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 모빌리티 혁명 (5)
데미스 허사비스는 서양권의 동양인 스테레오 타입을 그대로 빼다 박은 인물이었다.
키프로스계 그리스인 아버지와 중국계 싱가포르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시절부터 체스의 천재였고, 수학의 천재였으며, 게임의 천재였다.
천재. 하지만 너드.
그것이 동양과 서양의 혼혈아 데미스 허사비스의 유년기를 정의하던 말이었다.
자연히 그는 또래 서양권 아이들에게 강조되는 '사교적이고 진취적인 남성상' 대신 그 자신을 깊게 생각하며 성장해왔다.
그리고 타고난 머리와 인지능력을 자기 자신, 그 중에서도 자신의 영혼을 알아가는 것에 집중했다.
"그래서 뇌를 연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게 차를 마시며 데미스의 유년기와 성장과정을 들은 태준은 흥미롭다는 듯 턱을 쓰다듬으며 그런 그의 마지막 말에 답해주었다.
"결론이 꽤 흥미롭네요. 보통은 영혼에 대해 천착하다보면 종교에 귀의하기 마련인데 말이죠."
"영혼이 담기는 그릇이 뇌니까요. 그 뇌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또 그 뇌를 에뮬레이트 할 수 있다면 어떨지. 흥미가 동했을 뿐입니다.
신을 믿진 않지만...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께서 존재하신다면, 여느 종교인들처럼 제가 하려는 일을 부정하진 않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자식이 손자를 낳는 일을 방해할 부모는 없을테니까요."
그 말에 태준은 희미하게 웃음 지으며 생각했다.
'진짜 괴짜도 이런 괴짜가 없군. 일론도 괴짜라고 생각했지만... 이 사람은 진짜 괴짜야.'
그렇게 태준이 생각을 하느라 잠시 말을 멈추자 데미스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뭐... 여기까지가 표면상의 이유. 어디 인터뷰를 받게되면 하는 상투적인 말이고... 본심은 따로 있죠."
"본심?"
"따라오시죠."
그렇게 데미스의 안내를 따라 찻잔을 내려놓고 간 곳은....
"서버?"
방안 한 가득 서버랙으로 가득찬 서버실이었다.
"예. 아직 인터넷에 연결할 수준은 못되어서요. 이렇게 별도로 구동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가득찬 서버랙을 보던 태준은 반가운 마크를 보고는 씩 웃음지으며 말을 이었다.
"저희 제품을 쓰시는 군요."
"예. 저전력 설계가 기본으로 되어있는데다 모바일부터 PC까지 전부 구동이 가능한 통합모듈은 유니버스제 뿐이니까요.
거기다 그래픽 카드도 현존 최고 수준이기도 하고요. 인공지능 연산에는 그래픽카드가 훨씬 효율이 좋거든요."
그 말에 태준은 서버랙의 마크에서 시선을 떼며 말을 이었다.
"... 이 안에 인공지능이 있는 겁니까?"
"예. 한 번 보시겠습니까?"
그렇게 데미스가 서버랙 하나를 열더니 이내 들고 들어온 유니버스제 노트북과 유선으로 연결해 서버에 접속하고는 말을 이었다.
"이게 제가 AI를 개발하기로 한 큰 이유입니다."
그렇게 데미스가 내게 내민 노트북 화면 안에는....
"바둑...?"
"예. 바둑입니다. 체스부터 쇼기까지 전부 익히고 이겼는데... 이상하게 바둑만큼은 그 수준까지 오르기가 쉽지 않더군요.
일본 기원의 혼인보 치쿤(조치훈 9단)에게도 개인적으로 찾아가 그 이유를 물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직관'이 부족하다는 말 뿐이었습니다.
해서 그 부족한 직관을 인공지능으로 채워보려고 결심하게 되었죠. 체스야... 이미 IBM의 딥 블루에게 선수를 빼앗기기도 했고요."
그 말에 태준은 전생의 2016년 세계를 강타한 알파고 쇼크를 다시 한 번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애초에 알파고를 떠올리고 오긴 했는데... 이렇게 직접 실물을 보니 감회가 남다르네.
바둑을 배우기 어려워서 인공지능을 만들기로 했다라....천생 게이머구만.'
