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3화 (3/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3화

1. 그리는 아이(2)

언어를 습득하면서 조금씩 이 세계에 대해서도 알아갈 수 있었다.

이곳이 대한민국이라는 생전 처음 듣는 나라라는 사실과 올해가 2027년이라는 아득한 이야기.

어느새 한 세기를 훌쩍 넘겨버린 세상은 여전히 모차르트와 베토벤을 들었으나 그 외에는 모든 것이 바뀌었다.

손을 대지 않아도 무엇을 조작할 수 있었고 TV라는 것을 통해 세계 어디든 살필 수 있었다.

어쩌면 이곳이 이승이 아닐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러지 않고서야 그림이 움직이는 일이 가능할 리 없으니 말이다.

TV에서 바지만 입은 노랗고 네모난 괴물이 자유자재로 움직이고 심지어 말까지 한다.

이 경이로운 세상 속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이 아이의 몸이다.

매일 건강한 육체가 내리는 축복에 감탄한다.

쓸모없는 놈이라며 나를 괴롭히던 환청이 더는 들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무너진 이성과 평화를 되찾을 수 있었다.

이따금 몸이 뒤틀리는 고통도 없고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고통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이 기적 같은 행복이 건강한 사람의 일상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고의는 아니라고 해도 한 아이의 몸을 빼앗은 것이나 마찬가지.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스스로 목숨을 끊지 못한 이유는 이 아이의 조부 때문이다.

내 앞에서 자세한 이야기를 삼갔고 제대로 이해할 수도 없었지만.

아무래도 이 아이는 어떤 사고를 당한 것 같다.

노인이 애틋하게 여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아주 한정된 단어로나마 기초적인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지금에 와서도, 그에게 내가 당신의 손자가 아니라는 걸 말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훈이 기분 어때?”

고개를 끄덕이니 다시 묻는다.

“좋아?”

나쁘지도 좋지도 않다.

그저 이 상황이 당황스럽고 묻고 싶은 일이 많을 뿐이다.

그러나 내가 137년 전에 죽은 사람이라고 설명해 봤자, 예전에 나를 핍박하던 이들처럼 미친놈 취급할 것이 뻔하다.

“훈이 말은 조금씩 늘고 있죠?”

의사가 노인에게 물었다.

“하긴 하는데…….”

“금방 좋아지진 않을 거예요.”

“후우.”

“교수님이 기운 차리셔야 훈이도 힘이 날 겁니다. 밥도 잘 먹고 운동도 잘하고 있잖습니까.”

의사의 말에 노인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떻게. 나을 수 있겠죠?”

“이미 한 번 기적이 일어났으니 포기할 순 없죠. 아, 그리고 심리 상담도 같이 받아보시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노인의 표정이 그리 좋지 않다.

“정신과라고 해서 예전 같지 않습니다. 현대인이라면 모두 한두 가지 정신질환을 가졌고요. 조금이라도 일찍 치료받고 상담하는 게 훈이에게 도움이 될 겁니다.”

노인이 숨을 길게 내쉬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합시다.”

“네. 다음부턴 정신건강의학과랑 협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전에 따로 심리 상담도 받고요.”

“그래요.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지.”

노인이 내 머리를 쓸었다.

낯설다.

나이 서른여섯에 누군가에게 머리를 쓰다듬어지는 일이 익숙해질 리 없다.

애초에 이렇게 따뜻한 손길을 받은 적이 대체 얼마 만인지.

복잡한 심경이다.

다음 날.

평소와 같이 산책이나 하겠거니, 생각하며 간호사를 따르자 못 보던 사람을 만났다.

“반가워, 훈아.”

“안녕하세요.”

알고 있는 인사말을 꺼냈다.

“선생님은 김희원이라고 해. 오늘 선생님하고 그림 그리며 놀 건데. 훈이 그림 좋아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저 바라보고 있으니 싱긋 웃으며 빈 종이와 연필을 주었다.

‘그리라는 건가?’

고개를 들었다.

“훈이 그려볼까? 선생님도 그릴 거니까 같이 해보자?”

자화상을 그리라는 말 같다.

그림이라.

다시는 그릴 수 없다고 생각했거늘 그토록 간절했던 소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이 이 불쌍한 아이의 몸을 빼앗고 얻은 기회라 안타까울 뿐.

망설이다가 종이와 연필을 들었다.

“훈아? 어디 가?”

거울을 찾고자 화장실에 가려고 했는데 의사가 내 뜻을 눈치챈 듯 서랍에서 거울을 꺼냈다.

