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 차세대 (2)
"유니버스 그룹은 기본적으로 젊은 이들의 반골기질로 키워온 그룹입니다.
전화기가 불편하다.
송수화음이 불만이다.
인터넷은 왜 이리 불편하지?
고작 문자에 돈을 써야하나?
컴퓨터 속도는 왜 이렇게 느려?
그놈의 신파 이젠 지긋지긋하다, 재미있는 영화는 없는건가?
내가 쟤보단 노래 잘할 거 같다.
등등
이런 수십 수백 수천가지의 불만을 가진 젊은이들이 재기발랄한 재능으로 문제를 해결하며 성장시킨 것이 바로 이 유니버스 그룹입니다."
브루나이 왕궁에서 성대하게 열린 TFC회의의 모두발언은 다른 모든 TFC의 모두연설이 그러했듯 의장인 태준의 몫이었다.
늘상 해온 연설의 시작은 원래,
"반갑습니다. 김태준입니다."
라는 인삿말이었으나.
올해로 온전히 은퇴를 결심한 태준의 발언은 예년과 달리 유니버스 그룹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었다.
"김회장... 설마 또 은퇴발언 하려는건가?"
"이사들의 배경을 생각하면 김회장 이후의 리더쉽은 분쟁거리밖에 되지 않아... 어떻게든 김회장의 퇴임을 막아야 해."
그리고 그런 모두발언의 도입부를 들은 이사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황급히 유니버스 원을 들어 앤서블로 채팅을 보내며 자신들의 집단 내부에 있는 두뇌들을 굴려 대응책을 마련함과 동시에...
"막지 못한다면... 차기 회장 만큼은 우리쪽 인사로 채워야 해... 아니면 적어도 김회장의 직계로..."
"일단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계속 들어봐야 겠군."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태준의 발언을 주의깊게 들었다.
"그리고 올해로 예순 여섯이 된 저는 그런 젊은 이들의 발상을 따라잡기 어려워졌습니다.
이는 다시 말하면 미래의 소비자이자 우리의 주주가 될 사람들의 요구가 무엇인지 파악하기 어려워졌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비교적 순화해서 말하기는 했습니다만.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말하자면,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킴으로서 돈을 버는 사업가로서는 이미 퇴물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태준의 담담한 목소리에 담긴 말을 들은 이사들은...
"김회장이 퇴물이면 다른 기업인들은 무슨 폐기물인가."
"인종발언은 하고 싶지 않지만....저게 한국인들의 문제지. 겸손을 가장한 채 자학적인 말을 쏟아내면서 상대를 엿먹이는 것."
"그렇다고 하기엔... 본인 스스로 진짜로 저렇게 느끼고 있는 것으로 보이니... 거 참. 어처구니 없군."
헛웃음을 흘리며 어처구니 없다는 듯 웃었지만, 태준은 그런 이사들의 수근거림을 들었음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퇴물이 된 사업가에게 남은 길은 두 가지 입니다.
그간 벌어들인 돈으로 미래세대를 뒷받침 하는 투자자로서 활동하거나,
과욕과 오만으로 자신이 퇴물임을 인정하지 않고 끝끝내 버티고 버텨 자신의 목줄은 물론이고 자신과 함께 사업을 발전 시켜온 수 많은 사원들의 목줄까지 죄거나.
이 두 갈림길에서 저는 전자를 택하고자 합니다.
마침 제 사업적 뿌리가 투자에 있기도 하고, 그간 운이 좋아 투자로는 돈을 잃은 적이 없으니, 앞으로도 미래세대의 그늘이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에, 이러한 결정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재단의 많은 이사님들께서 변함없이 제 재능과 운, 그리고 사업적 감각을 믿고 맡겨주신 점은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제 역할을 다 하기 힘든 지금, 제가 유니버스의 회장 자리에 있는 것은 장기적으로 볼때 해가 된다고 판단하고 있기에
저는 유니버스 회장직에서 물러나고자 합니다."
그렇게 태준의 모두발언은...
"우리 미국은 단호히 반대합니다. 애시당초 리더쉽 변경을 논하기에는 아직 김태준 의장의 나이가 많지 않으며,
설사 방금전 김태준 의장의 발언이 모두 맞는 말이라 하더라도, 더 이상의 급격한 성장이 기대되지 않는다는 것 뿐이지 않습니까.
