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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반 고흐-11화 (11/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11화

3. 천재(4)

전시회에 내걸 그림이라고 한다면 역시 유화뿐이다.

색연필도 먹도 좋지만 가장 익숙한 재료로 최선을 다하고 싶다.

할아버지가 가진 유화 물감을 살폈다.

이렇게나 색이 다양하다니.

세상이 참으로 좋아졌다.

상자에 담긴 것과 가지런히 정리된 것을 합치면 오늘 다 살펴볼 수 있을지 모를 정도로 많다.

한 상자 가득한 물감을 보고 있자 마음이 풍족해진다. 심지어 예전에는 너무 비싸서 엄두도 내지 못했던 색도 있다.

물감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다.

색을 표현하는 과정이 전보다 훨씬 수월할 듯싶다.

‘전시회라니.’

그나저나 이렇게나 빨리 기회를 잡을 줄은 몰랐다.

끝내 비참할 수밖에 없었던 경험을 토대로, 이번에는 조급해하지 말고 차분히 실력을 쌓아가자고 마음먹었다.

지금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는지, 그간 미술은 어떻게 흘러왔는지 알아보고자 했다.

놀랍게도.

세상에는 파블로 피카소와 같은 천재로 가득했다.

프랑스의 작은 마을에 머물러 있던 내 시야가 얼마나 좁은지 알 수 있었다.

앞으로 대체 어떤 화가가 나를 또 놀라게 해줄지 설렌다.

그들을 만나고 싶지만 그렇다고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수도 없는 법.

지금은 내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 한다.

「별이 빛나는 밤은 좋은 자리를 얻지 못했지만, 아이리스는 잘 걸렸어. 멀리서도 시선을 잡아끈다니까? 생기 넘치는, 정말 아름다운 그림이야.」

내 그림이 앙데팡당전에 전시될 수 있도록 도와준 테오.1)

매달 부쳐주는 돈으로도 모자라 먼저 나서서 전시회에 출품하자고 권해준 착한 내 동생.

좋은 자리를 잡아주었음에도 별다른 반응이 없어 낙심했지만, 이듬해에는 개인 전시회를 열자고 한 번 더 응원했었다.

“…….”

행복하게 살았을까.

몸이 안 좋아 보였는데.

주머니 사정도 어려워졌고.

10년 넘게 응원한 형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니 원망도 많이 했겠지.

그래도.

용서받지 못할 일을 저지르고도 이렇게 다시 붓을 잡은 날, 너만은 응원해 주겠지.

용기를 주겠지.

‘아니.’

나약해져선 안 된다.

기적처럼 찾아온 또 다른 삶을 전과 같이 비참하게 반복할 순 없다.

‘가장 나다운 그림이라.’

그렇다면 그릴 것은 단 하나.

심상은 명확하다.

나를 가장 잘 표현할 것은 하나뿐.

해바라기.

내 안의 해바라기, 태양을 품은 황금빛 꽃뿐이다.

차분히.

30F 캔버스를 바라보았다.

하얀 종이 위로 색이 번진다. 황금이 녹아내리듯 찬란한 노란색이 조금씩 형태를 잡아간다.

가슴속에서 들끓는 이 열기를 담아 그 흐름에 따를 뿐이다.

‘없나?’

크롬 옐로가 필요해 찾으니 없다.

물감통을 뒤져도 어찌 된 일인지 이 많은 물감 사이에 가장 중요한 색이 없다.

“할아버지.”

거실로 나가자 할아버지가 이상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무릎 굽히고 엎드려서 눈은 까뒤집고 혀를 내밀고 있다.

“……뭐 하세요?”

“요가. 이리 와서 같이 하자.”

“싫어요.”

“매정하긴.”

“그보다 크롬 옐로가 없어요.”

할아버지가 민망한 자세를 풀고 눈썹을 좁히셨다.

“아마 큰 통으로 있을 거다.”

할아버지가 작업실로 들어가기에 따라가니 내 몸통보다 조금 작은 철제 통을 꺼내셨다.

“왜 이렇게 커요?”

“요즘엔 잘 안 나와. 개량한 물품은 나오는데, 몸에 안 좋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잘 안 쓰거든.”

“몸에 안 좋아요?”

“왜. 전에 납중독 이야기하지 않았느냐. 크롬 옐로에도 들어 있지.”

