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14화
4. 그림을 팔다(2)
지브라 갤러리를 나선 남자가 신경질적으로 차에 올라탔다.
“믿을 수가 없군.”
“죄송합니다.”
“내가 여기까지 온 이유를 모르는 것 같은데 잘 들어. 난 고나 장의 작품을 사러 왔지 저런 잡동사니나 보러 온 게 아니야. 알아들어?”
“하지만 현재 고수열과 장미래의 작품이 경매로 나온 곳은 없습니다.”
“직접 찾아가면 될 것 아니야! 연락처는 뭐 하러 받아뒀어?”
“그것이…….”
“또 뭐?”
“두 사람 모두 거절하였습니다.”
“……뭐라고?”
부모로부터 막대한 부를 상속받은 앙리 마르소는 비서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화가라면 누구나 앙리 마르소의 콜렉션에 자신의 작품을 추가하고 싶어 했다.
그런 자신과의 만남을 거절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확실해? 누가 연락했는지 알렸어?”
“네. 고수열은 손자 전시회에 참석해야 한다는 이유로 거절했고, 장미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앙리 마르소가 미간을 집었다.
“내가. 이 앙리 마르소가 고작 손자 전시회 때문에 거절당했다고?”
“…….”
“그 말을 믿어? 한 푼이라도 더 받으려고 튕기는 거 아니야! 눈치가 그렇게 없어?”
“죄송합니다.”
앙리 마르소가 나무 상자를 열어 시가를 꺼냈다.
분노를 다스리기 위해 시가 끝을 문질렀다.
“그 손잔지 뭔지가 하는 전시회장으로 가. 직접 만나서 얘기할 거니까.”
“네. 연락 넣겠습니다.”
비서 아르센이 고수열과 장미래에게 차례로 전화를 걸었으나 두 사람 모두 연결되지 않았다.
앙리 마르소가 짜증내며 말했다.
“됐어. 출발해.”
비서가 차를 몰기 시작했다.
‘감히 날 무시해?’
앙리 마르소가 신경질적으로 시가 끝을 잘라냈다.
천천히 불을 붙이고 연기를 길게 음미하고 나서야 흥분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아니지. 아니야. 그래. 그 정도 줏대는 있어야지.’
고수열과 장미래를 높이 평가하는 앙리 마르소는 예술하는 사람이 그 정도 자존심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만나보면 알게 되겠지.’
앙리 마르소가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잠시 후.
서울 미술관에 도착한 앙리 마르소는 제1전시관으로 향했다.
“대표님.”
비서의 부름에 앙리 마르소가 인상을 쓰며 뒤돌았다.
“작가님.”
“죄송합니다. 작가님”
비서 아르센이 고개를 숙여 사과하곤 말을 정정했다.
“전시는 저쪽에서 하고 있다고 합니다.”
앙리 마르소가 비서가 가리킨 방향을 보았다. 신인 작가 전시회를 안내하는 판넬을 볼 수 있었다.
“제3전시실?”
“네. 2층입니다.”
어이가 없어진 앙리가 헛웃음 짓고는 엘리베이터를 찾았다.
“계단으로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가지가지 하는군.”
계단으로 올라 신인 작가 전시회가 진행되는 제3전시실에 이른 앙리가 비서에게 눈짓했다.
“찾으면 연락해. 둘러보고 있을 테니.”
“네.”
지브라 갤러리에서 더럽혀진 눈과 상처 입은 마음을 달래고 고수열을 기다릴 요량이었다.
앙리는 전시된 작품을 보며 천천히 걸었다.
‘사람이 적은 건 좋군.’
작품을 보는 데 방해하는 사람이 없는 것만이 장점일 뿐.
정작 걸려 있는 것들은 수준 이하였다.
간혹 작은 가능성을 보이는 결과물도 있었으나 앙리 마르소의 기준으로 작품은 없었다.
‘시간 낭비였어.’
차라리 지브라 갤러리에 걸려 있는 결과물은 작품인 척이라도 했거늘.
앙리는 고개를 젓고 전시회관 앞에서 고수열을 기다릴 생각이었다.
그렇게 걸음을 서두르는데.
더럽혀진 그의 눈을 씻어내는 광휘가 놓여 있었다.
“…….”
황금을 녹여낸 듯한 색으로 넘실거리는 해바라기.
생명이 깃든 것마냥 섬세한 터치와 과감하게 뻗은 줄기.
상처 난 잎.
이 한 송이의 해바라기만으로 충분하다는 듯, 배경은 흰색으로 칠해져 있을 뿐이었다.
앙리 마르소의 가슴에 태양과도 같은 열망이 자리 잡았다.
