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8화
3. 천재(1)
WH배움 미술관에 다녀온 뒤로 한국화에 푹 빠졌다.
고대 미술관만 구경하는 데 하루를 꼬박 쓰고 말아 다른 곳은 들르지 못했으나 지금은 한국화를 공부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동양 미술은 파리에서 유행이었던 우키요에를 통해 접한 적 있는데, 인접한 나라면서도 조선과 일본 두 나라의 화풍은 전혀 달랐다.
일본이 강렬한 원색을 사용한다면 조선은 색을 좀 더 자연스럽게 활용했다.
물론 조선에도 진채화라는 화려한 양식이 있었으나 작품 수가 많은 수묵화는 전반적으로 자연스러운 표현 속에 그윽한 심상을 담아냈다.
특히 할아버지가 소개해 준 화가 김홍도와 신윤복은 자연 풍경뿐만 아니라 당시 사람들의 일상을 그렸다는 점에서 무척 마음이 간다.
풍속화를 그린 사람이 나라 제일의 화가로 인정받았다고 하니, 조선이 상당히 개방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씨름이구나.”1)
한국 전통 그림을 모아둔 책을 보고 있는데 할아버지가 다가왔다.
<씨름>이란 제목인가 보다.
“네가 보기엔 재미없는 그림이라 생각했는데.”
확실히 눈이 즐거운 그림은 아니다.
하지만 공감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무척이나 흥미롭고 뜻깊은 작품이다.
300년 이상 된 사람들과 마음을 교감할 수 있지 않은가.
“재밌어요. 사람들 표정도 즐겁고. 가운데 두 사람은 뭐 하는 거예요?”
서로를 붙잡고 다투는 듯하다.
“저게 씨름이야. 상대를 넘어뜨리는 운동 경기지.”
레슬링과 비슷한 겨루기다.
“여기 뭐 나눠주는 사람은요?”
“나눠주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아마 엿을 팔고 있을 거란다.”
“엿?”
“그래. 딱딱하고 단 간식이야.”
“맛있어요?”
“호박엿이 맛있지. 근데 이가 부러질 수 있어서 잘 먹어야 해.”
대체 얼마나 맛있길래 이가 부러질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고 먹을까.
그림을 계속 들여다보고 있자니 할아버지가 물었다.
“그렇게 재밌어?”
“네. 여기, 이 사람들은 내기하는 것 같아요. 누가 이기는지.”
그림에 담긴 뜻을 이해하는 것으로 이 그림을 그린 화가 김홍도는 물론, 당시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다.
그림은 마음으로 전하는 편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든.
또 먼 과거라도 같은 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림에 그려진 이들이 운동 경기를 즐기는 마음과 그 일상이 어떠할지 생각하면 즐겁다.
나도 그랬으니까.
“이런 그림을 그려도 최고의 화가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게 신기해요.”
“신기해?”
“네. 풍속화는 보통 저급하다고 했으니까.”
장르 페인팅.
풍속화는 프랑스 왕립 미술 아카데미(Académie royale de peinture et de sculpture)에 의해 등급 외 그림으로 낙인 찍혀 오랜 세월 기피의 대상이었다.
할아버지가 날 이상하게 본다.
“왜요?”
“네가 알기엔 어려운 내용인데. 애비가 알려주든?”
“애비가 뭐예요?”
“아빠.”
사투리를 쓰시니 한국어 공부가 더 어렵다.
아무튼 달리 설명할 길이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왜 그림에 그런 등급을 매겼는지도 알고?”
안다고 했다간 괜한 의심을 살 것 같아서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빙그레 웃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프랑스 왕립 미술원은 루이 14세가 만들었단다. 아주 강력한 왕권을 꿈꾸며, 국가의 모든 것을 자기 지배 아래에 두려고 했지. 미술도 예외는 아니었어.”
맞는 말씀이다.
“왕을 찬양하는 화가를 양성하려던 거야.”