가장 많이 다루고 그만큼 먹기도 한 물감이 크롬 옐로였다.

몸에 안 좋은 일은 참 가지가지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물감을 안 쓸 수도 없는 법.

꼭 있어야 할 색이다.

“개량품은 튜브에 든 것도 있을 거다.”

할아버지가 스마트폰을 찾았다. 뭐라 검색하시더니 턱을 쓸었다.

“내일 한번 알아봐 주마.”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그래. 뭐 그리려고?”

“해바라기요.”

“해바라기?”

뜬금없단 표정이다.

“나중에 보면 아실 거예요.”

“자신 있는 모양이구나. 그런데 물감을 구해주긴 하겠지만 어지간하면 다른 방법을 찾는 게 어떠냐.”

“왜요?”

“크롬 옐로는 변색이 심해. 빛에 오래 노출되면 갈변되기도 하고 심하면 회색조를 보이기도 하고.”

변색이 있는 것은 어느 정도 알고 있긴 하다.

“그렇게나 심해요?”

“음. 네 눈으로 직접 보는 게 빠르겠지. 어디…….”

할아버지가 TV를 켜시더니 스마트폰으로 뭔가를 조작했다.

여러 화면이 쓱쓱 지나가는데, 도대체 저 마법 같은 일을 어찌 저리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지 신기할 뿐이다.

“자, 이것 봐라.”

화분에 빈센트라고 서명된 해바라기 그림이다.2)

정말 많이 닮긴 했지만 내 그림은 아니다.

저런 칙칙한 색을 사용한 적 없다.

그런 생각을 하며 자세히 살피는데.

“어.”

내 그림이다.

나만의 방식은 아니긴 해도 물감을 두텁게 바르는 방식이 나와 너무 똑같다.3)

“어때. 아마 반 고흐가 보면 깜짝 놀랄 거다.”

놀랐다.

“크롬 옐로에 크롬산염이란 성분이 들어 있는데, 그게 LED 조명에 반응하면 변색이 빨라져.”

“LED 조명이 뭐예요?”

“말 그대로 조명이야. 전기요금이 적게 나와서 많은 전시회관에서 사용했지. 지금은 변색을 유도하는 것 때문에 스마트 LED란 걸로 교체되고 있다고 하더라.”

설마 조명 때문에 그림이 이렇게 달라질 줄은 몰랐다.

이 정도면 고려할 수준이 아니라 섞든 찾든 물감을 바꿔야 한다.

“다른 걸 찾아볼게요.”

“그래. 잘 생각했다. 안 되겠으면 할아버지한테 물어보고.”

“네.”

작업실로 돌아와 노란색 계열 물감을 쭉 나열했다.

그나마 마음에 드는 색은 카드뮴 옐로 계열이다.

“훈아.”

“네.”

“거기 책상 아래 보면 나무 상자 있을 텐데 그것도 써 봐라. 부드러울 거야.”

책상 아래를 보니 부엉이가 그려진 나무 상자가 보인다. 펼쳐 보니 36색 물감과 붓 몇 자루가 들어 있다.

물감 나이프도 있고.

한눈에 봐도 비싸 보인다.

“이거 정말 써도 돼요?”

“그럼. 먹으면 안 된다?”

“안 먹어요.”

482번 코발트 바이올렛이 무슨 맛일지는 조금 궁금하다.

“후우.”

숨을 한 번 크게 내쉬고 물감을 짰다.

몸이 작고 힘이 없어 오랜 시간 큰 팔레트를 들고 그리는 건 어려울 것 같다.

캔버스도 몸에 비해 큰 편이고.

물감을 적당히 내려놓고 일어섰다.

침을 삼키고 붓을 들었다.

다시 그리는 <해바라기>.

나는.

황금으로 일렁이는 그곳을 그리지 않고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타오르는 태양을 온전히 받아들인 밀밭과.

그 은혜로 잉태한 밀을 땀 흘려 가꾸고 수확하는 농부의 노동보다 숭고한 행위가 또 있을까.

나는.

그런 이들의 태양이 되고 싶었다.

그럴 수 없다면 밀밭에 떨어진 한 줌 이삭이라도 되어, 정직하게 땀 흘린 농부에게 작은 위로를 건네고 싶었다.

