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12화 (12/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12화

3. 천재(5)

신인 화가 전시회를 취재하고자 서울 미술관을 찾은 김지우 기자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없냐?’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작가와 직원 말고는 찾아온 사람이 손에 꼽았다.

‘하긴 인물이 없긴 하지.’

순수 미술은 이미 대중과 가까운 문화가 아니었다.

그나마 고수열이나 장미래 같은 인물 덕분에 명맥을 이어가고 있으나 그마저도 국내보다는 해외에서 더 인정받고 있었다.

더욱이 출판 시장의 쇠락이 겹치니 문화‧예술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잡지 <예화>는 경영난에 허덕였다.

‘이러다 굶어 죽는 거 아닌지 몰라.’

김지우 기자는 의욕 없이 전시장에 발을 내디뎠다.

‘이건 괜찮은데.’

세 작품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모두 표정 없는 여성이었는데 마치 복사한 듯 똑같은 그림이었다.

다만 여성이 입은 옷과 바탕이 각기 다른 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모두 빨간색 계열이었지만 채도와 명도가 각기 달랐다.

색에 따라 인상이 확연히 다른 것을 의도한 듯했다.

김지우가 작품 앞에 서 있는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작가님이시죠?”

“아, 넵.”

“같은 그림이고, 색 계열도 비슷한데 작품에 따라 인상이 많이 다르네요.”

“네. 이건 좀 차가워 보이죠. 이건 또 도발하는 것 같고. 빨간색에도 여러 이미지가 있는데 그 안에도 상반되는 이미지가 있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김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왜요?”

“네?”

“빨간색 안에 상반되는 이미지가 있는 걸 왜 보여주고 싶으셨어요?”

“그게. 저……. 우리에게 있는 고정 관념을 지적하고 싶었어요. 색에 투영한 이미지는 색의 본질이 아니고 우리가 덧씌운. 그런 이야기죠.”

왜 이런 작품을 만들게 되었냐는 질문에 작품을 해설하고 나섰다.

‘얘도 텄네.’

김지우는 고개를 저었다.

이 전시회에서 그나마 눈길을 끄는 작품이길래 질문을 던졌지만 돌아오는 건 실망뿐이었다.

젊은 미술가 중에서는 자신의 깨달음을 남이 모른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럴듯한 작품을 만들면서 정작 자기 작품에 대한 깊은 고찰이 없었다.

아주 단순한 대답이라도 좋았다.

그럴듯하고 현학적인 대답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 작품을 왜 만들었어요?’라는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하는 사람을 찾고 있었다.

‘이 사람만의 문제는 아니지.’

김지우는 적당히 전시장을 둘러보다가 한숨을 내쉬길 반복했다.

그러다 모서리를 돌았을 때.

숨이 턱 막혔다.

단 한 송이의 해바라기.

배경도 없이 그저 캔버스를 한쪽에 피어난 해바라기였다.

착각일까.

선명한 노란색이 스스로 빛나는 것 같았다.

‘미쳤나 봐.’

등줄기로 타고 올라온 짜릿함이 온몸으로 번졌다.

김지우 기자는 입술을 꼬집으며 그림을 자세히 살폈다.

유화 물감을 덧칠해서 질감을 살리는 임파스토 기법.

아주 고전적인 방식이었다.

현재 신인 작가 전시회는커녕 어디서도 이런 방식을 추구하는 작가는 없었다.

어차피 빈센트 반 고흐란 거장의 아류가 될 뿐이니까.

그러나 이 그림은 달랐다.

줄기는 마치 수묵화처럼 강렬하게 뻗어 있었다.

한 번에 그린 듯 붓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그것이 상처 난 해바라기 줄기의 표면처럼 보였다.

잎사귀도 마찬가지.

무심하게 붓을 뭉개서 표현한 녹색 물감 덩어리가 어떻게 저리도 생명력을 보이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가장 놀라운 것은 꽃잎과 해바라기 가운데 빽빽하게 피어 있는 대롱꽃.

빛나고 있다.

눈부실 정도로 밝은 노란색으로 그려진 해바라기 꽃잎은 바람에 살랑이는 것처럼 생기 넘쳤다.

거친 붓 자국이 꽃잎의 표면처럼 어울렸다.

‘이거 안 섞고 그냥 쓴 것 같은데?’