탐욕에 찌든 더러운 돼지는 프랑스 위에 군림하는 신이 되길 바랐다.
모든 예술 행위를 자신을 우상화하는 방향으로 강제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왕과 국가에 충성하는 영웅적 인물을 그리게 했어.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과 프랑스에 충성하라고 말이야.”
“역겨워요.”
“그렇지. 역겹…… 떽! 나쁜 말 쓰면 안 돼.”
“…….”
“그래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구나.”
어이가 없어 웃으니 할아버지도 크게 웃었다.
“아무튼. 프랑스 왕립 미술원의 폐단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단다. 워낙에 당시 미술계를 지배했고 스페인이나 영국에서도 따라 해서 여기저기에 뿌리 깊게 박혀 있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야.”
나보다 한 세대 앞선 화가들은 그러한 경향에 용기를 보였다.
비록 불명예스러운 조롱을 받았으나 당당히 싸워나갔고 그 의지는 나와 로트렉, 폴 고갱 같은 여러 화가의 귀감이 되어주었다.
그런데도 그 폐단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니.
할아버지 말씀처럼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지금은 어떻게요?”
“흠. 예를 들어 입시생들에게 석고상을 그리게 하는 것도 왕립 미술원에서 이어진 교수법이지. 사실 정확한 묘사를 하려면 그렇게 이상적인 형상의 석고상을 그릴 필요는 없는데 말이야.”
할아버지 말씀이 맞다.
석고상을 그리게 한 이유는 묘사력을 키우는 명목으로 영웅화된 인물을 반복해 그리게 함으로써 국가와 왕에게 충성을 다하라는 뜻을 숨기고 있다.
당시에는 화풍마저 푸생과 루벤스를 따라 하게 했으니 아카데미 출신 화가는 예술가가 아닌 기술공이나 다름없었다.
지금은 그런 것이 많이 사라졌지만 그들이 남긴 교수법은 여전히 남아 있는 듯해 씁쓸하다.
“너무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었나 모르겠구나.”
“이해했어요. 아카데미는 적폐라는 말씀이잖아요.”
“하하핳! 그런 말도 알아? 그래. 적폐지. 그래도 이 녀석아, 할아버지가 명색이 교수인데 그럼 써?”
“할아버진 그렇게 안 가르치잖아요.”
나를 대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뛰어난 화가이자 학자, 교육자면서 내 생각을 충분히 말할 수 있게 배려하는 이분이 프랑스 왕립 미술원처럼 학생을 가르칠 리 없다.
“그래. 잘 아는구나.”
할아버지가 머리를 잔뜩 헝클었다.
다시 한국화 모음집으로 시선을 돌렸다.
김홍도와 신윤복의 그림을 계속 보고 있자니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먹이라는 것도 다뤄보고 싶다.
“이거 먹으로 그렸다고 하셨죠?”
“그래. 써 보고 싶어?”
“있어요?”
“찾아보면 있을 거다. 끙.”
할아버지를 따라 작업실로 향했다.
피자 그림이 어제보다 좀 더 진행되었다.
볼 때마다 감탄할 수밖에 없다.
일단은 색연필을 활용해서 상세히 묘사하는 걸 연습하고 있으나, 저 정도 수준이 되려면 한참 멀었다.
“여깄네.”
할아버지가 구석에 있는 서랍장에서 검은 돌 두 개를 꺼냈다.
하나는 납작하고 하나는 길다.
뭐 하는 물건인지 몰라서 그저 바라보고 있으니 손에 쥐여주었다.
무겁다.
“이 납작한 걸 벼루라고 하고 이건 먹이라고 한단다. 벼루에 물을 넣고 먹을 갈아서 쓰는 거지.”
안료를 갈고 물에 개어서 쓰는 상당히 고전적인 방식이다.
나조차 물감은 상인에게 사다 썼던 만큼, 이 오래된 방식으로 어떤 그림을 그릴 수 있을지 기대된다.