고단한 몸을 이끌고 가족과 함께 나누는 저녁 식탁에 작은 희망을 놓고 싶었다.

내일도 일할 수 있는 용기를 주고 싶었다.

광인이어도 좋았다.

이해받지 못해도 좋았다.

저 높이 창공에서 힘차게 타오르는 태양이 아니라도 좋았다.

비록 그림을 팔지 못하는 화가라고 해도 육신이 움직이는 한 태양을 그렸다.

단지 그뿐이었는데.

손이 말을 듣지 않았다.

발작은 시시때때로 찾아오고 환청이 이성을 잠식해 나갔다.

저 찬란한 빛을 그리는 일마저 허락되지 않기에, 살아갈 이유를 잃었기에 스스로 삶을 끝냈다.

해 바라기.

태양을 동경하는 해바라기처럼.

이제 그럴 수조차, 그릴 수조차, 그리워할 수조차 없는 나는 해 바라기.

고개를 들 수 없는 시든 해바라기.

다시 태어난 해 바라기.

어두운 흙 속에서.

태양의 은혜로 싹 틔워 그 밝은 빛을 영접한 작은 해바라기.

모진 바람에도 굴하지 않는 그런 해바라기를 그리자.

해가 될 수 없다면 적어도 태양처럼 찬란한 빛날 수 있도록.

캔버스에 물감을 올렸다.

* * *

‘벌써 시간이.’

손자에게 매일 피자만 먹일 수도 없다고 생각한 고수열은 요리 공부를 하다가 문득 시계를 확인했다.

자정을 지나고 있었다.

작업실 문틈으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림을 그리다 그대로 잠든 모양.

고수열은 몸을 일으켜 작업실로 향했다. 혹시나 깰까 싶어 조심스레 문을 열자, 땀을 뻘뻘 흘리며 붓을 놀리는 손자를 볼 수 있었다.

“훈.”

자야 할 시간이라고 말하려던 그의 눈에 고훈의 그림이 들어오고.

순간 말문이 막혔다.

마치 태양을 삼킨 듯한 해바라기 한 송이가 살아 있는 듯 호흡했다.

꽃잎 하나.

대롱꽃 하나마다 각자의 생명을 가지고 한 송이의 꽃으로 기능했다.

배경은 없었다.

마치 수묵화처럼.

단 한 송이의 해바라기만이 빛났다.

이 얼마나 숭고한 자태인가.

‘맙소사.’

손자가 재능이 있다는 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어린아이답지 않게 소묘가 제법 사실적이고 독특한 화풍을 보였으니까.

처음 본 한국화에 빠져 그린 <새집>이 퍽 마음에 들었으니까.

그러나.

캔버스 위에 유화 물감으로 완성되어 가는 <해바라기>는 달랐다.

세계 각국의 비엔날레 주최측이 간절히 모시길 바라는 고수열마저도 그 기백에 압도되었다.

그림이 어떻게 빛날 수 있는가.

단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손을 뻗는 고훈의 붓끝에서 생명이 태어나고 있었다.

전율.

<해바라기>가 완성되어 갈수록 고수열은 온몸의 세포가 깨어나듯 전율했다.

그렇게 넋을 놓고.

고훈이 그림을 완성하고 땀을 닦을 때까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붓을 내려놓은 고훈이 몇 발 뒤로 물러서 그림을 확인한 뒤에.

고개를 돌렸다.

고수열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자신을 올려다보며 미소 짓는 손자를 번쩍 들어 올렸다.

“하핳하! 이 녀석아! 이 녀석아!”

화가로서도.

할아버지로서도.

이보다 행복할 수 없었다.

* * *

1)앙데팡당(Indépendants: 독립적인): 앙데팡당전은 조르주 쇠라, 오딜롱 르동, 폴 시냐크를 주축으로 한 독립미술가협회가 1884년 개최했다.

기존 아카데미즘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심사와 시상식 없이 진행되었다.

빈센트 반 고흐, 앙리 마티스, 툴루즈 로트렉 등 인상주의 이후 화가들이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지금도 3,000명의 회원을 유지한 채 매해 개최되고 있다.

2) 해바라기, 빈센트 반 고흐, 캔버스에 유채 물감, 1888

3)임파스토(Impasto: 반죽된): 물감을 두텁게 바름으로써 질감을 더하는 채색 기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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