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13화
4. 그림을 팔다(1)
전시 세 번째 날.
첫날에는 아홉 명이 와서 누가 왔는지 다 기억할 정도였는데, 오늘은 사람이 좀 더 늘었다.
오전에만 오십 명은 넘은 것 같다.
점심을 먹으려고 할아버지, 장미래와 중국집이라는 곳을 찾았다.
처음 맡아보는 냄새를 풍기는 식당이다.
“훈이 뭐 먹을래?”
“뭐가 맛있어요?”
“짬뽕은 매울 거고.”
“매운 건 싫어요.”
“응. 짜장면 먹을래?”
뭔지 모르겠지만 추천하는 음식이니 아주 나쁘진 않을 것 같다.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은요?”
“글쎄요. 훈아, 쟁반짜장 시켜서 할아버지랑 나눠 먹을까?”
요즘 자주 느끼는 건데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대하는 방법을 잘 모르는 것 같다.
“쟁반짜장이 뭔데요?”
“쟁반에 나오는 짜장면이지.”
“……그릇만 다른 거예요?”
“해물이 더 들어가지 보통?”
할아버지가 장미래를 보며 묻자 고개를 끄덕인다.
“사장님, 여기 쟁반짜장 3인분 주시고요. 훈이 탕수육 먹어봤어?”
“아니요.”
“탕수육도 작은 걸로 하나 주세요. 아, 포크도 하나 주시고요.”
음식을 주문하고 주변을 둘러보는데 할아버지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쯧. 쓸데없는 전화를.”
전화를 받지 않고 소리를 죽였다.
“누군데요?”
“귀찮은 놈이 달라붙었어.”
“앙리 마르소요?”
“장 교수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저한테도 연락 왔거든요.”
“경박한 놈 같으니.”
“흐. 그래도 실력은 진짜잖아요. 사람이 좀 경우가 없어서 그렇지. 왜요? 선생님 그림 사고 싶대요?”
“일없다고 했어요.”
이해할 수 없는 대화라 신경 쓰지 않고 주변을 둘러보는데 길고 얇은 종이에 그려진 뭔가가 눈에 들어왔다.
뱀이라고 하기엔 기품 있다.
수염도 있고.
“그나저나 훈이 그림 팔렸으면 좋겠다.”
장미래의 말에 정신이 들었다.
“팔 수 있어요?”
팔고 싶긴 했지만 그림 거래도 하는 곳인지 몰랐다.
“그럼. 미술관하고 나눠 가져야 하지만. 미술관 쪽에서 얼마에 팔 건지 안 물어봤어?”
들은 적 없다.
고개를 저으니 장미래가 고개를 갸웃한다.
“그럴 리가 없는데.”
계약 내용은 할아버지에게 일임했으니 알고 계신 듯한데 가만히 계신다.
뭔가 이유가 있겠지.
그보다 비율이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다.
“수익은 어떻게 나눠요?”
“50퍼센트.”
도둑놈이 따로 없다.
“너무 크지? 화가들이 없으면 운영도 못 하면서, 어떻게든 한 번만이라도 전시하고 싶은 입장을 이용하는 거야.”
도둑놈인 줄 알았더니 협박 강도다.
“나누지 않는 방법도 있어요?”
“음. 훈이가 장소를 직접 빌려서 전시하면 따로 수입을 나누지 않아도 돼.”
“그렇게 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여러 이유가 있는데 보통은 대관료가 부담스러우니까. 예를 들어 지금 훈이 그림 전시된 전시관 하루 빌리는 데 40만 원 정도 들어.”
비싸다.
할아버지 집보다도 좁은 공간을 하루 빌리는 데 포테이토 피자가 15판이나 필요하다.
“또 초대전이랑 달리 작가가 직접 여는 전시회는 사람들이 찾지 않거든.”
“왜요?”
“갤러리에서 초대받으면 뭔가 있어 보이는데 작가 본인이 돈 들여서 하는 전시회는 뭐랄까. 별로일 것 같다고 생각하니까. 저 작가는 불러주는 데도 없나 봐. 같은 느낌?”
알 것 같으면서도 불합리하다.
“그거 말고도 홍보도 해야 해. 초대전은 갤러리에서 알아서 홍보하지만, 장소 빌리는 것도, 나 그림 전시해요. 찾아와 주세요 알리는 것도 모두 자기 몫이 되는 거야.”
“장소를 빌리는 것만은 아니네요.”
“그렇지. 그래서 50 대 50이란 비율이 문제지, 어느 정도는 나눌 수밖에 없는 구조야.”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라면 타협점을 찾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근데 너 한국말 정말 빨리 는다. 어려서 그런가?”
“받아쓰기 때문에 그래요.”
“받아쓰기?”
할아버지를 보니 괜히 헛기침하신다. 포테이토 피자를 걸고 하는 받아쓰기가 정당치 못하다는 걸 자각하고 계신 듯하다.
“그럼 이제 영어만 하면 되겠다. 한국에서만 있을 거 아니면 영어도 해두는 게 좋아.”
