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15화 (15/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15화

4. 그림을 팔다(3)

서울 미술관 이준호 관장의 입이 귀에 걸렸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두 거장이 혹시나 서울 미술관과 함께 어떤 일을 하려는 건 아닌지 기대한 탓이었다.

“관장님, 도착하셨습니다.”

이준호 관장이 서둘러 일어나 문을 열었다.

“아이고. 어서 오세요.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관장 이준호입니다. 장미래 교수님도 잘 지내셨지요?”

고수열이 떨떠름하게 이준호와 악수했다.

과한 환대에 마음이 불편했지만 장미래가 소개한 사람이기도 하고 손자의 첫 전시회 기회를 준 사람이기도 했다.

장미래가 슬며시 미소 지으며 이준호 관장과 인사했다.

“그럼요. 관장님도 별일 없으시죠?”

“하하하! 저야 항상 똑같지요. 아, 앉으시죠. 마실 것은 어떻게…….”

“물이면 됩니다.”

이준호 관장이 비서에게 눈짓을 주었다.

세 사람이 자리를 잡고 마주 앉았다.

“손자분 작품이 벌써 기사화되었더군요. 흐뭇하시겠습니다.”

“그래요?”

“예. 반응도 좋고 덕분에 평소보다 찾는 사람도 늘었습니다.”

고수열이 고개를 끄덕였다.

분위기가 잠시 가라앉았다.

안달이 난 이준호 관장이 조심스레 운을 띄웠다.

“그런데 어쩐 일로…….”

“훈이 이야기 때문에 왔어요.”

장미래의 대답에 이준호 관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훈이 이야기요?”

“네. 보셔서 아시겠지만, 워낙 좋은 작품이잖아요. 여기저기서 이야기도 올라오고.”

“그렇죠.”

“그래서 수익 비율을 조정하고 싶어요.”

혹시나 고수열 화백의 전시회 이야기는 아닐까 기대했던 이준호 관장이 내심 실망했다.

그러나 오랜 경험으로 표정을 관리하며 입을 열었다.

“교수님도 잘 아시겠지만 이미 체결된 계약이다 보니 비율을 조정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다른 작가와의 형평성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고 말이죠.”

이준호 관장이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 있는 고수열의 눈치를 보았다.

그 역시 고훈의 <해바라기>가 팔릴 거라 예상했다.

‘천만 원 적으셨던 것 같은데.’

이준호 관장은 고수열이 계약서에 손자 고훈의 그림을 천만 원에 팔기를 희망한다고 적은 것을 기억했다.

그중 50%라고 하면 500만 원.

적은 돈은 아니지만, 고작 그 정도의 이득을 취하고자 고수열과의 관계를 나쁘게 가져가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 조정해 볼 여지가 없지는 않죠. 인기 작가의 경우엔 그런 사례가 없는 것도 아니고요.”

이준호 관장의 말에 장미래가 싱긋 웃었다.

“그러니까요. 그래서 생각해 본 게, 1,000만 원까지는 기존 비율 유지하고, 그 이상으로 팔리게 되면 고정 금액으로 설정하는 게 어떨까요?”

“1,000만 원이요?”

“네.”

신인 작가의 작품이 천만 원에 팔리는 일이 드물긴 하나 불가능한 수치는 아니었다.

그림을 오래 다룬 이준호 관장이 생각하기에 고훈의 그림은 1,000만 원 이상의 가치가 있었다.

과연 고수열의 손자라는 이름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고 세계적인 화가로 명성 높은 해송 고수열 화백의 손자.

게다가 수많은 종합 예술 콘텐츠에서 활약한 고해성, 이수진 아트 디렉터의 아들이라는 점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집가들 사이에서 기대를 모을 만했다.

미소를 유지한 채 계산을 마친 이준호 관장이 조심스레 제안했다.

“아직 해바라기에 대한 문의는 없지만 저도 그 작품이 충분히 팔리리라 생각합니다. 도리어 희망하신 금액이 너무 적지 않나 싶을 정도로요.”

이준호 관장의 말에 장미래가 눈썹을 들었다.

고훈의 <해바라기>를 띄워주면서 비율 조건을 조금 더 유리한 쪽으로 가져가려는 의도가 보였다.

‘능구렁이 같은 사람이라니까.’

장미래가 나서려는데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고수열이 입을 열었다.

“잘 보신 것 같아 안심입니다.”

“하하. 제 일이니까요. 하지만 말씀드린 이유로 비율을 변경하긴 힘들 것 같습니다. 혹시나 다른 사람도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다면 모를까.”

