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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반 고흐-7화 (7/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7화

2. 미술관(3)

아무래도 다시 생각해 봐야지 싶다.

“이 녀석아, 길 잃어버리면 어쩌려고.”

손자 걱정하는 마음이야 충분히 이해한다만, 나이 서른여섯 먹고 손잡고 다니기 민망하다.

“빨리 손 잡아.”

“잘 따라다닐게요.”

“쓰읍.”

할아버지가 조금도 무섭지 않은 표정으로 야단친다.

지금까지 느낀 바로 엄하게 교육하려는 듯하지만, 손자를 너무나 사랑하기에 막 대하진 못하신다.

그래. 좋게 생각하자.

이런 이유로 죽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체념하고 얌전히 따라나섰다.

처음 올 때도 느꼈지만 이곳은 상당히 부유한 이들이 사는 동네 같다. 전체적으로 차분하고 깔끔하다. 그 흔한 생활 쓰레기나 오물도 보이지 않는다.

할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오늘 가는 곳은 WH배움 미술관이란 곳이란다.”

들어도 잘 모르기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신했다.

“아주 오래전 작품부터 현대까지 다양하게 있으니 마음에 들 거야.”

“오래전 작품이요?”

“그래.”

“얼마나 오래되었어요?”

“천 년도 넘은 것도 있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역사가 상당히 긴 듯하다.

천 년 전에 만든 미술품이라고 하니 아마 아주 기초적인 단계의 예술작품이겠지만, 동양에선 어떤 식으로 미술이 발전해 왔는지 알아볼 좋은 기회다.

현대 미술만큼이나 동양 미술에도 관심 있으니까.

어쩌면 우키요에 같은 강렬한 심상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자, 여기다.”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도착이라고 해서 놀랐다.

경사를 끼고 오른쪽으로 기이한 형태의 건축물이 자리했고 왼쪽에는 이해할 수 없는 구조물이 있다.

거울처럼 형상을 반사하는 소재로 만들어진 공이 여럿 쌓여 있는 형태다.

일정한 규칙은 없어 보이고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일단 상당히 높아 고개가 아프다.

“저건 뭐예요?”

손가락으로 조형물을 가리키며 물었다.

“글쎄. 먹다 남은 포도송이 같지 않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색을 칠하거나 옆에 먹고 남은 껍질을 두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그런 생각을 전하니 할아버지가 크게 웃었다.

“확실히 그렇구나. 하지만 아마 먹다 남은 포도는 아닐 거야.”

“그럼요?”

“할아버지도 모르겠구나. 같이 한번 생각해 볼까?”

이 나라 최고 대학의 교수라면 알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

“사향고양이 똥이 저렇게 생겼다고 들었어요.”

“크핰핳하! 그래.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그러고 보니 꼭 토끼 똥처럼 보이기도 하고.”

똥 이야기가 자꾸 나오지만 어떻게 봐도 달리 떠오르는 게 없다.

아무리 고민해도 단서를 찾을 수 없다.

처음 느꼈던 기이한 느낌 말고는 아무것도 전해지지 않는다.

시간과 경험의 단절이 있었기에 지금은 어떤 상징이 어떻게 향유되고 있는지 모르는 탓일지도 모르겠다.

“모르겠어요.”

“괜찮아. 모르는 게 당연하니까.”

할아버지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

“현대 미술. 아니, 동시대 미술이라고 하자. 동시대 미술은 애초에 소통하기 위한 행위가 아니란다.”

이해할 수 없다.

“말이 안 돼요.”

“그래? 왜 그렇게 생각해?”

“예술의 근본은 자기표현과 소통이니까요.”

내가 그릴 수밖에 없고 그리고 싶은 것을 가장 나다운 방식으로 표현하고 보이는 일이 예술이다.

일반적으로는 전달할 수 없는 것을 감각을 건드려 전하는 것이 모든 예술 활동의 근본이다.

그런데 소통하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니.

근본이 없다.

할아버지가 씩 하고 웃는다.

“할아버지도 그렇게 생각해.”

