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 혁신의 시대 (9)
"인사때 들었습니다만... 앓던 이를 빼드리겠다니 무슨..."
"귀 사에도 소식이 들어갔겠지만, 얼마전 저희가 니콘과 캐논을 인수했습니다."
"예... 그럼..."
"예. 소송을 정리하러 왔습니다."
태준의 말에 에릭 뮤리스 ASML 사장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을 이었다.
"안 그래도 저희쪽에서도 요청드리고 싶은 것이었는데... 마음이 맞았다니 잘 되었군요."
"현재는 협상으로 사용권계약을 맺고 있으시죠? 그걸 저희가 인수한 것이고요."
"그렇습니다. 꽤나 부담이 되는 가격이기도 하고... 기술적으로도 아직 논쟁의 여지가 남아있어 저희쪽도 검토중에 있던 사안이었습니다."
그 말에 태준은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검토라...."
"물론 이제 막 인수하신 입장에서 불쾌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아뇨아뇨. 불쾌하지 않습니다. 일은 제대로 해야지요. 검토라고 하시면 니콘 시절의 협상을 파기하고 다시 법적 분쟁을 재개하실 생각이라고 생각하면 될까요?"
그 말에 에릭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예. 저희 최대 고객사이신 유니버스측에는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이번 건에 대해서는..."
그 말에 태준은 손을 들어 에릭의 말을 끊어내고는 말을 이었다.
"그 전에. 저희 쪽 제안부터 들어보시고 후에 그 분쟁. 하실지 말지 결정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태준의 말에 에릭은 놀란 표정을 지어보였고, 그 놀란 표정에서 말이 나오기도 전에 태준이 손짓으로 조비서를 불러 서류하나를 내밀었다.
"어디까지나 제안입니다. 이 제안을 받지 말지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ASML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그렇게 조비서의 손에서 에릭으로 서류가 넘어가자 태준은 빤히 웃으며 에릭을 바라보았고,
에릭은 영문도 모른채 어색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서류를 받아 넘겼다.
그렇게 침묵속에서.
태준의 미소를 배경으로 서류 넘어가는 소리만 사무실을 가득 채웠다.
그렇게 한참을 서류를 살피던 에릭은 이내 다시금 서류의 맨 앞으로 가더니 놀란 표정을 지어보이며 말을 이었다.
"합병이라니... 니콘... 아니, 그러니까.."
"예. 저희 유니버스 포토리소그라피 사업부와 ASML간의 합병 제안입니다. 한 집안 식구가 되면, 더는 소송이고 뭐고 할 것 없지 않습니까."
"아니... 그야 그렇지만... 제안이 너무 급작스러운데요."
"손해는 아니라고 보여지는데요. 어차피 저희쪽 기술이야 QULAB에서 포토리소그라피 사업부에 사용계약을 최저요율로 맞춰놓은 상태고... 합병하면 그 계약 역시 승계하게 되니..."
"당연히 저희 ASML측에도 손해는 아니겠지요. 아니 오히려 반길 일이지요. 하지만...."
에릭이 말을 하다 멈추며 서류를 넘겨 한 페이지의 문구를 가리키고는 말을 이었다.
"여기. 40%의 주식인수 및 의결권 제한 조항. 이것이 걸리는 군요."
"어떤 점에서 걸린다는 것입니까?"
"의결권 제한 조항이 걸려있다고는 하나 합병 후 지분 40%를 가져가겠다는 것은 조금 거래가 과한 것이 아닌가 말씀드리는 겁니다.
방금도 말씀 하셨지만 유니버스 포토리소그라피 사업부는 핵심 기술도 없이 말 그대로 생산을 담당하는 곳인데...
생산만 하는 곳을 우리와 합병하며 40%나 되는 주식을 가져가겠다는 것은 과한 처사입니다."
그 말에 태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럼 어느정도가 적당한 선인지 한 번 제안해보시면 어떻겠습니까?"
"그 부분은 따로 상세한 논의 과정을 거쳐야 겠지만... 제 '개인의견'으로 한정지어 대략적으로 계산한다면 20%가 최대라고 보여집니다."
에릭의 말에 태준은 속으로...
'역시 미리 후려쳐놓기를 잘 했어. 반이나 깎아버릴 생각을 하다니.... 그럼...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볼까...?'
원하던 지분보다 더 큰 지분을 써넣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며,
깔린 밑밥 위로 미끼를 건 낚시바늘을 ASML이라는 못에 던져넣었다.
"35%. 거기에 지금 상용화 단계에 와있는 EUV 장비에 대한 남은 개발 비용 전액 지원은 어떠십니까? 물론 EUV에 대한 특허권은 합병 후 법인에 귀속되는 조건입니다."
"...EUV에 대한 가능성이 있다고 보시는 겁니까?"
에릭의 말에 태준은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에릭은 가능성이 없는 사업을 하고 있었던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만... 상용화 단계까지는 아직 멀었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모든 연구가 다 그렇지 않습니까? 제 산하에 제약기업은 없습니만, 제약 쪽은 거의 복권을 긁는 심정으로 연구에 임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EUV는 그에 비하면 사정이 훨씬 좋다고 생각합니다."
