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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반 고흐-9화 (9/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9화

3. 천재(2)

고수열 교수는 손자의 그림을 걸어두고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자택 정원을 수묵화로 그린 <새집>은 이 아이가 일주일 전만 해도 먹물을 찍어 먹던 아인가 싶을 정도로 훌륭했다.

‘공부할 줄 알아.’

고수열은 손자의 놀라운 표현력보다 그림을 익혀나가는 과정에 뿌듯해했다.

아이답지 않았다.

첫날에는 차분히 먹물의 특성을 이해하고자 했다. 온종일 먹을 직접 갈면서 농도를 조절해 나갔다.

둘째 날에는 붓으로 선을 그었다. 얼마나 많이 쓰는지 저녁때가 되었을 땐 작업실 전체가 한지로 가득했다.

고수열은 그것을 하나하나 살핌으로써 고훈이 붓 사용법을 익히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무의미한 반복 행동이 아니었다.

힘을 얼마나 주어야 원하는 대로 선이 나오는지 익히기 위해 하루를 꼬박 선만 그은 것이었다.

그 끈질긴 지식욕이 대견했다.

셋째 날에는 종이를 구겼다.

한지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고훈은 자신이 원하는 질감을 얻기 위해 표면이 매끈한 한지를 구겨서 먹물이 잘 흡수되는지 확인했고, 또는 얇은 한지를 여럿 덧대어 그려 보기도 했다.

자신이 사용하는 재료의 특성을 스스로 연구하고 관찰하는 과정에서 이 아이가 범상치 않음을 알 수 있었다.

단순한 재능의 영역이 아니었다.

그림을 그리는 과정을 알고 있기에 이 아이가 앞으로 얼마나 성장할지, 어떤 그림을 그리게 될지 너무나 기대되었다.

그런 생각을 하니 그의 입가에 어느덧 미소가 어렸다.

똑똑-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선생님, 저 미래예요.”

“오, 장 교수. 들어와요.”

고수열이 반갑게 손님을 맞이했다.

문을 열고, 작년에 한국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에 처음 부임한 장미래 교수가 들어왔다.

“히.”

그녀가 멋쩍게 웃었다.

고수열이 의아해하자 장미래 교수가 문을 닫으며 입을 샐쭉거렸다.

“왜 그래요?”

“선생님이 존대하시니까 진짜 이상하단 말이에요. 전처럼 불러주세요.”

“그럼 안 되지. 이젠 내 학생이 아니잖아요.”

“왜 아니에요? 선생님은 선생님이시잖아요.”

고수열이 흐뭇하게 웃었다.

한국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영국 에딘버그 회화과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한 장미래는 고수열이 가르친 이들 중에서도 특히나 아끼는 사람이었다.

31살에 한국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조교수로 있을 정도로 학계에서도 인정받고 있었다.

“그래요. 오늘은 무슨 일로 괴롭히려고 오셨나.”

“선생님도 참. 제가 언제 괴롭혔다고 그러세요.”

“하하하!”

장미래는 곧잘 따르던 선배 고해성과 이수진의 장례식을 잊을 수 없었다.

그녀 역시 너무나 힘들었지만 아들 부부를 잃고 상심한 은사가 위태로워 보였다.

고수열의 그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섣불리 위로할 수도 없었기에 걱정하던 차, 출근하셨단 이야기를 듣고 부랴부랴 학장실을 찾았다.

그런데, 두 달 만에 만난 고수열이 전과 같이 웃자 마음이 놓였다.

“그냥 인사드리려고…….”

말을 얼버무리며 앉으려던 장미래의 눈에 처음 보는 그림이 들어왔다.

한적한 분위기의 정원을 그린 수묵화였다.

빛과 그림자, 반사광이 너무나 적절히 잘 표현된 수묵화는 마치 동서양의 기풍을 아우르는 듯했다.

먹으로 그린 유화.

언뜻 수더분해 보이는 붓 터치로 표현한 그림이 이다지도 인상적일 수 없었다.

누구의 그림일까.

대체 어떤 대가가 이러한 시도를 하였는지 궁금했다.