유화 물감을 섞지 않고 그대로 발라 명암을 주었다.

대체 얼마나 숙련되어야 이렇게 자연스러울 수 있을까.

정교하게 찍은 해바라기 대롱꽃 또한 임파스토 기법으로 두께를 가진 만큼 입체적으로 다가왔다.

“…….”

비어 있는 여백 때문일까.

이 찬란히 빛나는 해바라기는 몹시 외로워 보였다. 상처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빛을 발하는 그 모습이 그렇게 고상할 수 없었다.

동양화와 서양 유화.

그 만남이 가슴에 와닿았다.

‘……갖고 싶다.’

김지우는 실로 오랜만에 그림을 가지고 싶단 욕망을 느꼈다.

‘누구야?’

대체 누가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

작가 이름은 고훈.

이 가슴 설렌 작품을 만든 작가를 찾으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꼬마 한 명이 있을 뿐이었다.

“얘.”

똘망똘망하게 생긴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들떠 보였다.

“여기 있던 사람 못 봤니?”

“누구요?”

“이 그림 그린 사람.”

“저예요.”

“그래?”

필기구를 꺼내려던 김지우가 순간 멈칫했다.

“뭐라고?”

“제 그림이에요.”

학교는 들어갔을까?

김지우가 고훈과 <해바라기>를 번갈아 보았다.

“어? 엥?”

“어땠어요?”

말도 약간 어눌하게 하는 아이가 이런 그림을 그렸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정말? 정말 네가 그렸어?”

고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자기 그림을 처음 보러 온 사람이 어떤 기분이었는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훈아, 의자 가져왔어.”

그때 장미래 교수가 작은 의자를 하나 들고 왔다.

김지우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장미래 교수님? 안녕하세요, 예화에서 나온 김지우입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잠시 당황했지만 장미래가 웃으며 인사를 받았다.

“네. 안녕하세요. 훈아, 여기 앉아. 할아버지 이야기 좀 하고 오신대.”

“네.”

고훈은 대답만 하고 의자에 앉질 못했다. 그저 김지우가 어떤 기분을 느꼈는지 듣고 싶을 뿐이었다.

“취재 나오신 거예요?”

“네! 교수님은 어떻게 오셨어요? 지인이나 학생이 참가했나요? 아니면 혹시 후원?”

“흫. 구경 왔어요. 친구 첫 전시회라서요.”

장미래가 웃으며 고훈에게 눈길을 주었다.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김지우의 눈에 자신을 바라보는 소년이 들어왔다.

“이거, 정말 얘가 그린 거예요?”

“네. 정말 잘 그렸죠.”

김지우가 가릴 생각도 못 하고 입을 벌렸다.

* * *

“너 몇 살이야? 그림 어디서 배웠어? 정말, 정말 네가 그렸어? 어떻게?”

그림이 어땠냐고 물었거늘 대답은 하지 않고 질문만 쏟아낸다.

말은 또 얼마나 빠른지, 내가 한국말에 익숙하지 않긴 해도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응? 언제부터 그렸어? 누가 그려준 건 아니고? 학교는 어디 다녀?”

정신없는 사람이다.

다행히 장미래가 나서주었다.

“한국말이 아직 어색해서 잘 못 알아들을 거예요.”

“네?”

“프랑스에서 오래 살았거든요.”

“아. 그럼…….”

“천천히 말하면 알아들어요.”

성격 급한 사람이 쪼그려 앉았다.

눈높이를 맞춰주는 건 고마운데, 이번에는 말없이 빤히 바라볼 뿐이다.

첫 전시회의 첫 사람부터 이상한 사람이 걸렸다고 생각할 즈음 그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저 그림 왜 그렸어?”

이상한 질문이다.

그리지 않고는 어쩔 수 없는 것에 이유가 있을까.

‘아니.’

근본적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것은 확실하다.

“팔려고요.”

내가 그릴 수밖에 없었던 것을 타인이 알아준다는 건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림을 그리고 팔고, 사는 일은 그러한 의미다.

그리고 ‘팔지 못하는 화가’의 비참함은 누구보다도 뼛속 깊이 알고 있다.

결국 그림을 그리고 파는 행위는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을 찾는 것.

그것이 근본이다.

“…….”

“…….”

장미래도 이 사람도 반응이 없다.

내 질문에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도 배려해서 답해주었거늘.

예의 없는 사람이다.