미소 뒤에 씁쓸함이 감돈다.

“자, 너무 어려운 이야기는 천천히 하도록 하고. 미술관 구경해야지.”

오르막길을 마저 오르니 상상도 못 한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대한민국만의 건축 양식인지, 아니면 2027년 현재의 주류 양식인지는 몰라도 이 세상 건물처럼 보이지 않는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소재들이 절묘하게 구성되어 있다.

유리로 이루어진 외관의 인공미와 목재의 자연스러움, 대리석으로 세운 기둥의 묵직함이 한데 어우러졌다.

이 건물 자체로 예술이다.

파블로 피카소의 그림과 할아버지의 사진과도 같은 묘사력에 더해 또 한 번 내 상식을 벗어난 아름다움을 경험했다.

천천히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입장권 하나로 다 구경할 수 있어. 고대 미술관, 현대 미술관. 아동문화관에서도 전시회를 한다는구나. 그럼 아동문화관부터…….”

“고대 미술관부터 가요.”

“아동문화관이 더 재밌을 텐데?”

“괜찮아요.”

그곳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혹시나 사람 열 받게 하는 노란 스펀지 같은 게 있다면 피하고 싶다.

쫑알대는 목소리를 듣고 있자면 겨우 벗어났던 환청이 다시금 생길 것이다.

‘아.’

미술관 내부는 말끔했다.

은은한 조명과 함께 예술품을 차분히 즐기기 적절한 분위기다.

전시된 작품들이 경이로우니 실내 분위기라도 이렇게 차분히 맞춘 듯하다.

가장 먼저 본 것은 신발.

‘금속으로도 신발을 만들었구나.’

빛을 반사하는 자태가 은은하고 단아하다. 가지런히 놓여 있는 모습도 참으로 멋스럽다.

“신라 시대 금동 신발이라고. 1,400년 정도 전에 만들어졌다고 하는구나.”

할아버지의 말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모르긴 해도 저 금속을 저리도 얇게 가공하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이다.

어떤 장인이 만들었는지 모르나 더군다나 정확히 똑같은 문양을 신발 전체에 뚫어 넣었으니 그의 손에는 분명 신이 깃들었으리라.

다만 온전한 형태로 보관된 게 아니라는 점이 안타깝다.

대체 1,400년 전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저 은은하고 고풍스러운 외관이 생기를 띠고 찬란히 빛나는 걸 상상하자 가슴이 뛴다.

“허업.”

이곳을 봐도 저곳을 봐도 놀랍다.

대체 신라라는 국가는 어떤 곳이었기에 이다지도 기품 있는 작품을 만들어 냈을까.

특이한 것은 그들의 예술작품이 생활과 관련 있는 점이다.

장식품은 이해하나.

신발과 그릇, 부채 같은 물건에 저렇게 예술혼을 부여했으니 분명 멋을 아는 민족이었을 것이다.

층을 바꾸어 한 바퀴를 돌아볼 즘.

“정선의 인왕제색도라는 작품이란다.”1)

나는 사랑에 빠졌다.

대체 무엇으로 그린 거지?

목탄이 아니다.

유화 물감도 아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물감으로 그린 산 풍경이 투박하면서도 정취가 있다.

안개 덮인 이름 모를 산이 신비롭다. 하단의 집처럼 보이는 건물에는 누가 살까.

이 차분하면서도 기개가 넘치는 인상은 대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무심하게 툭툭 던진 붓 터치로 표현한 산세와 섬세하게 쓸어내린 나무.

이것을 그린 사람은 붓을 사용하는 데 아주 능숙하다.

어떻게 해야 효과적으로 인상을 담을 수 있는지 알고 있다.

사용한 물감은 하나.

물로 농도를 조절하거나 붓에 힘을 주길 달리하면서, 덧칠하는 단순한 방식으로 이렇게나 여러 표현이 가능하다니.

참으로. 참으로 놀랍다.

“이렇게 자연을 다룬 그림을 산수화라고 한단다.”

산수화.

“그리고 먹으로 그렸으니 수묵화.”

