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화
1. 그리는 아이(1)
문득 정신이 들었다.
그림을 그릴 수 없는 몸으로는 살아 봤자 아무 의미가 없는데.
대체 또 무슨 미련이 남아서 눈을 떴는지 모를 일이다.
‘여긴?’
이물감이 들어 코 주변을 더듬으니 콧속에 이상한 것이 들어와 있다.
손등에는 주삿바늘이 꽂혀 있다.
티끌 하나 없이 새하얀 방은 알 수 없는 물건으로 가득하다. 낯선 것을 넘어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연기를 뿜어내는 상자와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이질적인 소리.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가뿐한 몸보다 놀랍진 않다.
이성을 좀먹던 환청도.
가슴을 짓이기던 통증도.
근육이 뒤틀리던 발작과 마비 증세도 없다.
다만 조금 나른할 뿐이다.
‘가셰 박사인가.’
치료하지 말라고 했거늘.
그 짓을 다시 해야 할 판이다.
왼쪽 옆구리의 총상을 확인하려고 몸을 일으킨 순간 하얀 옷을 입은 여성이 방으로 들어왔다.
“아!”
들고 있던 서류를 떨어뜨리곤 입을 가린다. 몹시 놀란 듯 동공이 흔들린다.
“선생님! 선생님!”
여성이 복도에 대고 다급히 소리치고는 다가왔다. 이상한 소리를 내는 상자와 나를 번갈아 본다.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정신이 드니? 움직일 수 있어?”
이 여성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생김새로 보아 유럽인은 아닌 것 같은데, 상당히 크다.
‘……아니야.’
그녀가 큰 것이 아니라 내 몸이 작고 여려 상대적으로 그리 보이는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내 몸이 왜 이런지.
여기는 어딘지 묻고 싶은 게 산더미다.
“Waar ben ik?”
네덜란드 말을 해도.
“Où suis-je?”
프랑스 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한다.
유럽 어느 곳에서도 통하는 라틴어를 꺼내보았지만 마찬가지다.
그녀가 복도를 보다가 입술을 씰룩이곤 무엇인가를 집어 들었다.
“선생님! 501호 환자 일어났습니다. 네. 의식도 있고 몸도 혼자 움직여요. 그런데……. 네. 연락하겠습니다.”
혼자서 뭐라고 말한 여성이 손등에 꽂힌 주사를 확인하곤 내 머리를 쓸어넘겼다.
간호사인가.
나를 안심시키려는 것 같다.
“무서워하지 마. 괜찮아. 이름이 뭐야? 몇 살?”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 없어 고개를 저었다.
“그래. 괜찮아. 천천히 나아질 거야. 할아버지께 연락드릴 테니 좀 쉬고 있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순 없지만 적어도 호의를 가지고 대하는 건 알 수 있다.
간호사로 보이는 그녀가 밖으로 나가고 잠시 후.
“말을 못 알아듣는다고?”
“네. 뭐라 하긴 하는데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어서.”
“깨어난 것만도 기적이지.”
밖에서 알 수 없는 대화 소리가 났다.
몇몇 사람이 들어왔다.
의료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눈을 몇 번 깜빡이고 입술을 깨물었다.
놀란 기색이 역력하다.
그가 간호사와 대화를 주고받더니 다가왔다.
“훈이 몇 살이야? 어디 살았어?”
역시나 처음 듣는 언어다.
“말할 수 있어? 할 수 있으면 아무 말이나 해봐. 괜찮아.”
의사가 무엇인가를 말한다. 뭔가를 묻는 것 같은데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다.
“못 하겠어?”
눈썹을 모으자 의사가 안심하라는 듯 어깨를 쓸어내렸다.
“고수열 교수님껜 연락했고?”
“네. 바로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근처라고.”
답답한 마음에 입을 막 열려던 차 문이 열렸다.
건장한 노인이 다급한 표정으로 들어와 나를 보더니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경계하는데.
날 끌어안는다.
“내 새끼. 내 새끼. 그래. 일어날 줄 알았다. 할애빈 일어날 줄 알았어!”
처음 보는 노인이 오열한다.
팔 힘이 너무도 억센 탓도 있지만 그가 너무도 슬퍼하여 밀어낼 수 없었다.
한참을 그러고 난 뒤 노인이 내 얼굴을 쓸었다.
“빨리 나아서 집에 가자. 응?”
당황스러운 나머지 그저 바라보고 있으니 노인이 눈썹을 좁혔다.
“그래. 기억 잘 안 나지? 어렸을 때 보고 못 봤으니까. 내가 네 할애비다.”
너무나 간절한 표정이다.
“얘가……. 얘가 왜 이래?”
고개를 돌려 젊은 남자에게 말했다.
“선생, 우리 훈이 왜 이래요? 응?”