“자, 이건 붓.”
붓도 내가 쓰던 물건들과 상당히 다르다.
네덜란드나 프랑스에서는 털이 짧고 빳빳한데, 이쪽은 털이 상당히 길고 풍성하다.
힘을 주면 아주 두껍게 쓸 수 있지만, 힘 조절을 잘하지 못하면 그림을 망칠 수도 있겠다.
“가는 붓은 없어요?”
“있지. 단봉, 중봉, 장봉. 장봉 중에서 더 큰 붓도 있고.”
역시 미술이 발달했는데 붓 크기가 하나로 고정되어 있을 리 없다.
“그 외에도 채색붓이나 세필이라고 서양 붓처럼 빳빳하고 짧고 작은 것도 있는데, 할아버지한테는 없구나.”
넘겨짚고 말았다.
채색화를 그릴 때는 안료를 칠하기 효과적인 붓이 따로 있고 수묵화는 털이 풍성하고 부드러우며 긴 붓을 사용해서 그리는 듯하다.
숙련하려면 상당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할아버지가 시범을 보여줄 테니 잘 봐.”
“네.”
할아버지가 벼루에 물을 넣고 먹을 갈았다.
단면을 벼루에 딱 붙이고 천천히 한 방향으로 갈자 물이 점점 검게 물들어간다.
130년도 더 지난 현대에 오게 되어 이렇게 오래된 방식을 접하게 되니 감회가 새롭다.
“신기해?”
“네. 채색화 그릴 때도 이렇게 준비했어요?”
“그래. 안료를 곱게 갈아 물과 섞어 사용했지.”
확실히 농도가 중요한 재료다. 물이 많은 만큼 덧칠하는 데 한계도 있으니까.
점성은 어떨까.
궁금해서 손가락으로 먹물을 찍어 먹었다.
점성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조금 더 갈거나 물을 줄이면 어떨까 고민하는데, 할아버지가 부리부리한 눈을 당장에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뜨고 있다.
“이 녀석아! 그걸 왜 먹어!”
“느낌이 어떤지 보려고요.”
물감의 특성을 파악하기에 혀보다 좋은 부위도 없다.
촉감이 발달해 있으니까.
“당장 뱉어!”
“컵!”
할아버지가 갑자기 날 뒤에서 안고 배를 꽉 눌렀다. <씨름>도 이렇게 격렬하진 않을 거다.
“잠.”
“뱉어! 토해!”
너무 아파 숨도 안 쉬어지는데 몇 번을 반복하다 보니 구역질이 나왔다.
“으읇꾸으으읍.”
바닥에 검은 침을 뱉고 나서야 멈추었다.
정신이 없다.
“큰일 난다! 어? 아무거나 주워 먹으면 큰일 나! 먹을 게 없어서 먹을 먹어?”
이게 무슨 봉변인가.
할아버지가 놀란 나를 화장실로 데려가 씻겼다.
주변을 정리한 뒤에도 계속해서 강조했다.
“그런 거 먹으면 안 돼. 응? 할아버지하고 약속해.”
“왜 먹으면 안 돼요?”
빈센트 반 고흐로 살 적에는 흔한 일이었다.
물감 상태를 알아보기 위해 손으로 만져보거나 필요할 땐 혀로 점성이나 기름이 분리되었는지를 확인했다.
빤 붓에 물감이 조금 남아 있으면 입으로 빨아내기도 할 정도로 일상이었는데 그러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다.
“몸에 나쁘니까! 지지야, 지지!”
“…….”
생각을 정리한 뒤에 물었다.
“안료도 어차피 자연에서 얻은 거잖아요. 유화 물감에 넣는 기름도 먹는 거에서 뽑고.”
할아버지가 황당하다는 듯 바라본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더니 딱 널 두고 하는 말이구나. 훈아, 이 먹이라는 건 풀을 태우고 남은 그을음을 풀로 굳힌 거야.”
