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돈 쓸어담는 재벌가 서자-167화 (167/200)

167. 혁신의 시대 (8)

"신이 특별히 사랑하는 사람 따윈 없다.

신은 그저.

모두에게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시련'과

'잡을 수 있을 만큼의 기회를 주고'

인간의 선택을 지켜볼 뿐이다."

"오.... 멋있어."

원이와 함께 TV 속 드라마를 보며 혼잣말을 내뱉는 민영의 목소리에 나는 피식 웃으며 생각에 잠겼다.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시련이라..."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시련이었다면 전생에 그렇게 되진 않았겠지 생각하다가도,

또 한 편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시련을 주었기 때문에 다시 살게 해준게 아닐까하는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나는 서류를 뒤적이고 있었다.

"회장님, 뭐라고 하셨어요?"

"아, 아니. 대사가 멋있어서."

"그쵸. 이번에 앤이 공 많이 들였다더니... 캐스팅부터 연출까지 상당히 좋네요."

"우리 회사꺼야?"

"요새 나오는 드라마 중에 우리 회사가 안낀 게 있긴 해요? 하다못해 독립영화에도 아무런 PPL도 없이 자금 지원하면서..."

그 말에 나는 슬쩍 시선을 TV로 주었다가 다시 거두며 말을 이었다.

"원이도 재미있니?"

"예. 재미있어요. 마코 누나도 미국에서 저 드라마 보는데 재미있대요."

"다행이구나. 아빠가 옆에 없어서 많이 못 놀아주는데."

"엄마가 아빠는 세상을 바꾸느라 바쁘다고 하셨어요."

그 말에 나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세상을 바꾸는 일이긴 하지. 그럼 난 이만 가볼께. 비행기 시간이 다 되서."

"벌써 가요? 진짜 저녁만 먹고 바로 가네요?"

"세상을 바꾸러 가야지. 원이도 저 드라마만 보고 자고. 빨리 커야 네가 내 일도 돕고 그러지."

"네."

"다녀올께."

"회장님이 이렇게 바쁘시니 우리 원이만 불쌍하지. 그치?"

그 말에 나는 멀뚱히 서있는 원이를 안아주고는 말을 이었다.

"그치. 온 가족이 일하느라 바쁜데. 원이도 엄마 지키느라 바쁘고. 당신도 일하느라 바쁘고."

"그러니까 이제 슬슬..."

"아직은 아니야. 흔들리지 않는 뿌리를 내리려면 시간이 걸리는 법이니까."

내 말에 원이가 멀뚱히 나를 바라보자 나는 원이의 머리를 마저 쓰다듬어주고는 말을 이었다.

"당신도 이리와."

그렇게 민영이까지 안아주고 돌아선 나는 문 앞에선 조비서를 보고 말을 이었다.

"조비서. 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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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ML.

네덜란드 굴지의 반도체 노광장비 업체.

그 위상은 태준의 전생에서도, 그리고 지금의 현생에서도 굳건한 것이었다.

다만, 시기가 시기인지라.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그런 위상까지는 아니었다.

ASML은 필립스에서 분사된 반도체 제조장비 기업 ASMI와 네덜란드 필립스가 각각 자본을 투입해 만든 회사로,

1988년 필립스에 독립하기 이전까지는 사실상 필립스의 자회사 내지는 관계사로서 기능해온 기업이었다.

더구나 독립 직후, 1990년대에는 전 세계가 일본이 미친듯이 찍어내는 가전제품과 반도체에 억눌려있었기에, ASML의 위상은 그리 큰 편이 아니었다.

그 시기에는 니콘이나 캐논과 같은 일본의 광학기업이 전 세계의 반도체 장비시장을 석권하던 시절이었고,

실제로도 니콘과 캐논의 기술력이 물이 오를대로 오른 상태였기에, ASML은 이 경쟁에 낄 여지조차 없었다.

그렇게 10년, 20년의 시간동안 ASML은 만년 3류 반도체 장비기업 딱지를 단 채 뒤에서 칼을 갈며 절치부심한 끝에 지금의 위상까지 올라왔고....

그 위상을 지켜내기 위해..

