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10화
3. 천재(3)
“어…….”
“장미래라고 해. 훈이 엄마랑 아빠 후배야. 할아버지 학생이고.”
어디 아픈 건가?
피눈물을 흘린다는 말은 들어본 적 있어도 검은 눈물은 생전 처음 본다.
“우리 훈이 엄청 씩씩하네? 엄마 아빠도 기쁘실 거야.”
검은 눈물을 흘리는 여자가 웃는다.
위로하려는 건 알겠는데 거리를 두고 싶다.
“괜찮아. 울어도 돼.”
만약 내가 아이였다면 반드시 울었을 것이다.
가까이하고 싶지 않아 몸을 뒤로 빼니 장미래 씨가 손을 붙잡았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음?”
고개를 돌려 도움을 요청하자 마음을 추스르던 할아버지가 나와 장미래 씨를 보더니 황당하게도 웃고 말았다.
“헣허헣. 훈이 꿈에 나오겠네.”
“네?”
할아버지가 그녀에게서 날 구출하며 화장실을 가리켰다.
“악!”
잠시 후 그녀의 비명이 들렸다.
놀란 가슴을 진정하며 물었다.
“눈물이 검었어요.”
“하하. 화장 때문에 그런 거야. 사람 눈물이 검을 리가 없잖아.”
프랑스에서 살 적에 몇몇 여성이 가끔 속눈썹을 만들어 붙이거나 눈 주변에 그림을 그린다는 말을 듣긴 했는데.
이렇게나 기괴한 일인지 몰랐다.
* * *
피자를 기다리며 그리던 걸 계속 이어가고 있는데 장미래 씨가 말을 걸었다.
“뭐 하고 있어?”
따라 그리던 것을 보여주자 한눈에 알아본다.
“숙조도네? 조속도 알아?”1)
대학교수라더니 금방 알아본다.
젊다기보단 아직 어려 보이는데도 대단하다.
“오늘 처음 봤어요.”
조속이란 화가는 붓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나뭇가지의 형태와 몸단장하는 새의 모습이 이보다 사랑스러울 수 없다.
“세상에. 똑같다. 항상 이렇게 연습해?”
“네. 따라 그리다 보면 구도를 왜 이렇게 잡았는지 알 수 있어요. 선이나 명암 같은 것도.”
“대단하네.”
“다들 그러지 않아요?”
당연한 일을 대단하다고 하니 의아하다.
“글쎄. 따라 그리는 사람은 많지만 어떤 의도인지 깊이 생각하는 경우는 많이 없을걸?”
생각 없이 따라 그리는 건 아무 의미 없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한결같을 리 없으니 대충 수긍하곤 붓을 들었다.
“수묵화 좋아하나 봐.”
장미래 씨가 또 말을 걸었다.
“쉽고 깊어요.”
“음?”
“다른 배경 없이 나무랑 새만 그렸잖아요. 새에만 집중할 수 있고 형태도 단순하고.”
“응.”
장미래 씨가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게 호응했다.
“그런데 이 새가 어디 있는지, 어떤 상태인지는 확실하지 않아요. 저는 깃털을 고르는 것 같은데 책에는 졸고 있는 모습이라고 하더라고요.”
“응응.”
“나뭇가지를 표현한 방식도 멋져요. 붓에 망설임이 없잖아요. 단순해 보이지만 이건 나무로밖에 생각할 수 없는 질감이에요. 이렇게나 많이 생략했는데도 그렇게 보일 수 있으니까 공부할 만해요.”
말을 마치자 장미래 씨가 미소 지었다.
“대단하다. 훈이 정말 똑똑한데?”
칭찬은 언제 들어도 익숙하지 않다. 할아버지에게서 과할 정도로 받고 있지만 타인에게는 처음이다.
조금 신이 난 탓인지 묻지도 않은 말을 꺼냈다.
“이 사람 아들 그림도 재밌어요.”
“아들?”
“네. 조지운이라고 아버지가 그린 숙조도랑 같은 구도를 그렸어요.”
보고 있던 책을 몇 장 넘겨서 조지운의 <매상숙조도>를 찾아주었다.
“정말이네?”
“계절이 다른 것 같아요. 표현은 더 섬세해졌고. 아버지의 그림을 더 발전시킨 거예요.”
“그러게. 멋있다.”
참으로 멋진 아버지와 아들이면서 동시에 선후배 관계다.
다시 그림을 따라 그렸다.
“훈아.”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장미래 씨가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선생님이랑 같이 전시회 해보지 않을래?”