“선생님, 이거 누구 그림이에요?”

“훈이가 선물로 그려줬어요.”

“훈이? 수진 선배님 아들이요?”

장미래가 놀라 되물었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고수열의 반응에 그녀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열 살 아니었어요?”

“제법이죠?”

“제법이라뇨. 이건. 이런 건.”

어릴 적부터 그림에 재능 있는 아이는 많았다.

장미래 본인도 그런 부류였다.

그러나 어렸을 때의 재능이란 사물을 얼마나 정확히 그릴 수 있는지에 국한된 일이었다.

어린아이의 그림에는 명료한 철학과 깊은 사색을 통한 관념이 있기 힘들었다.

그러나 고훈의 수묵화는 달랐다.

단지 농도 조절과 붓칠을 통해 풍경을 상세히 묘사한 것으로 모자라 동양화가 가진 멋을 그대로 내포하고 있었다.

왼쪽에 두 그루의 소나무가 서 있고 잔디, 돌담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그 외의 사물은 없었다.

그러나 완벽하게 표현된 빛과 어둠이 공백에 빛이 내리고 있음을 알려주어 눈부시게 빛나는 아침 정원을 보여주고 있었다.

열 살이 그릴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한국대학교 동양화 전공 학생이 그렸다고 해도 믿지 못할 수준이었다.

장미래는 어느덧 사실 여부를 따질 생각도 못 한 채 한동안 고훈의 <새집>에 빠져 버렸다.

고수열은 그런 장미래를 흐뭇하게 지켜보다가 커피를 타기 시작했다.

커피포트의 물이 끓고.

내린 커피를 반쯤 마신 뒤에야 장미래가 정신을 차렸다.

“선생님.”

장미래가 마음을 굳게 먹고 말했다.

“다음 달에 서울 미술관에서 신인 작가 전시회 있어요. 추천 의뢰받았는데, 이 그림 내봐요. 아니, 내야 해요.”

장미래는 이 독특하면서도 따사한 작품이 여러 사람에게 사랑받을 거라고 확신했다.

이런 작품은 꼭 널리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안 돼요.”

“……네?”

그러나 고수열은 단호했다.

“여기에 걸어둘 거예요. 훈이가 선물한 걸 양보할 수 없죠.”

장미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시면 안 되죠! 엄청나잖아요! 발표되면 분명 다들 훈이를 알게 될 거라고요.”

“흠.”

고수열이 신음하며 고민했다.

“그래도 저건 안 돼요. 그림은 하루에도 몇 장씩 그리니까 그중에서 찾아보죠. 오늘 저녁에 괜찮아요?”

뒤통수를 맞은 듯했다.

“저런 걸 하루에 몇 장씩 그린다고요?”

“어떻게 된 녀석이 그림만 그려요. 그림 못 그려서 죽은 귀신이라도 붙었나? 하하하!”

장미래는 여전히 썰렁한 농담을 하는 고수열을 보며 일단은 안심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고해성, 이수진의 아들이라고만 알고 있던 고훈이 대체 어떤 아이인지 궁금했다.

이만한 수묵화를 그린다면 재능도 재능이겠지만 아주 어렸을 적부터 동양화를 그렸을 터였다.

빛 표현과 섬세한 묘사는 아마 할아버지와 부모의 영향을 받았을 터.

“네. 6시까지 댁으로 갈게요.”

“그래요. 허허. 같이 가도 되고.”

“저야 좋죠.”

장미래가 막 방을 나서려는데 고수열이 그녀를 불러세웠다.

“장 교수.”

“네?”

“우리 훈이 그림이 전시회에 걸고 싶을 정도로 좋다, 이 말이죠?”

“네.”

“하핳하하. 그래요?”

“그럼요. 선생님도 아시잖아요. 이런 그림 그리는 애 후배 중에도 없어요.”

“그래요? 어디가 어떻게 좋던가요.”

인제 보니 일부러 모른 척 자랑하는 것이었다.

“손자가 얼마나 귀여우면 우리 선생님이 팔불출이 되셨을까.”