"최근 발표한 극자외선 노광장비 스펙표 있습니까?"

"여기 있습니다."

극자외선 노광장비. EUV 노광장비를 개발해 니콘과 캐논의 남은 숨통을 끊어놓고자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그 자체로 니콘과 캐논을 인수하고 쪼개 유니버스의 산하로 들인 태준으로서는 악재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 모든 사실을 알고도 태준이 니콘과 캐논을 인수한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양산 시점이 2012년이라... 그 것도 연간 최대 40대가 한계...?"

아직 개발에 성공했을 뿐, 양산 수준까지는 올라오지 못했다는 점.

"예. 거기다. 여기. 최근에 필립스가 남은 지분까지 모두 팔아치우면서 ASML의 완전한 독립, 그리고 필립스는 의료기기분야에 전념하기로 했다는 기사입니다."

그에 더해 그간 기술개발의 자금줄이었던 필립스가 경영전략을 변경하며 ASML의 독립 이후에도 계속 가지고 있던 주식을 팔아치우며 대주주에서 빠졌다는 점,

"그리고... 이건 우리 QULAB 반도체 연구팀에서 보내온 업계 동향입니다. 인텔도 그렇고...

EUV노광장비에 대해서 '가능성'측면에서는 높이 평가하지만 아직 시기상조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 합니다.

거기다 메모리 반도체를 하고 있는 사성 역시 EUV노광장비를 시범 도입을 시사하긴 했지만, 아직 계약은 하지 않고 있고요.

여러모로 회장님께는 지금이 적기인 듯 싶습니다."

그리고 업계에서 전반적으로 ASML의 기술이 차세대 노광장비의 표준이 될 것이라고는 인정하고 있었지만, 양산까지는 멀었다고 보고 투자를 꺼리고 있다는 점까지.

이 모든 것을 본 태준은 ASML을 인수하기 위한 발판 겸, ASML을 노리고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위한 연막으로서

니콘과 캐논을 인수하고 바로 반도체 장비 부문을 유니버스에 귀속시킨 것이었다.

"예. 거기다 우리는 니콘을 인수하면서 니콘이 벌이고 있는 특허권 소송을 미끼로 그들에게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일 자체의 난이도는 그리 높지 않을 겁니다.

다만.... 네덜란드가 그리 쉽게 ASML을 놓아줄리가 없으니... 완전 인수는 어렵겠지요."

"완전 인수가 어렵다면...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니콘과 캐논에게서 뜯어온 반도체 부문과 통합을 추진할 생각입니다."

"통합이라면...."

"예. ASML을 세계 최대규모의 반도체 업체로 만들고, ASML의 25%를 우리가 먹는 그런 그림으로 갈 생각입니다."

그렇게 태준의 머릿속에만 있던 계획이 조비서의 질문을 신호삼아 태준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조비서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질문을 던졌다.

"왜 절반도 아니고... 25%인겁니까?"

조비서의 이런 질문은 타당했다.

여태 태준이 보인 행보는 말 그대로 7대 죄악의 굴라 그 자체였다.

모든 것을 삼키고, 모든 것을 한 몸으로 엮어,

사용자들을 완전히 자신의 세상에 가둬두는 것.

그런 운영방식으로 지금의 거대한 제국을 일궈낸 태준이었고,

그것을 꽤 초기부터 보아온 조비서였기에 태준의 이런 행보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리고 조비서를 옆에 둔지도 꽤 시간이 지난 태준은 그런 조비서의 질문에 웃으며 답했다.

"네덜란드를 자극해봐야 좋을 것이 없기도 하고.... 무엇보다 반도체를 만드는 기업이 우리만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업계 1위라고 해도 업계 전체를 자극할 필요는 없지요.

우리 유니버스나 인텔은 IDM(Integrated Device Manufacturer; 종합반도체 회사)로서 움직이지만,

설계만 담당하는 팹리스부터, TSMC와 같이 생산만 담당하는 파운드리 업체도 있는 상태에 만약 우리가 장비회사에 과도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면,

ASML의 기술이 아무리 좋아도 쓰는 사람이 없어질 것이고, 결국 수요가 공급을 창출한다는 논리가 여기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ASML의 기술을 대체할 새로운 기업이 등장하게 되겠지요.