잘못 들었나?
“전시회요?”
“응. 그림 발표하지 않은 사람들 위주로 여러 점 모아서 하는 전시회야. 훈이 그림 걸면 좋을 것 같은데. 어때?”
이 사람이 나의 무엇을 믿고 이러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찾아온 기회를 놓칠 수 없다.
“할래요.”
“좋아. 시원시원한데?”
멋지게 웃는 사람이다.
“다음 달 첫 번째 주 토요일까지 전시회에 걸 그림 하나 그려주면 돼. 시간이 부족하면 그렸던 걸 줘도 되고.”
고개를 끄덕였다.
3주 정도 있으니 새로 그려도 충분히 여유롭다.
“그럼 선생님하고 약속할 거.”
“약속?”
“응. 약속.”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는 다른 사람 그림 따라 하지 않기.”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다.
“그리고 훈이가 제일 좋아하는 거 그리기.”
“다른 조건은 없어요?”
“응. 테마 전시가 아니니까. 누가 봐도 이건 훈이 그림이다! 싶은 그림을 그리는 게 좋아.”
확실히.
여러 화가가 함께하는 합동 전시회라면 개성이 두드러져야 이목을 끌 수 있다.
가장 나다운 그림이라.
“할아버지.”
안마 의자에 앉아 있던 할아버지가 졸고 있다.
“할아버지!”
“어? 왜, 왜. 피자 왔냐?”
“캔버스랑 유화 물감 쓰고 싶어요.”
“갑자기?”
“네. 써도 돼요?”
“그래. 쓰는 거야 상관없지. 그런데 뭐 하려고?”
“유화 그릴 거예요.”
“허허. 수묵화는 이제 질렸어?”
“아니요. 재밌어요.”
“그럼?”
“마드모아젤 장미래 씨가 전시회에 출품하자고 했어요.”
고개를 돌려 호응을 구하니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다.
설마 방금 한 약속을 모른 척할 생각은 아니겠지.
“흐흫흐흐. 이 녀석아, 마드모아젤은 뭐고. 장미래 씨는 또 뭐야.”
“그럼 뭐라고 불러요?”
성과 이름을 빠짐없이 부르고 격식도 차렸다.
아주 모범적인 호칭이다.
“아주머니~ 해야지.”
그게 더 기분 나쁘지 않나?
오늘 처음 만난 사이에 막 부르는 감이 없지 않아 있다.
“선생님!”
나도 할아버지도 깜짝 놀랐다.
그렇게 큰 목소리는 처음 듣는다.
“저 아직 만으로 스물아홉이에요!”
할아버지가 장미래 씨의 시선을 피한다. 스승과 제자 사이라고 들었는데 무섭다.
나를 보더니 웃는다.
“선생님이라고 하면 돼. 앞으로 훈이한테 그림 가르쳐 주려고 온 거야.”
차라리 화를 낼 때는 화를 내는 사람이 낫지, 화 내다가 웃을 수 있는 사람은 위험하다.
“마음은 감사하지만 거절할게요.”
“어? 왜?”
무섭다고 말할 수 있을 리 없다.
“선생님은 많아요. 여기 나온 사람 모두 선생님이에요.”
수묵화 모음집을 들며 말했다.
“혼자서는 모르는 것도 있잖아. 선생님이 알려주면 엄청 쉬울 텐데?”
“마드모아젤 장미래 씨가 가르쳐 주는 것만 정답은 아닐 거예요. 그림의 정답은 그것을 보는 사람 수만큼 있으니까.”
존경하는 화가는 많지만 그들에게서 특별히 가르침을 구한 적 없다.
그들의 이상과 관념, 구상은 모두 그림에서 찾을 수 있다.
구태여 화가의 이상을 말로 들을 필요는 없다.
말은 뱉는 순간 상하니까.
최대한 많은 그림을 접하며 그 안에서 취사선택할 뿐, 누군가의 이성이 강하게 개입된 문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만약 그것을 편하고 옳은 길이라고 여겼다면 진즉에 아카데미에 들어갔을 터다.
“좋아하는 그림 보는 걸로 충분해요. 이렇게 따라 그려보면서 이해할 수 있어요.”
장미래 씨가 충격받은 듯했다.
“선생님, 얘 정말 열 살 맞아요?”
“하핳하하! 날 닮아서 아주 똑 부러져요. 그렇지, 훈아?”
“좋아하실 일이 아니잖아요. 나중에 대학은 어떻게 하고요.”