명분이 필요하단 말이었고.

동시에 서울 미술관 또한 마냥 손해를 보고 싶진 않다는 뜻이었다.

“예를 들어 저희나 훈이 모두에게 이득이 돌아가는 방향 말이라든가.”

“듣고 있어요.”

이준호 관장이 무엇을 바라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자 장미래가 반응을 보였다.

“비율을 바꾸긴 아무래도 힘드니 작품을 경매로 넘겨보는 건 어떠십니까. 우리 미술관에서 운영하는 경매장에서 판매되면 가격도 높아질 테고, 비율도 전과 같이 고정하겠습니다.”

장미래가 고민했다.

작품을 경매에 올리면 가격이 오를 가능성은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전시회가 작품을 판매하기로 약속된 행사라는 점이었다.

이미 거래 가능한 작품으로 알린 <해바라기>가 거래 제한 작품이 되고, 추후 경매장에 오른다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할 이가 많을 터였다.

만약 수수료 때문에 그림을 팔지 않았단 소문이 돈다면 고훈에게 좋은 일은 없었다.

‘어쩌지.’

장미래가 고민하던 차, 고수열이 생각을 내놓았다.

“경매에 올릴 순 없습니다.”

“아주 나쁜 일은 아닐 겁니다.”

어떻게든 더 많은 이득을 취하고 싶은 이준호 관장이 고수열을 설득하려 했으나, 그는 고개를 저었다.

“거래액에 따른 비율 변경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말씀해 보시지요.”

“1억은 어떻습니까.”

장미래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이준호 관장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예?”

“1억 원까지는 기존 계약대로 5할씩 나누고, 대신 1억 원을 초과하면 1할을 가져가시지요.”

이준호 관장은 고수열의 제안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해바라기>가 수작이라고는 하나 첫 전시회, 아직 어떠한 검증도 받지 않은 열 살 아이의 그림이었다.

고수열의 손자이자 고해성, 이수진의 아들이라는 점 때문에 화제는 되겠지만, 첫 작품을 1억 원 이상에 살 사람이 있을까 싶었다.

더군다나 경매장도 아닌 전시회.

경매장의 경우 신인 작가의 그림이 1억 원 이상 고가를 형성하는 경우도 간혹 있었으나 전시회는 달랐다.

가격 경쟁이 붙지 않은 전시회 환경에서 고수열이 제시한 1억 원은 불가능에 가까운 수치였다.

‘손자 사랑에 눈이 먼 건가. 아니면 확신이 있는 건가. 혹은…… 이미 그림을 살 사람이 생겼는지도 모르지.’

이준호 관장이 침을 꿀꺽 삼켰다.

‘어차피 할 수밖에 없는 조정이야.’

고수열과의 관계를 좋게 이어나가기 위한 일이었다.

설사 이미 그림을 살 사람이 정해져 있어, 1할만 챙길 수 있게 되더라도 1,000만 원.

기대 수익이 줄어들 뿐.

자신이 내건 조건보다 손해 볼 일은 없었다.

또 만약 1억 원 아래로 가격이 형성된다면 서울 미술관은 큰 이익을 볼 수 있었다.

이준호 관장이 마음을 정하고는 입을 열었다.

“저야 학장님 바라시는 조건을 최대한 맞춰드리고 싶지요. 하면…… 그렇게 수정하시겠습니까?”

장미래는 고수열을 말리고 싶었으나, 스승이 아무 생각 없이 일을 저지를 리 없다고 생각했다.

계약서를 새로 작성하여 이준호 관장이 서울 미술관을 대표하고 고수열은 고훈의 대리인 자격으로 서명을 마쳤다.

그때 관장실 문이 다급히 열렸다.

“관장님!”

놀란 직원의 부름에 이준호 관장이 의아해했다.

“무슨 일이야?”

“내려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준호 관장이 혀를 차며 직원을 탓했다.

“지금 해송 선생님과 미팅 중인 거 안 보여? 사과드리고 나가 봐.”

“아,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림을 산다는 분이 계셔서…….”

“누구 그림?”

“고훈 작가 그림입니다.”

직원의 말에 이준호 관장이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대로 산다는 사람이 있었으니 1억 원이나 되는 금액을 자신 있게 부른 것이다.

아쉽기는 하지만 이것으로 고수열과의 관계를 지속할 수 있다면 나쁘지 않았다.

“축하드립니다, 학장님. 손자분 그림을 사려는 분이 벌써 찾아오셨네요.”