* * *
할아버지와 장미래가 그림 판매 관련해서 미술관과 이야기 해보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오전에 비해 사람이 많이 빠져서 의자에 앉아 다른 작품을 구경하고 있는데 그제 본 기자가 또 찾아왔다.
김지우란 이름이었던 것 같다.
“훈아.”
“안녕하세요.”
“어제 기사 봤어? 조회 수 3천이나 됐는데.”
“못 봤어요.”
“왜? 안 궁금해? 댓글 반응도 엄청 좋아.”
“스마트폰이 없어요.”
“아.”
김지우가 자기 스마트폰을 보여주어서 살펴보니 정말 내 기사가 떠 있다.
“정말 기자였네요.”
“안 믿었어? 왜? 나 기자처럼 안 보여?”
“처음 본 사람이 그림 팔아주겠다고 하는 말을 어떻게 믿어요.”
“어……. 그러네. 아무튼, 읽어 봐.”
기사 내용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다.
‘할아버지가 손으로 표면을 이렇게 밀었던 것 같은데.’
옳은 작동법인지 의심하며 따라 하니 아래도 볼 수 있었다.
볼수록 신기한 물건이다.
└좋은데?
└좋긴 한데 오바 좀 치네. 고수열 손자라서 그런 듯.
└이런 건 직접 봐야 함. 가서 보는 거랑 사진으로 보는 거랑 느낌이 달라.
└나만 좋아? 분위기 진짜 좋다. 조금 쓸쓸하면서도 힘 있고.
└색감이 대박임. 어떻게 이런 색을 쓰지?
└나 이거 어제 가서 봤는데 완전 미쳤음. 그림이 빛나는 것 같아.
└ㅋㅋㅋㅋ기레기 이젠 그림 광고까지 하죠. 이건 또 얼마 받았냐?
└아 오늘 좀 우울했는데 이 그림 보니까 좀 풀리는 것 같아. 좋다. 이 전시회 언제까지 해?
└일주일 동안 한대!
└나 솔직히 안 믿겨. 이걸 겨우 열 살짜리 애가 그렸다고?
“…….”
이해 못 할 말이 많지만, 이 반응이 정말 좋은 건가 싶다.
“기레기 이젠 그림 광고까지 하죠. 이건 또 얼마 받았냐가 무슨 뜻이에요?”
“아니, 그런 거 보지 말고. 여기 봐봐. 분위기 좋다는 것도 있고 직접 봤는데 너무 좋았다는 말도 있잖아.”
고마운 사람들이다.
“두고 봐. 내가 너 꼭 유명하게 해줄게. 그럼 네 그림 사고 싶은 사람도 많아질 테니 내가 그림 팔아주는 거나 다름없지.”
예나 지금이나 그림의 가격은 유명세로 정해지는 것 같다.
그림만으로 유명해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만은 그러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저 돈 없는데.”
“돈?”
“바라는 게 있으니까 그렇게 해주시는 거 아니에요?”
“얘는? 내가 진짜 돈 받고 광고 기사나 쓰는 줄 알아? 내가 제목은 자극적으로 써도 그런 적은 없었어. 얘.”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면서 도와주는 이유를 모르겠다.
달리 줄 건 없고 장미래가 심심할 때 먹으라고 준 사탕을 하나 꺼냈다.
“손 줘 봐요.”
“사탕?”
“맛있어요.”
김지우가 망설이더니 입에 넣었다.
“사탕 진짜 오랜만이네.”
“깨물어 먹으면 금방 없어져요.”
관람객도 없겠다.
할아버지와 장미래도 없어서 심심풀이 삼아 수다를 떨던 중.
거만해 보이는 한 남자가 <해바라기> 앞에서 멈췄다.
어두운 갈색 곱슬머리.
깊은 눈과 큰 코.
‘프랑스인인가?’
익숙한 생김새라 눈여겨보고 있었는데 전시된 작품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무례한 사람이다 싶었거늘.
<해바라기>는 마음에 든 모양이다.
“어디서 봤더라?”
김지우가 고개를 갸웃한다.
충분히 감상할 수 있도록 지켜보고 있으니 한 남자가 다가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작가님, 잠시 자리를 비웠다고 해서 주최측에 이야기하고 왔습니다.”
프랑스어다.
그림에 집중한 남자는 그 말이 들리지 않는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작가님.”
“닥쳐.”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나 저리 막 대하는 걸 보니 내가 다 불쾌하다.
그림을 설명할 마음도 사라져 의자에 앉자 다시 입을 열었다.
“이거, 누가 그렸는지 알아 와.”
“네.”
저 불쌍한 남자가 헛걸음하지 않도록 고개를 들었다.
“제가 그렸어요.”
거만한 남자가 턱을 든 채 시선만 내렸다가 기분 나쁘게 위아래로 훑는다.