“할 줄 알아요.”
“어?”
“영어, 네덜란드어, 프랑스어, 독일어. 라틴어도.”1)
장미래가 턱과 목 사이에 손을 넣고 고개를 갸웃한다. 눈썹을 잔뜩 모은 것이 믿지 못하겠단 눈치다.
“훈이 그림 얼마에 팔리면 좋겠어?”
장미래가 영어로 <해바라기>가 얼마에 팔리길 바라냐고 물었다.
어딘가의 사투리인지 발음이 조금 특이하다.
어쩌면 할아버지의 프랑스어처럼 시간 차이 때문에 생긴 차이일 수도 있고.
아무튼 <해바라기>는 꽤 공들여 작업했고 스스로도 만족하는 그림이라 그 값어치를 알아보는 사람에게 팔고 싶다.
“그림이 잘 나왔어요. 되도록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에게 팔고 싶은데, 적어도 포테이토 피자 50판 정도는 살 수 있는 돈이어야 해요.”
장미래가 깜짝 놀란다.
그렇게까지 비싼 건 아닌 듯한데 아직 신인이고 하니, 40판 정도 선에서 타협해 줄 수 있다.
“영국에서 배웠어?”
“뭘요?”
“영어.”
“아, 네.”
“혹시 선생님이 엄청 나이 드신 분이셨니? 포시 악센트가 너무 자연스러운데?”
영국에서 그림을 팔려면 그들이 쓰는 영어를 사용해야 했다.
“이게 표준어예요. 이모 영어는 좀 특이해요.”
“얘는? 캐나다에선 이렇게 해.”
“캐나다? 아메리카에 가 봤어요?”
“응. 아무튼 진짜 너 대박이다. 독어는? 독어도 해 봐.”
“무슨 말요?”
“아무거나.”
“……안녕하세요?”
“……인사만 할 줄 아는 거 아니야?”
“갑자기 시키니까 그렇죠.”
여러 나라 말은 당시 유럽인, 특히 나처럼 물건을 파는 사람에겐 기본 소양인데.
어린아이가 몇 개 언어를 하는 게 신기한지, 장미래는 몇 번의 확인 과정을 거쳤다.
“선생님, 얘 정말 천재 아니에요?”
“대체 애를 어떻게 키웠길래 이렇게 많은 말을 할 수 있는지. 훈아, 아빠가 막 혼내면서 가르친 거 아니지?”
고개를 저었다.
“정말 아니야?”
“음식 나왔습니다.”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몰라 난감하던 중 마침 쟁반짜장이란 음식이 탕수육이란 것과 함께 나왔다.
검고 붉은 색도 그렇지만 끈적한 소스까지 그리 맛있어 보이진 않는다.
할아버지가 앞접시에 조금 덜어주었다.
“잘 먹겠습니다.”
아직 젓가락질에 미숙한 탓에 포크를 써서 조금만 입에 넣었다.
감칠맛이 혀를 마비시킨다.
알 수 없는 단맛과 그 사이의 짭짤한 기운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독특한 소스 향까지.
특이하게 생긴 파스타가 이국의 향수를 풍긴다.
“맛있어?”
“네.”
포테이토 피자만큼은 못하지만 적어도 할아버지가 직접 한 음식보다는 훨씬 맛있다.
연거푸 먹다가 문득 고개를 드니 할아버지가 음식을 먹지 않고 빤히 바라본다.
“빨리 드세요. 맛있어요.”
“할아버지는 훈이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르다.”
“그런 게 어딨어요. 안 드시면 배고프죠. 어서 드세요.”
“흐흫. 훈이 말이 맞네요. 어서 드세요, 선생님.”
“크흠.”
할아버지께 쟁반짜장을 덜어드리니 그제야 드셨다.
“그러고 보니 진짜 이상한데. 선생님, 훈이 그림 얼마에 판다고 말씀 안 하셨어요?”
“했지요.”
“아시면서. 얼마 말씀하셨어요?”
“허허. 비밀이에요.”
나도 궁금해서 올려다보는데 머리를 쓰다듬을 뿐 알려줄 생각이 없으신 듯하다.
“보통은 얼마 받는데요?”
“음. 대학 막 졸업한 친구들은 공시가로 5만 원 정도?”
“공시가가 뭐예요?”
“훈이 그림이 어느 정도 선에서 거래된다, 거래하는 게 적당하다고 책정하는 금액이야. 보통 대학 졸업하면 호당 3만 원에서 5만 원 정도 받아.”
“호당?”
“캔버스 1호에 3만 원이라고 가정하면 훈이 그림이 30호니까 90만 원이 되는 거지.”
포테이토 피자를 32판이나 먹을 수 있는 큰돈이긴 하지만 50판 정도는 받고 싶다.
하지만 신인인 걸 감안하면 나쁘지 않은 금액 같다.
“처음 내놓은 건데 그렇게나 받을 수 있어요?”
기쁜 마음에 물으니 장미래가 황당하다는 듯 멈칫했다.