수묵화.

이 신비하고 오묘한 기분을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동생 테오가 이 그림을 봤어야 했는데. 로트렉 그 친구가 이 그림을 봤다면 당장에 지갑을 꺼냈을 텐데.

아아. 이것을 볼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정선이란 사람이 인왕산을 보고 그렸지. 그전까지는 실제로 보고 그리는 경우가 많지 않았거든. 직접 보며 그린 산수화를 진경산수화라고 한단다.”

그전까지는 상상에 의지해 그렸고 이 그림은 직접 보고 그렸다?

“아!”

나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고 말았다.

할아버지가 검지를 입에 댔다. 입을 틀어막고 고개를 끄덕이니 빙그레 웃으신다.

“뭔가 알아낸 거라도 있느냐?”

“네. 왜 이렇게 신비한 느낌인지 몰랐는데, 이거. 건물이 있는 쪽은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어요.”

“으흠?”

“그리고 산은 아래서 올려다보고 있잖아요.”

원근법이 무시된 그림이다.

뒤에 있는 산은 더욱 크고 웅장하게 그려져 있고 가까이에 있는 것은 작게 표현했다.

그러나 이 그림이 원근법을 무시하고도 이토록 몰입감을 주는 이유는 보는 사람의 시선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그림 하단을 보면 자연스레 시선이 아래로 깔리고, 지붕부터 그린 그림과 맞물려 마치 공중에서 내려다보는 기분이 든다.

반대로 그림 상단을 보기 위해 올려다보면 거룩한 산세를 목도한 듯한 착각이 든다.

명석하다.

‘폴 고갱이 이 그림을 봤어야 했는데.’

그 친구 성격에 한 수 배운 것으로 자존심이 상했을 터.

직접 보고 그리나, 상황에 맞추어 구도와 배치를 달리하는 그에게 아주 좋은 스승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 * *

고수열 교수는 어린 손자의 관찰력에 놀랐다.

어린아이답게 평소에는 아는 것이 없었다. 어떤 것을 보아도 마냥 신기해하고 질문을 쏟아냈다.

그런 아이가 그림에 한해서는 어찌 이렇게 현명한지 모를 일이었다.

‘수진이가 가르쳤나.’

자신을 닮은 아들 고해성이 이런 시야와 지식을 전달하진 않았을 것 같았다.

고수열은 이수진을 떠올리며 안타까워했다.

그녀는 그림 실력도 뛰어나고 지식도 풍부했으나 무엇보다 그림 보는 눈이 좋았다.

며느리이기 전에 사랑하는 제자였기에 아들을 잃은 만큼이나 안타까웠다.

고수열이 코를 들이마시며 눈물을 훔쳤다.

“그래? 할아버지는 전혀 몰랐는데. 우리 훈이 대단하네.”

고수열은 손자 고훈에게 선입관을 만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놀랍게도 고훈은 이미 스스로 하나의 화풍을 정립해 나가는 과정에 있었고, 나름의 시선에서 그림을 분석할 수도 있었다.

괜히 본인의 의견을 더한다든가 학계의 정론을 알려서 고훈의 가능성에 덧칠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답을 주기보다는 질문을 하여 스스로 생각하길 유도하고 함께 생각하길 제안했다.

그런데.

“대학교수가 모를 리 없잖아요. 여기 이 종이는 뭐예요? 물감은요? 붓은 어떻게 생겼어요?”

손자 고훈은 그런 것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지식을 갈구하는 마음이 얼마나 큰지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어 안달이 나 보였다.

마치 스펀지처럼.

동양과 서양, 현대와 과거를 가리지 않고 탐했다.

“이 녀석아, 하나씩 물어야 알려주지.”

고수열이 웃으며 타박하니 고훈이 환하게 웃었다.

6년 만에 다시 만난 손자의 얼굴에서 그토록 환한 미소를 처음 보았다.

고수열은 목 아래가 묵직해짐을 느끼며 손자를 쓰다듬었다.

* * *

1)인왕제색도, 정선,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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