"업계에서는 그렇게 보지 않지 않습니까?"
"인텔과 사성 말입니까?"
"유니버스도 포함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선주문을 통해 자금 마련을 하려 했지만 전부 거절했으니까요."
그 말에 태준은...
'우리 쪽에서도 EUV노광장비에 대한 제안을 거절했었나.... 하긴 실무진 입장에서는 미래를 모르니 거절할 수 밖에.'
속내를 감추며 말을 이었다.
"그야 이렇게 제가 직접 와서 제안을 드리려 했기 때문이지. 기술에 대한 불신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습니까?"
"예....."
그렇게 뜸을 들인 태준은 앞에 주인을 잃고 방황하듯 회의 테이블을 떠다니던 서류를 슬쩍 밀어 치우고는 말을 이었다.
"반도체 업계에서 메모리, 시스템 전부 1위를 하는 저희 유니버스의 판단이니 EUV는 분명 성공할 겁니다.
저희는 여러분의 성공에 도움이 되고자 여기 온 것이고요."
그런 태준의 말에 에릭은 순간 고개를 끄덕일 뻔 했으나, 이내 정신을 가다듬고는 상투적인 말로 오늘의 회의를 마무리 지었다.
"응원 감사합니다. 이 사안은 검토 후에 답변 드리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여기까지 오셨는데... 어떻게... 견학이라도 하고 가시겠습니까?"
"좋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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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태준이 ASML에 제안서를 보내고 이틀이 지나고, 사성의 이진휘 역시 ASML 본사가 위치한 벨트호벤에 도착했다.
태준의 등장과는 달리 전자쪽 사장단은 물론, 관련 연구진들까지 수행원만 50명이 넘는 대 인원을 꾸려 찾아온 이진휘는 ASML에 도착하자마자 에릭을 만나 말을 이었다.
"니콘과 캐논이 공중분해 된 것도 모자라 유니버스에 넘어갔다는 소식 들으셨겠지요."
"들었습니다."
"저희로서는 난감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반도체 사업... 특히 메모리 반도체에서 유니버스와 경쟁을 하고 있는 저희로서는 유니버스의 고객사로 남는 것이 퍽 곤란한 일이라서요.
해서 이 참에 반도체 장비를 다변화하고, 차세대 EUV노광장비 역시 도입을 검토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그러십니까. 그럼..."
이진휘의 말에 에릭이 영업맨의 얼굴을 하고 카탈로그를 꺼내들어 보이려던 그때, 이진휘가 마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번에 저희가 ASML지분 취득을 했습니다. 도합... 한 3%쯤 되는 지분입니다."
"주주시라니 반갑습니다."
"그 주주로서 안정적인 공급을 요청드림과 동시에... 유니버스에 대한 납품을 후순위로 미뤄주신다면...
우리 사성으로서도, 니콘... 아니 이제는 유니버스군요. 유니버스와 마찰을 빚고 있는 ASML측에도 서로 이로운 일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보시는지요."
그 말에 카탈로그를 꺼내들려던 손을 멈춘 에릭은 가만히 이진휘의 표정을 살피더니 말을 이었다.
"저희는 귀사처럼 B2C 사업을 하는 것이 아닌지라, 납기가 생명입니다.
그리고 이제 경쟁사가 되었다고 해도 유니버스 역시 우리와 오랜 시간 함께해온 고객사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관계는 여전히 지속중이지요.
그런 고객사에 어떠한 이유에서든 피해를 끼칠 만한 행동은... 저희 ASML에 도움이 되지 않는 만큼.... 그 제안은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다만, 주주이신 만큼 지금부터 발주하는 물량에 대한 최우선 납품 쿼터를 배정해드리는 정도의 편의는 봐드릴 수 있습니다."
에릭의 단호한 거절에 이진휘는 아쉽다는 표정을 지어보이고는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유니버스와 손을 잡지는 말아주십시오."
이진휘의 말에 에릭은 말 없이 그저 사무적인 목소리로
"주주로서의 요청이시라면 정식으로 주주총회를 통해 안건을 올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하고는....
"그럼, 여기 저희 회사의 카탈로그입니다. 보시고 도입하실 제품을 고르시면 저희 쪽에서 상세한 도입 가능 일정과 견적을 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영업용 미소를 지어보이며 카탈로그를 꺼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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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태준과 이진휘가 다녀간 뒤.
ASML 내부에서는 회의가 이어졌다.
"김태준 회장의 제안이 가장 합리적이군요. 지분 35%에 EUV노광장비 양산체제까지 추가 투자. 니콘 대에부터 이어진 분쟁까지 전부 해결."
"반면.... 사성측의 제안은 상당히 고압적인 면이 있었지요. 결국 새로 장비를 대량으로 발주해준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고작 지분 3% 정도로 이렇게 나온다니...."