이는 어느 기업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성장을 마쳤다면, 응당 그 성장을 공고히 하는 기간이 필요한 만큼, 지금은 리더쉽 교체를 생각할 때가 아니라고 봅니다."
"한국 역시 이에 동의합니다. 김태준 회장이 더 이상의 혁신이 어렵다고 판단해 물러나겠다는 그 의지는 존경하나... 기업에는 혁신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기업의 수익구조를 안정화시키고...."
TFC이사회는 물론이고...
- 김회장 진짜 물러나려나보네. 몇 년전 우주여행때 했던 말이랑은 수위 자체가 다른데?
- 더 이상의 혁신을 이끌 수 있는 나이가 아니라고 스스로 물러나겠다 선언하는 기업인이 얼마나 되냐... 진짜 저건 찐이다.
- 찐은 무슨. 여기 역사 모르는 인간들만 넘치나본데... 영조도 틈나면 선위하겠다고 시위하면서 신하들 쥐락펴락했었다. 이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음.
- 김태준을 영조에 비교하는게 논리적으로 말이 되냐? 정치인도 아니고 기업인인데.
그리고 김회장은 애초에 쥐락펴락은 하고 있었잖어. 영조는 신하들 밸런스 잡아가며 멱살잡아 끌고 가야하는 입장이었고.
입장도 상황도 전혀 다른데 어디다 찍어다 붙이냐. 저건 진짜 냉정한 판단에서 나온거임.
- 왜 다들 김회장이 물러난다는 말에만 초점을 맞추는지 모르겠네? 이사회 의장은 내려놓지 않았잖아.
그럼 그냥 다른 재벌들 처럼 본인은 왕회장으로 물러나고 차기 키우겠다는 뜻으로 보면 되는 거 아님?
- 김회장 업적이 탈 인간급이라 초점이 그리 갈 수 밖에 없긴 함.
본인부터가 공학자인데다가 유니버스에서 장식으로 굴리는 연예계쪽 사업 빼면 사실상 모든 사업영역이 김회장 손길이 안 닿은게 없는 상황이라... 갑자기 물러나겠다고 하면 주주들 입장에선 기겁할 수 밖에 없지.
MDD(Max Draw-Down ; 최대손실율) 조차 나오지 않았던 KTJC 우선주에 처음으로 MDD기록을 만들어준 것도 몇 년전 김회장 은퇴 발언 때문이었고.
- 은퇴는 절대 안되지... 어제 막 KTJC샀는데 손실보라고?
- ㅋㅋㅋㅋ 어제 샀다는거 자체부터 주알못.... KTJC는 코어로 무조건 들고 가는 건데...ㅉㅉ
TFC 중계를 보던 여러 국적의 사람들까지 반대와 경악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런 반응에도 태준은 아랑곳 하지 않고, 본인의 은퇴를 안건으로 상정함과 동시에...
"해서, 차기 유니버스 회장에 우리 재단의 제한이사이자 유니버스 그룹의 총무이사인 조태민 이사를 추천하는 바입니다."
조비서에게 미리 예고한대로, 조비서를 차기 회장직에 선임하는 안을 올렸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정규 의석 99석중 58석(46석이 애초에 태준의 것이었지만)의 찬성으로 안건이 가결되며...
- 유니버스 그룹, 전문 경영체제로 전환? 2대 회장에 취임한 조태민 회장은 누구인가?
- 고졸 출신 회장님, 조태민... 샐러리맨의 신화 되다.
- [주식 칼럼] 김태준 전 유니버스 회장, 유니버스 공식직책에서 전부 물러났나? No, 재단 의장직은 그대로 수행할 것... 재단의 정관에 가로 막힌 김회장의 은퇴. 재단 정관이 KTJC의 하락세 막았다. 개미-기관-외인 너나 할 것 없이 안도의 한숨.
유니버스 그룹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
..
.
"김비서."
"예. 회장님."
그리고 태준의 은퇴 후 1년 뒤인 지금.
회장이 된 조태민은 태준이 쓰던 사무실에서 태준의 아들이자 일반의 출신의 비서 김원과 함께 일을 하고 있었다.
"이번에 올린 기안 봤습니다."
조태민의 말에 원은 바짝 긴장한채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일단... 칭찬부터 하지요. 잘 썼습니다. 그것도 아주."
"감사합니다."