그렇게 과거(정확히는 앞으로 올 미래)의 한 장면을 떠올린 태준은 데미스가 내민 노트북 너머의 알파고와 대국을 펼치기 시작했다.
- 딱.
서버실을 건조하게 울리는 바둑돌 소리가 울려퍼지고,
- 딱.
- 딱.
곧 이어 빠르게 돌들이 쌓이며 형태를 만들기 시작하자, 데미스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 김태준 회장... 역시 일반인 수준은 아닐거라 생각했지만... 바둑까지 이렇게 잘 둘 줄이야.... 승률게이지가 거의 50-51사이를 왔다갔다 거리고 있다고...!?
아무리 완성되지 않은 수준이라고 해도 이건....'
그렇게 데미스가 놀란 표정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태준이 빠르게 수를 두더니 이내....
"한 반집 차이로 지겠군요. 저는 여기서 그만하죠."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혼잣말을 내뱉더니 말을 이었다.
"기존 상용프로그램보다 기력이 더 높은 수준으로 보이는데... 알고리즘은 자체개발 한 겁니까?"
"예. 4중 알고리즘으로... 오픈소스 프로그램인 푸에고의 몬테카를로 엔진과 자체 개발한 가치 알고리즘과 정책 알고리즘, 그리고 학습 알고리즘을 엮어 만들었습니다.
지금 대국해보신 것은 KGS 기보 16만개를 학습시킨 버전입니다."
데미스의 말에 태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확실히 잘 만들어진 알고리즘입니다.... 말 그대로 승리를 위해서만 알고리즘이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보통은 그 느낌도 받기 어렵습니다. 알고리즘의 목표 우선 순위는 큰 승리-작은 승리순으로 되어있으니까요.
그리고 보통은... 상대 대국자가 실력이 없을 경우 큰 승리를 목표로 움직입니다. 그런데.... 거의 종국 직전까지 승리확률 50-51%대를 유지했다는건....
김회장님의 바둑실력이 보통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지요. 대단하십니다."
얼굴에 완연한 존경의 빛을 띄우고 말하는 데미스의 모습을 본 태준은 어깨를 들썩이며 말을 이었다.
"바둑은 꽤 오래된 취미니까요. 거기다...."
'전생에 접대용으로 배운 바둑으로 아마 7단까지 찍었었으니까. 완성품은 커녕 이제 막 태어난 알파고에 맥 없이 밀릴 이유는 없지.'
그렇게 전생의 기억을 누설할 뻔한 태준은 씩 웃으며 마지막 말을 장난으로 묻고는 말을 이었다.
"거기다?"
"제가 더 오래 살았지 않습니까. 이제 태어난지 1년도 안되보이는 어린아이에게 맥없이 질 수는 없지요."
"하하... 맞는 말씀입니다."
"바둑을 이정도로 둘 수 있는 AI를 만든 방법이... 딥러닝이라면... 다른 범용 AI도 개발이 가능하겠군요?"
"그게 저희 딥마인드의 목표입니다. 다만 기존 데이터를 학습시키는데 드는 비용이...."
그렇게 태준의 장난 뒤에 던져진 질문에 답하는 데미스를 본 태준은 눈을 빛내고는 말을 이었다.
"제게 좋은 생각이 있는데. 어떻게 한 번 들어보시겠습니까?"
"저희 베타고에 조언을 주신다니 감사히 받도록 하겠습니다."
"... 잠깐. 베타고? 이 AI의 이름이 베타고입니까?"
"예. 아직 저희가 만족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라서요. 동물계도에 알파와 베타가 있지 않습니까? 이 친구가 만족스럽게 성장해준다면...
그 때는 베타대신 알파라는 코드네임을 달게 될겁니다."
데미스의 설명에 태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렇군요. 아직 이 정도에 만족하지 않으셨다니 다행입니다. 그럼 제 생각을 말씀드리기 전에...."
"전에...?"
"우선 계약부터 하시죠. 데미스. 딥마인드. 제게 팔 생각은 없습니까?
제게 파신다면 지금의 연구는 물론이고 앞으로 하실 연구까지 전부 지원하죠.