“팔려고?”

“네. 사고 싶을 수밖에 없게 그리고 싶었어요.”

또 대답이 없다.

입을 살짝 벌린 채 눈을 깜빡일 뿐이다.

기분이 상해 다른 사람은 안 오나 싶어 복도를 보려는데 갑자기 내 손을 덥석 잡았다.

“내가 팔아줄게!”

“네?”

“사고 싶은 사람 엄청 많을 거야. 나도 사고 싶거든! 이 누나가 꼭 유명하게 해줄게.”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어 장미래를 보니 평소와 같이 웃는다.

“좋겠네. 기자님이 기사 써 주신대.”

홍보를 해주겠단 뜻인가.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지금 안 되면 나중이라도 괜찮아. 전시회 끝날 때까지 기다릴까?”

좀 이상한 사람인 듯싶지만 내 그림을 신문에 실어준다니 거절할 이유는 없다.

“할아버지께 여쭤보고요.”

“할아버지? 어디 계시는데?”

마침 걸어오신다.

“저기요.”

고개를 돌린 여자가 또 호들갑을 떨었다.

“고, 고수열. 해송 고수열 화백 손자였어? 아트 디렉터 고해성, 이수진 아들?”

참 요란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래! 그러니까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지. 고수열 화백하고 고해성, 이수진에게 배웠을 테니까. 그치? 그렇지? 그림 몇 살 때부터 그렸어? 몇 년이나?”

“10년 정도요.”

미간을 잔뜩 찡그리더니 나를 위아래로 훑는다.

“……너 몇 살인데?”

* * *

2027년 11월 14일 오후 4시.

월간 예화 SNS에 김지우 기자의 관람 후기가 칼럼 형식으로 등재되었다.

[10살 천재의 해바라기 초상]

13일 토요일.

서울 미술관에서 주최한 이번 신인 작가 전시회관은 한적한 분위기 속에서 개최되었다.

서울 미술관 담당자는 지금까지 기회를 얻지 못한 신인 작가들을 조명하기 위해 21점의 작품을 전시토록 하였으며, 앞으로도 이러한 기회를 확대하겠다고 전했다.

<빨강>, <여울> 등 우수한 작품이 눈길을 끄는 가운데 필자의 마음에 와닿은 작품은 고훈의 <해바라기>였다.

그림이 빛날 수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전해야 좋을까.

고훈은 색을 활용할 줄 안다.

대담한 붓 터치로 뻗은 줄기에서는 해를 올려다보기 위한 해바라기의 강력한 의지가 느껴지며.

눈부신 카드늄 옐로는 마치 해를 삼킨 듯했다.

단 한 송이의 해바라기는 대체 무엇을 그리워하고 있을까.

고훈이 바라는 태양은 무엇일까.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인터뷰를 요청했다.

Q. 자기소개를 부탁한다.

A. 고훈입니다. 열 살이에요.

Q. 그림은 언제부터 그렸나.

A. 10년 정도 그렸어요(프랑스에서 살았던 고훈이 한국말에 익숙하지 않기에 질문을 잘못 이해한 듯하다).

Q. <해바라기>는 어떤 작품인가.

A. 자화상이에요.

Q. 자세히 설명해달라.

A. 대단한 화가가 너무나 많아요. 파블로 피카소, 칸딘스키, 샤갈, 르네. 저는 아직 그 사람들을 동경하고 있으니까 해바라기.

Q. <해바라기>를 그리게 된 동기는 무엇이었나?

A. 팔고 싶었어요. 사고 싶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강렬한 그림을 그리려고 했어요.

팔기 위해 그림을 그렸다는 열 살 소년의 말은 현재 순수 미술계의 참담한 현실을 꿰뚫고 있다.

지금도 값비싼 재료비에 허덕이며 어렵게 작품활동을 이어나가는 수많은 화가를 대변하고 있다.

그림은 가진 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사고 싶을 수밖에 없는 그림.

스스로 소통하길 거부하면서, 관념만을 외치는 주류 미술계에 경종을 울리는 말 아닌가.

그에 비하여 과거 위대한 미술가를 언급하면서 그들처럼 되고 싶다는 열 살 소년의 <해바라기>는 얼마나 순수한가.

나는 열 살 천재의 손에서 탄생한 <해바라기>의 때 묻지 않은 찬란함 앞에서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김지우(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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