"솔직히 말하면... 상상 이상입니다. 특히 기존 제품과의 연동을 넘어 아예 의료기록을 블록체인으로 통합 관리한다는 발상은 획기적이군요.
정부나 보험업계에서도 관심을 가질 법한 사업이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 합니다.
허나. 이미 어렴풋이 느끼고 계시겠지만... 전임 회장님의 안목을 기준으로 놓고 보면 여전히 불합격입니다."
조태민이 칭찬과 매질을 오가는 평을 내리자,
원은 곧바로
"수정해오겠습니다."
수정해오겠노라 말했지만....
조태민은 그런 원의 말만 듣고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도련님께서 이미 빠르게 성장하고 계시지만... 요새 조금 정체된 느낌이 있어... 역시... 회장님의 업적에 질려버린 것이겠지...
아마 지금도 본인이 가져온 기안과 회장님의 업적을 비교하고 더 나은 기안을 할 수 없는 자신에 실망했겠지.'
"그 전에. 내가 어딜 지적하는지 알고 있습니까?"
원이 1년차가 되며 '아버지를 뛰어 넘는 기업인'이 되겠다는 입사 당시 포부는 온데 간데 없어지고,
쏟아지는 일과 태준이 이룬 업적에 완전히 기가 질려버렸다는 것을 조태민은 그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었기에 이를 그냥 넘기지 않고 질문을 던졌고,
"... 잘 모르겠습니다."
조태민의 질문에 원은 고개를 떨구며 답했다.
그런 원의 말에 조태민은 슬쩍 웃음 짓고는 말을 이었다.
"저도 그렇고 김비서의 어머니 되시는 최민영 사모님께서도 늘 전대 회장님께 질문을 던졌습니다.
모르는 것을 묻는 것은 무능도 무례가 아니니까요. 직접 찾아 낼 수 있는 것을 묻는 것은 무능이고 나태이지만,
자신의 수준에서 보지 못하는 것을 묻는 것은 완벽하게 일을 하기 위한 열정입니다.
그리고 그건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오는 길이지요. 심지어 전대 회장님께서도 드물긴 하지만 자신이 모르시는 것은 결코 그냥 넘기지 않고 질문하셨었습니다."
"...아버지가요?"
"예. 그러니 질문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잘난 사람도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는 법이니 다양한 생각을 듣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마세요.
특히 전대 회장님 같은 천재를 넘어서려면... 더 많은 발상이 필요할테니까요. 위로든 아래로든.
그렇게 들은 견해들을 바탕으로 정확한 결단을 내리는 연습을 하다보면 분명 그 분을 넘어서는 날이 올겁니다."
조태민의 응원 섞인 가르침에 기운을 차린 원은...
"그럼... 바쁘시겠지만. 문제점을 알려주시겠습니까? 회장님."
곧바로 조태민에게 받은 가르침을 써먹었다.
"물론이죠."
그렇게 조태민은 원과 함께 원이 올린 기안을 하나하나 살피며 문제점을 지적해주었고....
"그럼 말씀 주신 방향으로 수정해 가져오겠습니다."
"기대하겠습니다."
조태민의 가르침을 받으며 원은 계속 성장해 나가기 시작했다.
...
..
.
한편, 조비서에게 아들과 회사를 맡기고 은퇴한 태준은....
"다 썼다."
"다 썼어요?"
은퇴를 기다리며 틈틈히 쓰던 책을 마무리 하고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민영에게 다 쓴 원고를 자랑하고 있었다.
"어때. 이 정도면 출판 할 수 있겠지?"
"출판이 문제겠어요? 회장님 책이라면 다들 사서 읽을텐데."
"아무리 내 이름값이 있다고 해도 재미 없는 책을 사서 보겠어?"
"뭐 책이 재미있어야만 팔리나요. 정치인들 책도 잘 팔리는데요."
"그 치들이야 출판기념회 열고 남 모르게 후원금 처먹으려고 하는거니 그런거고... 난 아니잖아."
그렇게 민영에게 두 원고를 전송한 태준은 씩 웃으며 원고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하나는 자기개발서로 쓴 책이야. '불만은 혁신을 낳고, 혁신은 미래를 낳는다.'"
"제목 잘 지었네요. 유니버스에 어울리는 제목이예요."
"그리고 또 하나는 내 인생을 소설로 쓴 거야."
"소설이요?"