뭐가 나쁜 건지 모르겠다.
“게다가 지금은 돌로 만들고. 애초에 돌을 먹어서 몸이 아무 문제 없으면 굶어 죽는 사람이 있겠어?”
확실히 돌을 먹는 건 안 좋을 것 같다.
“물감은 더 해! 네가 좋아하는 반 고흐도 물감 먹다가 죽었어!”
“……네?”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물감이 예뻐 보여도 그 안에 얼마나 무서운 게 들어 있는데. 납이라고 알아?”
모른다.
고개를 저으니 할아버지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혹시라도 먹을 생각 마라. 광물에는 납이라는 게 들어 있는데, 이게 사람 몸에 아주 치명적이야.”
“어떻게 되는데요?”
“처음엔 잇몸이 막 아파. 네가 좋아하는 피자도 제대로 못 먹게 돼.”
“……·.”
확실히.
나중에는 잇몸이 아파 음식조차 제대로 씹지 못했다.
당시 빵은 워낙 질기고 딱딱해서 물을 넣고 잔뜩 끓여야 조금이나마 먹을 수 있었다.
“그뿐이냐. 배도 아프고 빈혈도 생겨. 빈혈 알아? 갑자기 앞이 안 보이고 픽픽 쓰러지는 거.”
당황스럽지만 모두 내가 겪던 증상이다.
“물감 좀 먹었다고 그렇게까지 돼요?”
“아무렴! 그 당시 예술 하던 사람들은 대부분 납중독으로 죽었어. 베토벤도, 반 고흐도.”
실력만큼이나 성격 괴팍하기로 유명한 거장도 납중독으로 죽었다니.
“베토벤도 물감 먹었어요?”
“그 사람이 물감을 왜 먹어!”
그것도 그렇다.
“당시 와인에 넣어서 먹는 감미료가 납을 포함하고 있었어. 베토벤도 반 고흐도 와인이라면 사족을 못 썼으니. 넌 절대 커서 술 마시면 안 된다. 알았지?”
지금껏.
나를 괴롭히던 것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그저 슬퍼하고 화낼 뿐이었다.
불경하게도 가끔은 그런 시련을 내린 신을 원망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무지 때문에 생긴 인재였다니.
믿을 수 없다.
“납이 잇몸이랑 배 아프게 하는 거 말고 또 있어요?”
“그럼! 심해지면 말초신경을 건드려서 몸 안을 아주 엉망으로 헤집어. 그 때문에 몸이 마비된다거나, 정신이상이 생기고.”
“…….”
내게서 그림을 앗아간 것이 납이라는 물질.
다른 누군가의 강요도 아니라 그것을 스스로 마셨다.
무지해서 죽은 것이다.
멍청해서 자초한 일이다.
나는 얼마나 어리석었단 말인가.
분하고 원통하다.
“얘, 얘야. 훈아. 왜 울어? 응? 아팠어? 할아버지가 너무 무섭게 했어? 어?”
고개를 저었다.
“다 훈이 사랑해서. 걱정해서 알려준 거야. 응? 뚝!”
무얼 잘했다고 우는지.
할아버지 때문이 아니라는 뜻으로 눈물을 닦아주려는 손을 피해 스스로 닦으니 오해가 심해졌다.
“이 녀석아, 할아버지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데. 응? 이렇게 꾸중 들었다고 울면 어떡해.”
이분이 아니었다면 또다시 이 몸이 상하는지도 모르고 멍청한 짓을 반복했겠지.
배워야 한다.
전과 같이 후회와 한으로 점철된 끝을 맞이하고 싶지 않다.
크레파스, 색연필, 먹.
다른 여러 물감 등 그 외 내가 모르는 것들로 가득한 이 무궁무진한 세계에서 하고 싶은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이번만큼은.
결코 후회를 남기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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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씨름(보물 527호), 김홍도, 18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