“여기 있어. 이거 보고 그리자.”

거울 속 무표정한 아이는 부모의 사랑 속에서 자란 듯하다.

몸에 상처 하나 없고, 손은 때 묻지 않았으며 오랜 시간 누워 있었음에도 밥을 먹고 운동을 하는 것만으로 금방 건강을 되찾았다.

잡티 하나 없이 뽀얀 피부도 잘 정돈된 머리카락도 모두 사랑받았단 증거다.

이토록 애지중지 키운 아들이 제정신이 아니니 부모는 얼마나 충격이 클까.

아니, 여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걸 보면 뭔가 따로 사정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내 안타까움이 표정으로 드러난다.

연필을 들었다.

* * *

WH한국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김희원은 두 눈을 의심했다.

오늘 환자는 열 살 소년이었다.

김희원은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은 소년에게 연민을 느꼈다.

부모와 함께 교통사고를 당한 고훈은 의식을 찾지 못했다.

병원에 도착하고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다 했으나 일주일 뒤에는 심폐기능까지 정지하여 48시간이 지났다.

동공은 빛을 비추어도 반응하지 않았고 혈압은 급격히 떨어졌다.

기계에 의지하지 않고는 호흡조차 못 하는 뇌사 상태였다.

그런 아이가 기적적으로 깨어난 것이었다.

그간의 증상을 관찰한 의료진은 언어 능력 퇴행 및 지능 저하가 진행되었다고 추측했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48시간이나 뇌가 멈추었으니 기능에 손상이 없을 수 없었다.

깨어난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김희원은 아이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알아보기 위해 오랜 시간 천천히 다가가리라 마음먹었다.

그리고.

‘세상에.’

잠시 본분을 잊고 아이의 그림에 빠져들었다.

연필을 쥐자마자 생기 없던 눈이 빛나는 듯했다.

소년은 거울 속 자신을 꿰뚫듯 관찰했고 이내 손을 움직였다.

과감했다.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뻗어나간 선들이 점차 형태를 이루었다.

조금 전만 하더라도 얌전하던 아이가 치열하게 종이를 채워나갔다.

거친 선들이 어느새 하나의 형태를 이루어, 마치 그곳에 본래 있었던 것처럼 자리 잡았다.

김희원 교수는 넋을 놓고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고훈이 그림을 완성한 뒤에야 정신을 차렸다.

그림이 자세하진 않았다.

정확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슬픔을 참아내는 소년의 미묘한 감정선을 그대로 전하고 있었다.

‘어떻게…….’

김희원 교수가 고개를 들었다.

소년은 처음 봤던 우울한 표정과 달리 희미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원래 그림 그렸었니?”

고훈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눈만 깜빡였다.

“할아버지한테 그림 배웠어?”

김희원은 고훈이 할아버지, 한국대학교 미술대학 학장이자 한국을 대표하는 미술가, 해송(海松) 고수열 화백에게 그림을 배웠다고 생각했다.

고훈의 부모도 매스컴을 통해 종종 모습을 드러낸 미술계 유명인사였다.

어렸을 적부터 재능을 가졌고 부모와 고수열 교수에게 영재 교육을 받았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고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김희원을 빤히 바라보다가 빈 종이를 가리켰다.

구경하다 보니 함께 그리자고 했던 걸 잊고 있었다.

“미안해. 훈이가 그림을 너무 잘 그려서 잊었네?”

고훈이 빈 종이를 집었다.

아이는 티끌 하나 없이 맑은 눈으로 허락을 구하고 있었다.

“더 그리고 싶구나?”

고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종이를 가져가서 또 연필을 놀렸다.

‘어머.’

그림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고훈이 범상치 않은 아이라는 건 분명했다.

조금 전만 해도 가만있지 못하고 주변을 정신없이 둘러보던 아이가 종이와 연필을 주자 그림만 그렸다.

어린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놀라운 집중력이었다.

어느덧 약속된 시간이 되어 조부 고수열이 손자 고훈을 데리러 왔다.

“어이고, 우리 훈이 선생님이랑 잘 놀았어?”

“안녕하세요.”

손자는 항상 안녕하세요란 말만 반복했지만 고수열은 그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래. 그래. 안녕하지.”

김희원은 문득 아이가 이 방에 들어오고 안녕하세요라는 말만 했음을 떠올렸다.

이 나이 또래 아이가 세 시간가량 그림만 그린 것이다.

“할아버지 선생님하고 이야기 좀 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라.”