만약 파신다면... QULAB산하로 들어가게 되고, QULAB의 모든 자원에 접근 가능한 소장급 대우를 약속드립니다.
소장급 대우면 일반적인 회사 직급상으로는 CTO급입니다."
"QULAB이면.... 그 QULAB 말씀이십니까?"
"예. 그 QULAB입니다. 저희 유니버스 그룹의 페이턴트 홀딩스이자 전문 연구기관이죠.
그 곳에선 반도체 설계도 하고 있으니... 알파고를 위한 AI 프로세서도 개발이 가능합니다.
실제로 USML사의 노광장비를 연구 생산용으로 가지고 있기도 하고요."
태준의 말에 데미스는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뭔가를 떠올린 듯 말을 이었다.
"저 뿐만이 아니라..."
"예. 다른 두 친구분들 역시 같이 소장급으로 대우하겠습니다. 물론 QULAB의 모든 부서가 그렇듯 연구 자율성도 보장합니다.
여기 직원들도 마찬가지로 QULAB소속으로 온전히 고용승계할 것이고요. 직원들의 직책 역시 딥마인드에서의 직급체계를 제대로 승계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태준의 말에 데미스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너무... 좋은 조건이군요. 그렇다면 가격은...."
"4억달러에 모든 것을 승계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채무부터. 고용. 설비까지 전부. 거기다 연구비 책정은 별도로 진행하는 것으로 해서... 예산자율성도 보장하지요.
아 물론 4억달러는 주주들에게 드릴 순수한 가격입니다. 채무는 계산하지 않은."
그 말에 데미스는 다른 두 창업자들의 말을 듣기도 전에...
"... 팔겠습니다."
라고 답했다가 놀란 표정으로 말을 정정했다.
"저는 일단 팔 생각이 있습니다...만, 일단 다른 친구들에게도...."
"예. 가서 충분히 논의하고 오시면 됩니다. 언제쯤 제가 다시 방문하면 될까요?"
"번거로우실테니 제가 어떻게든 오늘 안에 친구들과 의견을 조율해오겠습니다."
"그러시죠. 그럼."
...
..
.
그렇게 태준과 조비서를 다시 응접실로 안내한 데미스는 미친 사람처럼 빠르게 CEO룸으로 달려갔다.
그렇게 데미스가 문을 박차고 들어가자, 태준에게 말했던 '친구들'이자 동료 연구자들이기도 한 셰인 레그와 무스타파 술레이만이 데미스를 보며 말을 이었다.
"데미스. 너도 확인한거야? 방금 알파고 대국 기록...."
"그보다...! 논의할 게 있어....!"
"무슨 소리야. 논의라니. 연락 받고 나가더니 대체..."
"유니버스... 유니버스 회장이 지금 응접실에 있어."
그 말에 셰인 레그와 무스타파 술레이만이 놀란 표정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걸 왜....! 아니 그보다 그럼 지금까지 김태준 회장을 만나고 온거야?"
"그렇다니까."
"대체 왜 온 거래?"
그렇게 데미스가 전후 사정을 설명하자 두 사람은 놀란 표정으로 거의 동시에 털썩 주저앉고는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 대국 기록이.... 김회장이 둔 대국기록이다?"
"그렇대잖아... 거기다 인수제안도 해왔대잖냐... 순수하게 4억 달러를 준대잖아..."
그렇게 넋놓고 대국 데이터를 보며 혼잣말을 내뱉던 두 사람 중 하나인 셰인이 뭔가 생각이 났다는 듯 벌떡 허리를 펴며 데미스에게 물었다.
"그보다. 준다던 조언은?! 조언을 준다더니 인수제안을 했다.... 라고만 했잖아."
"그래. 조언은? 김회장 정도 되는 사람의 조언이라면 흘려 들을 수는 없지."
"인수제안이 중요한 건 사실이지만. 그 조언도 매우 중요한 사안인거 알지?
오. 데미스 제발. 잊어버렸다고는 하지마. 놀란 건 알겠지만 절대 잃어버리면 안되는 말이라고 그거!"
그 말에 데미스는 난감한 표정을 지어보이더니 이내 미간을 찌푸리고는 말을 이었다.
"그... 그러고 보니 조언에 대해선 말씀을 안하셨는데?"