“애 맞긴 맞나 봐요.”
할아버지는 그저 웃을 뿐이다.
“왜요?”
“90만 원이 적은 돈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네 그림에 어울리는 가격은 아니니까. 어제 왔던 김지우 기자님도 오늘 오전에 왔던 사람들도 다들 넋 놓고 봤잖아.”
“포테이토 피자를 32판이나 먹을 수 있는데요?”
한 끼에 한 조각씩 먹으면 256끼니를 행복하게 치를 수 있다.
“네가 쓴 재료비 합치면 100판도 먹을 수 있을걸?”
“네?”
“작업실 가보니 렘브란트에 쉬민케, 루카스, 홀랜드, 마이메리 많이도 썼더만.”
마음에 드는 물감을 찾으려고 이것저것 쓰긴 했다.
“색마다 다르긴 한데 쉬민케면 15㎖ 튜브 하나에 1~3만 원 정도는 해.”
부엉이 그림이 그려진 나무 상자 안에 들어 있던 물감이 생각났다.
서른여섯 개 물감이 들어 있었는데, 이것저것 만들어본다고 다 써버렸거늘.
대체 얼마나 썼는지 모르겠다.
“부엉이 그려진 상자도요?”
“응. 그런 세트 상품은 아마 이삼백 정도는 할걸?”
부드럽고 발색이 좋아 썼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다.
그림 하나 그리는 데 몇백만 원씩 들었다간 아무리 부자라도 남아나는 게 없을 거다.
“장 교수, 돈 이야기 그만 해요.”
할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훈아, 네가 그리고 싶은 게 있으면 뭐든 그려도 돼. 할아버지가 필요한 건 다 사 줄 테니.”
“……네.”
할아버지가 빙그레 웃으신다.
이기적인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할 수 있는 건 뭐든 하고 싶다.
적어도 그림만큼은 타협하고 싶지 않다.
최대한 많이 배우고 익혀서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붓고 싶다.
그러기 위한 비용을 만약 잠시나마 빌릴 수 있다면, 기꺼이 고개 숙여 그림을 완성하고 싶다.
다시는.
전과 같은 삶을 반복하기 싫으니까.
날 위해 헌신한 동생 테오에게 슬픔만 안겨줬던 것을 반복하기 싫으니까.
“대신 꼭 그림 많이 팔아서 갚을게요.”
“허헣허. 그래. 갚을 필요 없으니까 좋아하는 그림 그리며 살면 돼. 할아버지한테는 그게 제일 좋아.”
“싫어요. 갚을 거예요. 집에 가면 물감이랑 캔버스, 붓 얼마인지 알려주세요.”
“싫다.”
“왜요?”
“어느 할아버지가 손자 돈을 받아?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어서 밥이나 먹어.”
“쓸데없는 말 아니에요. 중요한 일이에요.”
“쓰읍. 할아버지 화낸다?”
“그럼 저도 그림 못 그려요.”
“이 녀석이? 그림은 왜 못 그려?”
“눈치 보이니까요. 그러니까 그림 좀 그리게 빌려주세요.”
“아니, 빌리고 갚는 일이 아니라니까 그러네?”
“할아버지가 돈을 받겠다고만 하시면 마음 편하게 그림 그릴 수 있는데 왜 자꾸 곤란하게 하세요?”
“신경 쓰지 말라고!”
“쓰이는 걸 어떡해요!”
“아니 이 녀석이 누굴 닮아 이렇게 고집이 세?”
“흫흐. 선생님 닮았죠, 뭐. 그치?”
장미래의 도움에 고개를 끄덕였다.
“허참.”
할아버지가 기가 막힌다는 듯 물을 마셨다.
“좋다. 훈이 너, 사람이 한 번 약속한 일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거 알지?”
“네.”
“조건을 달으마. 네가 필요한 건 뭐든 해달라 하고 나중에 갚아. 자잘하게 말고. 그래. 10억씩 갚아. 그럼 됐지?”
“와……. 나도 저런 말 듣고 싶다.”
할아버지와 동시에 장미래를 보았다. 정말 부러워하는 것 같다.
‘어떻게든 못 갚게 하려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화상으로서의 경험을 살려봐야 할 듯싶다.2)
* * *
1)빈센트 반 고흐는 영어, 네덜란드어, 프랑스어에 유창했다. 독일어에도 능했으며 목사가 되기 위해 공부했던 만큼 라틴어도 익혔던 만큼 당시 지식인이었다.
강대국이었던 영국과 프랑스 말은 여러 나라와 인접해 있고 그 사이에서 교역하며 사는 네덜란드인뿐만 아니라 당시를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강요된 일이기도 했다.
화상으로 활동했던 빈센트 반 고흐는 그런 환경 속에서도 특히나 여러 언어를 익혀야만 했다.
2)화상(畫商): 그림을 파는 장수.
빈센트 반 고흐는 16세 때부터 큰아버지의 주선으로 구필 화상의 점원으로 근무, 이후 1876년 해고될 때까지 그림을 판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