했다.

“경의 그림을 사러 왔다가 생각지도 못한 작품을 만났습니다.”

“…….”

“교육을 아주 잘하신 듯하더군요. 앞으로 기대가 큽니다.”

앙리 마르소가 놀란 이준호 관장을 보며 말했다.

“전시회 마지막 날 가지러 오겠다. 잘 관리해.”

“……예? 저, 무슨 말씀이신지.”

프랑스어를 알아듣지 못한 이준호 관장이 당황했지만, 앙리 마르소는 그에게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해바라기> 옆에 앉아 있는 고훈에게 잠시 눈길을 주곤 전시회관을 떠났다.

차량에 탑승하고 한참 뒤.

서울 미술관과 그림 거래 관련 일을 처리하고 돌아온 비서 아르센이 물었다.

“고수열 화백 만나셨는데 작품 이야기 안 꺼내셔도 괜찮으십니까? 지금이라도.”

“관심 없어.”

앙리 마르소는 오른팔을 창에 걸친 채 코끝을 문지르며 고훈과 <해바라기>를 생각할 뿐이었다.

* * *

팔았다.

‘내가 그림을 팔았어.’

운이 좋았다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지만 운이라도 좋다.

소품을 제외하고는 10년간 단 한 작품 팔았을 뿐이던 내가 이렇게나 빨리 그림을 팔다니.

나와 내 그림을 알아주는 사람과 만나다니.

벅차오르는 감정을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할아버지의 표정이 좋지 않다.

“왜 그러세요?”

“아니다. 되었다.”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있는 것이다.

“안 기쁘세요?”

어쩌면.

고상한 화가인 할아버지는 내가 팔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는 말을 잘못 받아들이실지도 모르겠다.

그림을 팔 수 없으면 비참하게 살아가고, 그림을 파는 행위 자체가 소통의 증거이기도 하지만.

아직 어린 고훈이, 내가 돈보다는 보다 순수하게 미술을 추구하길 바라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어떻게 설득할까 고민하는데.

주먹을 불끈 쥐고 떠신다.

“흐흫.”

장미래가 웃는다.

의아해하니 그녀가 귀에 대고 속삭였다.

“훈이 그림 제일 먼저 사고 싶으셨대.”

“…….”

손자 사랑이 지극한 것도 정도가 있지.

가족 사이에 돈 거래 하는 거 아니라고 하시던 분이 그림은 사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어지간히 분하신 듯하다.

표정이 험악하다.

“할아버지가 사면 다른 사람이 인정하지 않을 거잖아요.”

“내 마음에 드는 그림 내 돈 주고 산다는데 뭐가 문제냐.”

높은 위치에 있으면서도 타인에게 항상 공손하시고, 이성적이던 분이 나와 관련한 일에는 이상해지신다.

“그리고 왜 하필 그놈이야? 안 봐도 뻔하지. 거드름은 또 얼마나 피우는데?”

“그러게. 그래도 200만 유로나 제시했으면 훈이 그림 엄청 마음에 들었나 봐요.”

“아니에요. 훈이가 제시했어요.”

김지우 기자가 끼어들었다.

할아버지와 장미래가 김지우를 빤히 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처음에 10만 유로 말했었지?”

김지우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니 두 사람의 눈이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다.

“프랑스 말이라 뭐라고 하는지 몰랐지만 둘이 이야기하더라고요. 엄청 살벌했어요. 그래서 그런데, 그 이야기 좀 자세히 말해줄래?”

장미래가 김지우 기자의 말을 끊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무슨 생각으로 그랬어? 안 산다고 하면 어쩌게?”

“살 것 같았어요.”

“어?”

“지금까지 해바라기 본 사람 중에 가장 좋아했거든요.”

“……그런가? 그냥 노려보던데.”

김지우가 중얼거렸다.

“200만 유로가 얼만지 알고 말한 거야?”

“10만 유로가 1억 4,000만 원이라고 해서 10억 맞추려고 했어요. 50퍼센트는 미술관에 줘야 한다면서요.”

할아버지가 눈을 깜빡였다.

“이제 돈 갚을 수 있죠?”

“아니. 그게.”

할아버지가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약속했잖아요. 10억씩 갚기로.”

“너 설마 할아버지 말 때문에 200만 유로 부른 거냐?”

“네.”

“이 녀석아! 할아버지가 너 돈 걱정하지 말라고 한 말이지, 그걸 곧이곧대로 들으면 어떡해!”

“비싸게 팔면 좋잖아요.”

“누가 너보고 돈 벌어 오랬어?”

이렇게까지 역정을 내는 건 처음 본다.

조금 전 장미래가 알려준 이야기도 있고 해서 혹시나 싶다.

“가지고 싶으시면 하나 더 그려드릴게요.”

“하나뿐이잖아! 네가 첫 전시회에 출품한 첫 작품! 똑같이 그린다고 그게 해바라기가 될 것 같으냐!”

“…….”