민영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두 번째 원고를 열자, 태준은 어색하게 웃으며...
"응. 재벌 회장이 소설, 그것도 자전적 소설을 웹소설로 썼다고 하면 나름 또 화제가 되지 않겠어?"
'전생에 대한 이야기를 쓰려면 소설 아니고선 안 되겠더라고...'
본심을 감추기 위한 되도 않는 말을 내뱉었다.
그 말에 민영은 피식 웃고는 말을 이었다.
"하기사 웹소설은 등단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 엄연이 우리 유니버스넷의 핵심 사업중 하나인데... 섭섭하네. 외려 등단이 필요없이 순수하게 경쟁을 통해 데뷔하는 건데 더 대단한 거 아닌가?"
"대단하긴 하죠. 누가 아니랬어요? 근데 회장님은 경쟁 안하시잖아요. 그냥 웹소설로 내기만 하면 유니버스넷에서 알아서 팔아줄텐데."
"그걸 내가 바랄리가 없잖아. 웹소설판은 완결까지 연재되면 그 때서야 밝힐 거야. 그 전까지는 익명으로 글 올리고."
그 말에 민영은 피식 웃고는 말을 이었다.
"뭐.. 마음대로 하세요. 이미 은퇴까지 다 하셨는데. 뭘 하시든 회장님 자유죠."
"은퇴했다고 해놓고 자꾸 회장님이라고 부르네."
"입버릇이 되엇으니까요. 이제와서 낯간지럽게 여보니 자기니 하기도 뭐하고. 신혼도 아니고, 이젠 며느리도 봤는데."
그 말에 태준은 씩 웃으며 민영을 끌어안고 말을 이었다.
"중년의 로맨스도 나름 좋지 않아?"
"젊었을때나 잘 하시지 그러셨어요? 원이 반만 했어도 내가 이렇게 구박은 안했죠? 으이그..."
그렇게 태준과 민영이 끌어안은채 태준이 쓴 원고를 보던 그때,
"다녀왔습니다."
원과 마코가 퇴근하고 집으로 들어왔다.
"오늘도 고생 좀 했나보네."
"... 예."
"뭐 그러면서 실력 키우는거지. 조회장이 그래도 너라고 봐주는 건 줄 알어."
그 말에 원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슬쩍.
"천재는 범인을 이해 못한다더니... 그게 내 아버지일 줄이야... 조회장님이 내 상사라 다행이야... 진심."
들릴 듯 말 듯한 혼잣말을 던지고 방으로 들어갔고,
마코는 그런 원을 보고는 쓰게 웃으며 태준에게 다가가 말했다.
"원이라서 더 혹독하게 하시는 거 아시면서... 아버님도 참."
이제는 며느리가 된 마코의 말에 태준은 씩 웃으며 말을
"그럼 고마운 일이지. 조회장이 내 부탁을 착실히 잘 들어주는 건데. 그래도 너희는 연애라도 했으니, 좋은 시절에 태어난 줄 알아.
나때는.... 억!"
이었지만, 민영이 슬쩍 품 안에서 태준을 꼬집고는...
"들어가서 정리하고 밥먹을 준비해라. 회장님 말씀 한 번 하시면 또 길어지시니까."
"하핫... 예. 아버님, 그럼 들어가 볼께요."
태준의 꼰대짓을 막아세우고는 말을 이었다.
"회장님은 그런 말씀 하실 자격 없는거 아시죠? 바빠서 연애를 안한게 아니라 둔감해서 못한거잖아요."
그 말에 할말이 궁해진 태준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어휴... 말이나 못하면. 이건 내일 마저 읽어볼테니까, 팔 좀 치워봐요. 애들 왔으니 밥먹게."
그렇게 유니버스 원 프라임을 탁상위에 둔 민영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태준은 그 뒷모습을 보며 푸근하게 웃어보이고는 혼잣말을 했다.
"참 멀리도 돌아왔다. 멀리도 돌아왔어..."
그렇게 전생의 60년과 회귀 이후 46년, 총 106년간의 인생역정을 돌아본 태준은 한 쪽 벽면을 거대하게 채운 대형 사이니지가 비추는 가족 사진을 보고는...
"오늘 메뉴는 뭐야?"
아무렇지 않은척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민영을 향해 다가가며 저녁 메뉴를 물으며
어렵사리 얻어낸 평범한 일상과 행복을 음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