마드모아젤 장미래 씨가 대학 걱정을 한다.
“안 갈 거예요.”
“그것도 좋지.”
할아버지는 내 말은 뭐든 다 좋다고 하신다.
“훈아, 음. 대학을 가는 건 엄청 좋은 일이야. 좋아하는 그림 공부하고 싶지 않아? 정말 많은 걸 알 수 있어.”
“바라는 건 그림에서 다 찾을 수 있어요.”
“찾기 힘든 것도 있고 그림만 봐선 이해하기 힘든 것도 있거든.”
“숨겨진 걸 찾는 게 재밌는데 누가 가르쳐 주면 무슨 재미가 있어요. 그리고 누가 답을 알려주면 더 찾아보지 않게 되잖아요.”
“하하하! 그렇지. 그렇지.”
할아버지가 웃으며 맞장구친다.
“그리고 그림만으로 이해할 수 없는 건 관심 없어요.”
장미래 씨가 입을 살짝 떼고 고개를 갸웃한다.
“그런 건 제가 바라는 그림이 아니에요.”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는.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내가 바라는 것을, 내 생각과 감정을 말이 아니라 그림으로 전하는 일이다.
남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그림은 외롭다.
그 처절함은 뼛속 깊이 느꼈다.
말없이 나를 바라보던 장미래 씨가 미소 지었다.
“그렇구나.”
그녀는 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다.
나를 설득하려고도,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도 피력하지 않았다.
겨우 열 살 아이를 대하면서도 이렇게나 진솔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그림은 어떻게 그려야 한다.
요즘엔 어떤 그림이 인기 있더라.
네 그림은 그런 게 문제다.
그런 말을 내뱉던 사람들과는 격이 다른 인격자다.
“아쉽다. 난 훈이랑 같이 미술 공부하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내가 장미래 씨의 말을 오해한 듯하다.
“좋아요.”
“어?”
“혼자 그리면 외롭잖아요.”
어느 한쪽이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동료라면 얼마든지 사귀고 싶다.
* * *
장미래 교수는 피자를 먹자마자 작업실에 틀어박혀 유화 물감을 다루는 고훈이 그저 신기했다.
두 시간 남짓 함께했을 뿐인데, 저 어린아이가 그림에 얼마나 진지한지 알 수 있었다.
“누가 해성 선배 아들 아니라고 고집이 엄청나네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녀의 입과 눈은 웃고 있었다.
“우리 집안 내력이지. 그래. 장 교수가 보기엔 어때요?”
“걱정돼요. 정말 미대에 안 갈지는 모르겠지만 졸업장 없으면 이런저런 제약이 붙을 테니까요.”
고수열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입시 미술 때문에 힘들어할 거 뻔히 아는데 강요할 수도 없고. 정해진 틀대로 그리게 하기엔 너무 아깝잖아요.”
장미래 교수는 입시 미술에 지친 학생을 너무나 많이 봐왔다.
뛰어난 감각을 가진 아이들이 입시 미술이란 틀에 자신을 맞추다가 흥미를 잃는 경우도 있었다.
그것은 비단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영국, 프랑스에서도 공부했지만 그곳이라고 다른 것은 없었다.
“그리고 가장 걱정되는 건 지금 풍조예요.”
동시대 미술을 하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경향과 고훈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작품을 단지 ‘이야기할 거리’로 여기는 동시대 미술가들은 작품이 이해받길 바라지 않았다.
그것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는지에 무게를 두었다.
이해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받길 바라지 않는 미술.
직접 설명하길 바라는 미술.
그런 분위기 속에서 고훈이 얼마나 고뇌할지 생각하면 걱정이 앞설 수밖에 없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고수열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글쎄. 또 모르죠.”
“네?”
“어딘가 뒤틀린 이 경향이 언젠가는 변할지도. 장 교수도 그러길 바라고 있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앞서 걱정하지 말아요. 장 교수와 장 교수를 따르는 학생들 그리고 훈이 같은 아이들이 소통하는 미술을 간절히 바란다면 또 흐름이 바뀔 수 있어요.”
고수열은 손자의 그림에서 받은 그 충격적인 인상을 믿었다.
고훈의 그림은 사랑받을 거라고.
오랫동안 쌓은 지식과 예술가로서의 혼이 말해주었다.
“그런데요.”
“음?”
“왜 아까부터 프랑스어로 대화하는 거예요? 안 불편하세요?”
* * *
1)숙조도(보물 527호), 조속, 17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