“아핳하핳핳핳. 훈아, 할아버지 많이 화나셨나 봐. 풀어드려야겠다.”

“잠깐! 무슨 뜻이에요? 네? 자세히 좀 말해 주세요. 돈을 갚는 건 뭐고 사고 싶으신 건 무슨 뜻이에요?”

할아버지와 김지우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다.

* * *

[앙리 마르소, 수집품 추가. 고수열 손자 그림 200만 유로에 구입해]

세계적인 화가이자 미술품 수집가 앙리 마르소가 지난 15일, 서울 미술관에서 고훈의 <해바라기>를 200만 유로에 사들였다.

두 사람의 거래는 이례적으로 전시회관 안에서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

고훈은 앙리 마르소가 처음 제안한 10만 유로를 거절하고 200만 유로를 제시. 앙리 마르소가 그것을 받아들이며 거래가 성사되었다.

이로써 고훈의 <해바라기는> 한화 28억 원이 넘는 이 금액에 거래되어 올해 대한민국에서 거래된 그림 중 가장 비싼 작품이 되었다.

<해바라기>는 이달 20일까지 서울 미술관 제3전시실에 전시되고 앙리 마르소에게 인도될 예정이다.

서울 미술관은 거액에 거래된 <해바라기>를 보호하기 위해 전시 기간 내내 보안요원을 두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한편 <해바라기>를 그린 고훈은 고수열 화백의 손자로 올해 첫 전시회에서 첫 출품작을 판매하였다.

고훈 기사 바로가기

-김지우(예화)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화가이자 미술품 수집가.

개인 자산이 수백억 달러 이상으로 추측되는 셀러브리티 앙리 마르소가 대한민국에서 그림을 사들였단 소식에 미술계가 발칵 뒤집혔다.

뛰어난 실력과 막대한 재력을 과시하는 그는 미술품을 깐깐하게 평하기로 유명했으며, 거만하기로도 정평이 나 있었다.

그런 그가 고작 열 살 아이의 그림을 사는 것만으로도 뉴스거리인데, 200만 유로의 거금을 들였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월간 예화의 SNS 계정에 올라온 기사는 언론인들에 의해 수없이 복사 배포되었으며.

미술계 인사는 물론 일반 커뮤니티 사이트에도 소식이 전달되었다.

└미친ㅋㅋㅋㅋㅋ 10살짜리 애가 그림 28억에 팔았단닼ㅋㅋㅋ

└얘가 누군데?

└고수열 화백 손자.

└고수열? 이름은 들어본 것 같은데.

└우리나라에선 좀 덜 알려져 있는데 해외에선 엄청 남. 비엔날레 있을 때마다 모시고 싶어 안달하는 분임.

└얘 고해성, 이수진 아들이잖아. 맥스 스튜디오 아트 디렉터.

└세이버즈?

└ㅇㅇ. 세이버즈: 트리니티 워부터 엔드페이즈까지 미술 감독 맡았었음.

└두 사람 죽지 않았나?

└올해 여름에 한국에 휴가 왔다가 교통사고 나서 작고하심.

└ㅠㅠ 안타까운데. 애기 불쌍해지네. 부모님 여읜 거잖아.

└아니 근데 진짜야? 아무리 유명한 사람 아들이라고 해도 어떻게 28억씩이나 하지?

└앙리 마르소란 갑부가 보자마자 그 자리에서 샀다고 함.

└아, 현타 온다. 뭔 놈의 그림 하나로 28억을 벌어?

└그니까. 그림이라도 좋으면 몰라. 화가들 어차피 점 하나 찍어놓고 수십억 원이라고 하는 새끼들 아님?

└[링크] 여기 가보면 그림 볼 수 있음.

└열 살 먹은 애새끼 그림이 거기서 거기겠짘ㅋㅋㅋㅋㅋ

└열 살 먹은 애기한테 악플 다는 니 인생이 레전드인 듯.

미술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은 열 살 아이가 28억 원에 그림을 팔았단 사실에 놀랐다.

개중에는 부러워하는 사람도 시기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 부정적인 반응이었다.

소통을 거부한 현대 미술 작품에 대한 회의감 때문이었다.

└나 진짜 거짓말 안 하고 한 1분 멍 때림. 비쌀 만한데?

└어?

└ㅁㅊ. 뭐지?

└그림 잘 모르는데 진짜 잘 그리긴 했네. 아니, 잘 그리는 게 아니라 뭐라고 해야 하지?

고훈의 <해바라기>를 접한 사람들은 당황했다.

그들이 생각하던 이해하지 못할 그림이 아니었다.

보는 순간 기분이 좋아졌다.

외로워 보이나 고결하게 빛나는 해바라기는 설명할 수 없는 여러 감정을 복합적으로 전달해 주었다.

고훈의 <해바라기>가 알려지면서 자연스레 ‘말도 안 되는 그림’이 고가에 팔렸다고 욕하는 사람이 줄어들고.

그만큼 <해바라기>를 그린 고훈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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