"데미스...! 네가 잊어버린건 아니고?!"
"아니야. '생각을 말씀드리기 전에...'라고 하시면서 인수제안을 해오셨다고."
그 말에 세 사람은 그제야 태준이 던진 떡밥이 무엇인지 깨닫고는 얼굴을 쓸어내리며 말을 이었다.
"하긴... 그냥 공짜로 들을 수 있는 조언이 아니겠지."
"분명 그 조언. 절대로 그냥 조언이 아니야.... 놀라운 바둑 실력도 실력이지만...
현직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쉬었는데도 우리 알고리즘의 핵심인 딥러닝을 자연스럽게 말했다는 점에서..."
"거기다 조건도 좋지. 안 그래도 또 빚내서 직원들 월급줄 걱정에 피가 말라가는 느낌이었는데....
4억 달러에 사준다니. 거기다 그 유명한 QULAB의 소장급으로 이직까지 시켜준다?
데미스. 설마 거절하거나 하진 않았겠지?"
"우리 의견은 찬성이라고... 네가 거절했다고 해도 우린 이 조건이면 우리 지분 팔거니까!"
그렇게 잠시 생각에 잠겼던 두 사람이 다시 흥분하며 데미스를 몰아붙이자 데미스는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도 응접실에 계셔. 너희들이 당연히 받을 줄 알고 내가 당장 동의 구해오겠다고 하고 달려온거야."
"잘했어! 데미스!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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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흥분한 표정의 두 사람과 그 두 사람을 부끄러워 하는 데미스를 앞에 둔 나는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보아하니.. 이야기가 잘 된 것 같군요."
"물론입니다."
"여기... 미스터 레그, 미스터 술레이만. 데미스가 자리를 비운 사이 두 사람을 위한 계약서도 작성했습니다. 물론. 여기 데미스를 위한 계약서도 만들었고요.
읽어보시고. 수정할 부분 있으면 가감없이 이야기 해주시죠. 데미스에게 제안했던 내용은 전부 넣었습니다."
그렇게 내가 미소를 지으며 계약서를 건네자 세 사람은 계약서를 읽어보지도 않은 채 바로 뒷면으로 넘기더니 서명을 하고는 내게 건네주었다.
"... 여기 있습니다."
"여기요."
"회장님도 서명해주시죠."
데미스야 사전에 내게 들은 이야기가 있어 바로 동의할 줄 알았지만, 남은 두 사람마저 바로 동의를 해버리자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내 반응을 본 셰인과 무스타파는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 좋은 조건에 뭔갈 더 요구하면 그게 머저리죠. 회장님도 거부하실 권한이 있으실텐데."
"맞습니다. 그보다. 회장님 서명만 들어가면 저희는 바로 QULAB 연구소장이 되는겁니까?"
순수하기 짝이 없는 그들의 태도에 옆에 앉아있던 조비서 역시 무표정을 풀고는 웃었고 나는 그런 그들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물론입니다. 조비서."
"예."
"지금 바로 명함 만들어오세요. QULAB 딥 마인드 연구소 소장으로 세 사람 명함 파서 바로 전달해드리죠. 그리고 가는 길에... 계약서 대로 전부 인수작업하고, 딥마인드 명의의 채무 전부 정리하는 것 잊지 마시고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내가 서명한 서류를 조비서에게 건네며 말하자 조비서가 자리에서 일어났고, 조비서는 나가기 전 세 사람을 향해 말을 이었다.
"세 분. 돈은 어떻게 받으실 생각이십니까?"
"예?"
"계좌로 받으실 생각이십니까? 너무 거액이라..."
그 말에 세 사람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보였고, 나는 그런 세 사람을 보며 말을 이었다.
"잘 모르시겠으면... 그 부분은 저희쪽에서 알아서 진행해드리겠습니다.
유니버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데미스, 셰인, 무스타파."
그렇게 세 사람에게 환영인사를 건넨 나는....
'인공지능까지 확보했으니.... 곧 완전주행자동차도 만들 수 있겠어... 뭐 인공지능을 어딘들 접목시키지 못하겠냐마는...'
세 사람의 인사를 받으며 속으로 앞으로 내 손 안에서 일어날 미래에 대해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