“하핳핳하!”

* * *

거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분 냄새가 났다.

고개를 돌리니 젊은 여자가 서 있다.

눈이 크고 입술은 꼭 물감을 바른 듯 빨갛다.

여기 있는 동안 젊은 여자가 찾아온 적은 처음이다.

문도 열어주지 않았는데 들어온 것을 보니 할아버지와 가까운 사이인 듯한데.

나를 보는 표정이 안쓰럽다.

그리움인지 안타까움인지 알 수 없는 감정으로 애틋하게 바라본다.

‘아.’

그간 아무 말이 없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뭔가 사연이 있었던 모양.

그러지 않고서야 저렇게 안타깝게 바라볼 이유가 없지 않은가.

“어머니?”

여성이 눈을 크게 떴다.

표정을 보니 아무래도 맞는 듯하다.

할아버지도 병원 사람들도 모두 내가 기억을 잃었다고 생각하니 어느 정도 추측해서 행동해야 한다.

“안녕하세요.”

“어? 으응. 안녕.”

일어서서 한국말로 인사하자 고훈의 모친이 당황해하며 인사했다.

“훈아, 할아버지 왔다!”

마침 할아버지가 들어오셨다.

현관으로 나가 맞이하니 와락 끌어안는다. 민망하지만 매번 이러니 내가 포기해야 할 듯싶다.

“어머니도 오셨어요.”

“어머니?”

고개를 돌려 젊은 여성을 보니 그녀가 당황했다.

“저…….”

“훈아, 어머니가 아니라 할아버지랑 함께 일하는 분이야.”

“아.”

문을 열어주지도 않았는데 들어올 수 있는 만큼 가까운 사이라는 점과 나를 대하는 얼굴 때문에 확실하다고 생각했거늘.

실수하고 말았다.

“착각했어요. 죄송합니다.”

고개 숙여 사과하니 여성이 입을 막았다. 꼭 울 것 같다.

그녀가 할아버지께 물었다.

“아무것도 기억 못 하는 거예요?”

“기억하는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고. 이야기를 안 해서 삼가고 있었는데 엄마 아빠가 보고 싶었던 모양이에요.”

“어떡해…….”

한국말이라 완전히 이해하긴 힘들지만, 눈치를 보니 이 아이의 부모에게도 무슨 일이 있는 듯하다.

‘죽은 건가.’

그런 거라면 모든 일이 이해된다.

그러지 않고서야 아들이 위급한데도 찾아오지 않을 리 없으니까.

그간 새로운 그림에 빠져 깊게 생각하지 못했다.

“괜찮아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하는 할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돌아가신 거죠?”

“훈아.”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죽은 이 아이의 몫까지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뿐.

내 욕심이지만.

이분께 손자 된 도리를 다하는 것으로 조금이나마 ‘고훈’에게 미안함을 전하고 싶다.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오오, 훈아.”

“괜찮아요. 할아버지가 있잖아요.”

할아버지가 또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이 착한 것을 두고…….”

나도 이제 마음을 다잡아야겠지.

이 아이로 살게 된 이상 이분을 진심으로 대해야 한다.

그런 생각 이전에.

자식과 손자를 모두 잃은 이분을 연민 때문이라도, 두 달간 함께하며 어느새 생긴 정 때문이라도.

슬프게 하고 싶지 않다.

마을 사람도, 친척도, 형제마저 심지어 부모님께도 이해받지 못했던 내게 사랑을 주신 분이니까.

“울지 마세요. 제가 있잖아요.”

“훈아.”

할아버지가 나를 꽉 끌어안기에 힘겹게나마 안아드렸다.

그렇게 끌어안고 있기를 얼마간.

숨이 막힌다.

바둥거리자 할아버지가 팔에 힘을 풀고 눈물을 훔쳤다.

“그러면 이분은 누구세요?”

입을 막고 같이 울던 젊은 여성을 보며 물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코를 들이마시더니 자세를 낮추고 고개를 들었다.

눈높이를 맞춰준 덕분에 목이 아픈 일은 없는데.

검은 눈물을 흘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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