"거기다 사성측은 EUV노광장비에 대해서는 말만 꺼냈을 뿐, 우리쪽이 제안한 선 주문은 받지도 않았습니다."
"반면 김태준 회장은 견학 때에도 EUV장비에 큰 관심을 보였지요. 덤으로 1대분이기는 하지만 바로 선결제 주문까지 하고 갔고요."
"QULAB 연구용으로 사간다고 했을때는 얼마나 부럽던지..."
이사들의 말에 에릭 역시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정리하듯 혼잣말에 가까운 말을 던졌다.
"확실히 진정성 면에서... 사성과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군요."
그 말에 다른 이사 하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예. 일단 주총에서 결정이 나봐야 알겠지만.... 이런 태도의 차이라면 아무래도 김태준 회장의 제안이 받아들여질 수 밖에 없습니다."
"외려 주주들은 좋아할 겁니다. 막말로... 요즘 시대가 유니버스의 U자만 붙어도 주가가 날아오르는 시대인 만큼...
유니버스와 한 지붕 식구가 된다는 사실에 싫어할 주주는 없을테니까요."
"반대는 사성전자 정도 뿐이겠지요.
전체 주식의 27%가 CGC (Capital Group Companies), Blackrock, Baillie Gifford 이 세 개의 자산관리회사의 소유인 만큼, 합병에 우호적일 겁니다.
그 치들이야 주가 상승이 곧 수익인 자들이니까요.
거기다 ASML이라는 회사를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ASML이 유니버스 포토리소그라피 사업부를 먹어치우는 그림이니, 기존 일반 주주들 역시 반발이 크지 않을 테고요."
"하지만, 김태준 회장이 75%로 제한된 의결권 행사를 한다 한들, 회사의 주인이 바뀌는 일인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거기다 (네덜란드) 정부의 승인도 얻어야 하고요."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여기 제안서에 보면 정부 승인이 어려울 경우 KTJC-N... 그러니까 유니버스의 모회사인 KTJC-N 네덜란드 본사에서 우리를 지배하는 것으로 정리하겠다고 했으니까요.
거기다 필요하다면, 여기 벨트호벤 위쪽 오스콧에 반도체 공장을 짓겠다는 것까지도 나와있습니다.
정부에서도 1만명 소도시에 반도체 공장이 들어선다고 하면 좋아하겠지요."
그렇게 이사들끼리의 질답이 오가고, 어느정도 결론이 나오자 에릭은 조용히 손을 들고는 말을 이었다.
"그럼 추가 수정이나 협상 없이 이대로 안건을 주총에 올려도 되겠습니까?"
"좋습니다."
회의(라기 보다는 조건 확인에 가까웠지만) 끝에 안건을 주주총회에 올리기로한 ASML이사회 멤버들의 결정에 의해,
태준의 제안서는 별다른 수정없이 주주총회에 올라왔고,
이 안건을 본 주주들은....
"의결권을 제한한다 한들 어차피 합병 이후 사실상 유니버스의 지배로 들어가게 되는데 구태여 의결권 제한이 필요하오?"
"맞습니다. 여태 유니버스가 보여준 혁신적 행보를 볼 때, 차라리 유니버스가 사주로서 ASML을 대표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은데 말이지."
"거기다, 이렇게 인수할 경우 반도체 장비업계에서 사실상 우리 ASML은 독점적 지위에 오르는게 아니오.
그럴 바에는 의결권 제한을 없애고 김태준 회장의 유니버스 산하로 들어가는 편이 어떻겠소?"
"다만, 확실히 35%는 과한 면이 있군. 유니버스가 합병 기업의 주식 30%를 먹는 것으로 해서 협상해보는 것으로 하지요."
"가장 좋은 것은 KTJC의 일반주를 받는 것이지만... 그것까지 바라기에는 우리도 실적이 부족해서...."
태준이 애써 감춰둔, 그리고 원했지만, 대놓고 드러내지 않았던 유니버스 편입을 저들 스스로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주주들의 제한적 찬성 96.4%, 전면적 반대 3%(물론 이것은 사성전자의 의결권이었다.)라는 결과에 따라 태준에게 다시 합병절차에 대한 수정 제안서가 들어왔다.
이를 본 태준은....
"허허... 거 참... 이러면 곤란한데...."
더 좋은 조건으로 넘어온 제안서에 곤란하다는 말을 내뱉으며 웃음을 참고 있었다.
"이게 아니라면 아예 받지도 않겠다고 합니다."
"그 쪽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그럼 이렇게 하는 것으로 해서 네덜란드 정부에 신고하고 마무리 하는 것으로 하죠.
추가 연구자금 집행은 모든 건이 마무리 되는대로 하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비식비식 새어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으며 그들이 보내온 제안서에 동의를 의미하는 사인을 하고 보냈다.
"진짜 기술 독점의 시작이네. 거 참... 이렇게 되면 반독점규제 맞기 쉽상인데...
오랜만에 미국에 가서 기름칠 좀 해야하나....? 바쁘다 바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