고수열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라는 듯 차분히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여기 이 비율대로 처리해. 이야기 마무리 짓고 내려갈 테니.”

“그게…….”

평소 하던 일을 하라고 지시했음에도 직원이 머뭇거리자, 고수열과 다음 전시회 이야기를 나누려던 이준호 관장이 답답한 마음에 물었다.

“뭔데?”

“금액이 좀 커서요. 아무래도 내려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얼만데 그래?”

물어보기는 했지만 이준호는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보는 눈이 있으니 체면 때문이라도 1억 원을 정확히 맞추진 않았을 테고 그보다 조금 더 위라고 생각했다.

“28억 원입니다.”

“뭐?”

이준호 관장이 순간 큰 소리를 냈다.

신인 작가 전시회는커녕 유명 작가 초대전에서도 몇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액수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준호 관장이 고개를 돌렸다.

지금까지 차분히 이야기를 진행했던 고수열이 눈을 부릅뜨고 놀라고 있었다.

‘뭐야. 이야기된 일이 아니었나?’

연기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고수열이나 되는 사람이 이 자리에서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다.

“누구예요?”

장미래가 미술관 직원에게 물었다.

대체 누가 그런 거액을 주고 이제 겨우 열 살 된 아이의 그림을 사겠다고 나섰는지 궁금했다.

“앙리 마르소입니다.”

이준호, 고수열, 장미래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 * *

“200만 유로?”

서울 미술관 제3전시실에 김지우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이목이 쏠리고 주변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앙리 마르소 아니야?”

“세상에. 저 갑부가 무슨 일이야?”

“방금 200만 유로라고 하지 않았어? 쟤 그림 사는 거야?”

“미쳤다. 200만 유로면 대체 얼마야?”

다들 앙리 마르소란 남자를 알아보는 것 같다.

거만한 태도와 차림으로 봤을 때 부유한 사람으로 추측하긴 했지만, 그만큼 인지도도 있었던 모양이다.

앙리 마르소는 주변의 변화에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꼬맹이. 그림 가격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모르나 본데.”

“알아요.”

누구보다도 잘 안다.

“세상 사람들이 가장 가지고 싶어 할 그림을 사는 거예요. 200만 유로면 저렴하죠.”

그림 가격은 사실 그림만으로 형성되지 않는다.

그림이 얼마나 예쁜가.

얼마나 좋은 재료를 사용했는가 등 가격을 결정하는 요소는 여럿이지만 그것을 그린 화가가 얼마나 유명하고 인기 있는지에 따라 정해지는 게 대부분이다.

그리고.

화가는 그림을 그리는 것만큼이나 자신을 포장해야 한다.

“가장 가지고 싶어 할?”

“앙리 마르소가 주목한 화가의 첫 출품작이니까.”

“하하하하핳핳하!”

앙리 마르소가 호탕하게 들릴 정도로 시원하게 웃었다.

한참을 그렇게 웃더니 머리를 옆으로 쓸어 넘긴다.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으니 꼭 대부업체 보스처럼 보인다.

“그래. 네 말대로 내가 이 그림을 200만 유로나 주고 사면 넌 단번에 유명세를 타겠지. 가격도 높이 형성될 거야.”

맞는 말이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한국 사람도 아닌 그를 알아볼 정도면 자국이나 해외에서는 분명 더 대단한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그림을 팔았다는 것으로 내 이야기와 <해바라기>도 자연스레 알려질 테고.

“감히 날 이용하려고 들어? 이 앙리 마르소를?”

“맞아요.”

그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착각하지 마, 시건방진 꼬맹아. 내가 사 주지 않으면 네 그림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그런 네 그림을 내가 왜 사야 하지?”

“살 거잖아요.”

“……뭐?”

“내 그림 좋아하잖아요.”

이런 유형의 사람은 많이 상대해 봤다.

그림에 관한 지식이 뛰어나고 재산 또한 넘쳐나는 이런 사람은 욕구에 충실하다.

자제할 이유도 없으며 욕구를 실현할 능력도 있다.

도리어 그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에서 즐거움을 느낀다.

영국의 귀족들이 그러했고.

그것은 지금도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른 작품은 거들떠보지도 않던 그가 내 그림 앞에서 몇 분이나 말없이 있었다.

그는 가지고 싶은 것을 가져야만 하는 사람이다.

비용 따위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 뻔하다.

앙리 마르소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턱을 잔뜩 치켜들고, 반대편 벽으로 다가가 의자에 앉았다.

“아르센.”

“네, 작가님.”

“그림 사러 왔다고 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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