아이는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저 들고 있던 종이와 펜을 꼭 쥐고 있었다.

고수열이 고훈을 의자에 앉히고 의사와 마주했다.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좀 어때요?”

고수열의 질문에 김희원은 선뜻 뭐라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오랜 경험과 다양한 아이를 만나 보았지만 고훈 같은 경우는 무척 드물었다.

그녀는 놀란 가슴을 진정하고 차분히 질문을 시작했다.

“교수님, 혹시 훈이가 그림을 배웠나요?”

고수열이 고개를 저었다.

“실은 아주 어렸을 때 보고 오랜만에 보는 거라 잘 몰라요. 애 부모가 워낙 해외를 돌아다녀서.”

김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훈이에게 그림 그려보라고 했거든요.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너무 잘 그리더라고요.”

“그래요?”

고수열이 덤덤히 반응하자 김희원이 조심스레 고훈이 그린 그림을 내밀었다.

“아무래도 그림은 교수님이 더 잘 보실 테니.”

그림 심리 치료는 그의 전공이 아니었다.

“허허. 그림이야 그렇겠지만 심리는…….”

어떤 그림을 그렸나 싶어 시선을 옮긴 고수열이 눈썹을 모았다.

“이건?”

“훈이 그림이에요. 자기를 그려보라고 하니까 이렇게 그리더라고요.”

고수열은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비록 묘사가 상세하진 않았지만 형태는 분명히 잡혀 있었다.

거리를 두고 보면 그저 사랑스러운 아이였으나 가까이 두고 살피면 달랐다.

슬픔을 담은 눈과 혼란스러운 듯 흔들리는 동공이 정제되지 않은 선으로 표현되어 있었다.

거칠게 쓴 선에서는 형용할 수 없는 아우라가 느껴졌다.

힘 있는 것을 넘어 괴팍하기까지 한 표현력과 과감한 생략은 그림 좀 배운 이가 어설프게 시도한 것이 아니었다.

마치 하나의 화풍을 확립한 거장의 품격이 느껴졌다.

김희원이 함께 보여준 다른 그림도 살핀 고수열이 나지막이 물었다.

“이걸 훈이가 그렸다고요?”

“네. 지금으로서는 추측일 뿐이지만 이렇게까지 관찰력이 좋고 표현할 수 있으면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아요.”

“정말입니까?”

“네. 좀 더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하겠지만 적어도 전 그렇게 봐요. 검사 결과 나오기 전부터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고수열이 고개를 돌려 방 한쪽에서 무엇인가를 그리는 손자를 보았다.

“그림을 그리고 싶었나 봐요.”

김희원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지금도 저렇게 그리고 있잖아요. 여기 있는 세 시간 동안 그림만 그렸어요. 저 나이에 이렇게 집중할 수 있는 아이 드물어요. 성인들도 한 시간 이상 집중하기 힘든걸요.”

고수열은 도무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교통사고로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손자는 가망이 없었다.

내로라하는 병원에 데려오긴 했으나 근본적인 치료를 할 순 없었다.

단지 목숨을 겨우 이어 갈 뿐인 연명치료가 전부였다.

그러나.

가망이 없는 것을 알아도 아들 부부가 죽고 단 하나 남은 손자를 포기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랬던 아이가 깨어난 것이었다.

WH한국병원 의사들은 모두 기적이라고 했다.

비록 기억 상실, 언어 장애, 극도의 불안 증세 등을 보이긴 했으나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그렇게 죽다 살아난 손자가 수많은 명화를 접했던 자신의 등줄기를 오싹하게 했다.

믿을 수 없었다.

의사는 훈이의 그림을 두고 너무 잘 그렸다는 말밖에 하지 않았지만, 고수열의 눈에는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당장 그가 30년간 가르친 학생 중에 이렇게 강렬한 표현력을 갖춘 이는 손에 꼽았다.

고수열은 그저 손자가 연필로 그린 세 장의 스케치가 믿기지 않았다.

고개를 돌렸다.

손자는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고개를 푹 숙여 손을 분주히 움직이더니 이따금 다시 고개를 들었다.

병실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였다.

저 산만한 행동이 단순히 불안한 탓에 그러는 거라 여겼거늘.

‘주변을 관찰했던 게야.’

고수열이 손자에게 다가갔다.

손자가 들고 있는 종이에 상담실이 담겨 있었다.

원근법이 무너지는 경계에 과장되어 표현된 고수열과 의사가 있었다.

열 살 소년의 그림에.

거장 고수열이 전율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