고개가 아프다.
한참을 노려보더니 그제야 묻는다.
“네가 고수열 손자야?”
“그런데요.”
이제는 저리 좀 가줬으면 하는 남자가 다시 <해바라기>를 보더니 피식 웃었다.
“그래. 그런 거였어.”
그가 상의 안주머니에서 수표 뭉치를 꺼냈다.
“꼬마야, 나 알아?”
“몰라요.”
“앙리 마르소!”
깜짝 놀랐다.
고개를 돌리니 김지우가 다급히 카메라를 꺼냈다.
“저 사람은 잘 아나 보네. 오늘 이후론 너도 잘 기억해야 할 거야.”
앙리 마르소란 재수 없는 인간이 나를 향해 턱짓했다.
앙리 마르소 곁에 있던 남자가 명함을 하나 건네준다.
“첫 전시회라고?”
“그런데요.”
“내가 네 첫 그림을 사 주지. 영광으로 알아.”
뭐 이런 인간이 있나 싶어 명함을 물끄러미 보고 있으니 김지우가 호들갑을 떨었다.
“훈아! 뭐야? 명함은 왜 준 거야?”
“그림 사고 싶대요.”
“히!”
저번에도 생각했지만 이 사람 목소리가 너무 높다.
“정말? 진짜 앙리 마르소가 네 그림 사고 싶대? 왜? 어디가 그렇게 좋았대? 얼마에 사고 싶대? 내 기사 보고 온 거래?”
“이 시끄러운 여잔 누구야?”
“기자예요.”
“아.”
앙리 마르소가 함께 온 남자에게 시선을 주었다.
“마담, 두 분이 이야기 나눌 수 있도록 잠시 자리를 피해주시겠습니까? 상황 설명은 제가 대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가 어눌한 발음과 어색한 억양의 한국말을 했다.
“아뇨. 여기 있을래요.”
남자가 앙리 마르소에게 귓속말을 하니 어쩔 수 없다는 듯 김지우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
“구도와 기법은 구닥다리지만 색 활용은 봐줄 만해. 붓 쓰는 것도 익숙해 보이고.”
앙리 마르소가 <해바라기>를 보며 기분 나쁜 감상을 읊더니 고개를 돌렸다.
“얼마 줄까.”
정장과 구두가 어디서 만든 상품인지는 모르겠지만 장인의 풍모를 내고 있다.
돈깨나 있는 사람인 듯.
사용인을 두고 있으며, 거만한 성격에 얼마를 원하냐고 말하는 것 또한 어떤 금액이든 지불할 수 있는 재력에서 오는 자신감이다.
“당신한텐 안 팔아요.”
앙리 마르소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뭐?”
“내 그림의 가치를 아는 사람에게 팔고 싶어요.”
앙리 마르소가 나를 노려본다.
“뭔데? 응? 무슨 말 하고 있어?”
김지우는 잠시 무시하자.
앙리 마르소가 눈을 감았다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내가 그림 볼 줄 모른단 뜻이냐?”
“네.”
“이 건방진 꼬맹이가.”
앙리 마르소가 가까이 다가왔다.
목이 아프지만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훗.”
웃는 것도 재수 없다.
“10만 유로 주지. 팔아.”
김지우가 필요할 때다.
“아주머니, 10만 유로가 얼마예요?”
“아주머니? 아니, 그건 됐고. 10만 유로나 준대?”
“빨리요.”
“어…… 1억 4,000만 원 정도 될걸? 대박이다. 첫 그림을 1억 넘게 받는 거야?”
이 전시회관과 50 대 50 비율로 나누면 7,000만 원이다.
“거봐요. 모르잖아요.”
도발하니 역시나 거만하고 돈 많은 남자답게 여유롭다.
“그래? 그럼 이 그림이 어떤 가치를 가지는지 알려 줄래?”
“미래에 피카소 같은 화가가 될 사람의 첫 번째 그림이에요.”
“하하하하하핳!”
앙리 마르소가 크게 웃었다.
전시관에 있던 사람들이 다들 이쪽을 보는 게 느껴진다.
그가 <해바라기>를 힐끔 보곤 다시 말했다.
“어려서 그런가? 그래. 어차피 이루지 못할 일. 꿈이라도 커야지.”
“해낼 거예요.”
앙리 마르소의 입가에 미소가 사라졌다.
내게서 떨어져 <해바라기>를 다시 보길 얼마간.
그가 입을 열었다.
“마음에 들어.”
위협적으로 내려다본다.
“그 터무니없는 자신감을 보고 사 주지. 금액 불러.”
앙리 마르소가 손바닥을 위로 보자 곁에 있던 남자가 그 위에 펜을 얹었다.
“200만 유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