“우선 검사부터 진행해 봐야겠습니다. 아시다시피 혼수상태가 너무 오래되어서…….”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니, 왜 애가 말이 없어?”
“일어난 직후에는 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말이 없는 걸 보니 혼란스러운 듯합니다. 우선은 자세히 검사해 보고.”
“검사?”
“속단할 순 없습니다.”
“뭐? 뭐요?”
노인은 입을 벌린 채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잔뜩 흔들리는 시선이 그가 당황했음을 말해 준다.
“……혼수상태가 지속된 탓에 일시적으로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문제요. 예?”
“일시적으로 기억에 문제가 있다든가 할 수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검사를 해봐야 알 수 있으니 너무 걱정 마시고 우선은.”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리가. 훈아, 뭐라도 말해 봐라. 어? 의사 선생님이 거짓말하는 거지? 그렇지?”
몹시 애타는 모습이나 나로서는 어떤 말도 해줄 수 없다.
그저 안타까운 마음에 손을 잡아주니 크고 부리부리한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을 떨어뜨렸다.
“이래선 안 되지! 하늘이 있으면 이러면 안 되지!”
“교수님, 진정하세요.”
“훈아! 뭐라도 말해 봐라. 응? 왜 이러고 있어? 어? 할애비 모르겠어?”
“교수님, 훈이 지금 무척 혼란스러워하고 있습니다. 이러시면 더 힘들어해요.”
죽은 게 아니었나?
여긴 어디고.
그래. 테오.
내 동생 테오는 어디 있지?
내 몸이 대체 어떻게 되었는지.
이 노인은 왜 이다지도 슬퍼하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다.
* * *
일고여덟 살 정도 되었을까.
거울 앞에 앳된 아이가 서 있다.
낯설다.
검은 머리와 검은 눈. 피부는 하얗다 못해 창백하다.
‘동양인인가?’
그렇게 추측할 뿐이다.
깨어나고 며칠간 어딘가로 이끌려 가길 반복했다.
그들은 이 아이의 몸에 무엇을 붙인다든가, 피를 뽑기도, 좁은 동굴 같은 곳에 넣고 잠시간 방치하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납치되어 이상한 일을 당하는 건가 싶기도 했으나 이들은 위협은커녕 부담스러울 정도로 호의를 보였다.
의심을 거두지 않고 그들이 주는 음식을 먹지 않으려 했지만 결국 허기를 참지 못했다.
배고픔 탓인지 이 황당한 상황에 처하고도 맛이 좋았다.
내가 먹던 딱딱하고 푸석한 빵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이들은 얼마나 부유한지 음식에 후추와 소금을 아낌없이 사용하고, 심지어 한 끼에 고기와 신선한 채소로 만든 요리를 여럿 준비했다.
잼이라도 넉넉하게 바를 수 있다면 호화로운 식사였거늘.
그렇게 맛있는 식사는 처음이었다.
게다가 간호사의 도움을 받아 산책도 하니 몸이 점차 활기를 되찾았다.
건강해지는 과정에서 그간 나를 괴롭혔던 환청과 발작, 마비 증상은 조금도 겪지 않았다.
너무나 긴 세월 앓았던 탓일까.
건강하다는 게 이렇게나 행복한 일인지 몰랐다.
그렇게 당황스러운 와중에도 이 몸의 원래 주인은, 어린아이는 어떻게 된 것인지 걱정되었다.
어찌 된 일인지 알아보려고 했으나 단서를 찾긴커녕 기절할 일뿐이었다.
이곳은 내 상식을 아주 간단히 무시한다.
어떤 곳이든 마음대로 볼 수 있는 신비한 상자가 있고.
축음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맑은 소리를 내는 상자에선 모차르트와 베토벤 때때로 하이든이 흘러나왔다.
모차르트를 듣는 곳이라면 분명 내가 살던 곳과 크게 다르지 않을 터인데, 대체 이곳이 어딘지 알 수 없었다.
언어라면 네덜란드어,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 라틴어 등 유럽 어디에서도 소통할 수 있건만.
저들이 쓰는 말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조심하고자 무엇을 섣불리 말하진 않았으나 언제까지고 입을 닫고 살 순 없는 법.
최소한의 의사소통을 하고자.
또 나를 당신의 손자로 여기는 듯한 노인에게 진실을 알려야 하기에 이들의 말을 익히기 시작했다.
매일 같이 오는 노인과 간호사 그리고 ‘어디든 볼 수 있는 상자’가 크게 도움이 되었다.
간호사가 상자를 작동해 줄 때 ‘티비’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든지, 노인이 자신을 ‘할애비’라고 칭하거나 나를 ‘훈아’라고 부른다든지.
조금씩 단어를 익혀나갔다.
그리고.
아침이 되어 찾아온 노인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노인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 * *
1)해바라기, 빈센트 반 고흐, 캔버스에 유화 물감, 18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