우리는 제한적 경영권 행사를 약속하고 최소 25%, 최대 30%까지만 ASML의 지분을 확보해 ASML이 만들 새로운 장비를 우선 도입하고, 장기적으로도 해당 장비를 안정적으로 공급받으면 족합니다.

B2C사업과는 달리 B2B사업은... 락인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우니까요."

그런 태준의 설명에 조비서는 다시 한 번 감탄하며 말을 이었다.

"여지를 둠으로서 회장님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드는 것이군요."

"그런 셈이지요. 우리가 가장 큰 주인이지만, 완전히 우리 것이 아니고, 우리의 영향력을 일부 희생함으로서 그들의 수요 역시 25-30%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니... 그 정도가 가장 적당한 수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비행기 위에서 대화를 태준과 대화를 나눈 조비서는 창밖 어슴푸레 빛나는 달빛과 그 달빛을 반사하는 구름바다를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매번 느끼지만, 이 분이 우리나라 분이라 다행이고, 내 상사라 다행이네. 만약 일본사람이었으면... 어휴...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네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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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태준이 네덜란드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가고 있을 무렵, 사성에서는...

"김태준 회장이 출장을? 행선지는."

"영국이랍니다."

"영국.... 뜬금없이 영국은 왜. 거기엔 KTJC 지사도 없을텐데."

"그건 더 알아보고 있습니다."

"빨리 알아봐. 아무 생각없이 가는 것은 절대 아닐테니까. 영국지사에도 연락해서 김회장 감시할 준비 하라고 하고."

태준의 일거수일투족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태준에 대한 보고를 받은 사성의 회장 이진휘는 보고를 받아 자신의 서재에서 나가는 비서를 보다가 이내...

"후...."

한숨을 내쉬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니콘, 캐논을 전격 인수한 것도 기가차는데... 이번엔 영국에서 뭘 또 어쩌려고 그러는건지."

그렇게 한숨을 내쉰 이진휘는 여태까지 태준의 행보를 정리한 매우 굵직한 보고서를 찬찬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돈 놀이로 번 돈으로 뜬금없이 귀국해서는 카폰으로 처음 전자업계에 진출.... 그런 다음에는 다시 돈 놀이로 계속해서 규모를 키워나가다가...

어느 순간 인터넷 사업에 진출해서 모든 것을 잡아먹었지. 그리고는.... 스마트폰을 빵 하고 터뜨렸고.

그냥 보기만 봐도 부러워서 샘이 날 정도인데... 여기에 이제 소재, 장비까지 전부 가졌으니...

이제는 우리도 진짜 유니버스에 완전히 종속되게 생겼어... 이를 타개하려면...."

그렇게 휘리릭 보고서를 넘기며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던 이진휘의 눈에....

"KTJC-N....? 네덜란드...? 네덜란드....!"

KTJC의 네덜란드 본사 설립일을 본 이진휘는 다시 보고서를 거칠게 넘기며 타임라인을 확인했다.

"이거였군... 네덜란드와 아일랜드에 본사를 설립한 뒤.... 니콘, 캐논을 먹었으니 확실해.

ASML을 노리는 게.... 밖에 누구없나?!"

"예. 회장님."

"지금 당장 네덜란드 행 티켓 끊고, 네덜란드 지사에 연락해서 바로 ASML과 면담잡아! 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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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비행을 마치고 영국을 거쳐 네덜란드로 들어온 나는 곧장 ASML의 본사가 있는 벨트호벤으로 향했다.

아인트호벤의 교외도시인 벨트호벤은 한국으로 치면, 분당과도 같은 베드타운이었기에 가는길은 내내 한적했다.

"말씀하신대로 약속은 잡아뒀는데.. KTJC-N에서 온 보고에 따르면, 사성 회장이 네덜란드행 티켓을 끊었다고 합니다."

"사성 회장이 지금 누구죠? 정회장님과 이회장님은 물러나셨지 않습니까."

내 말이 어색할 법도 했지만, 조비서는 당연하다는 듯이 내 질문에 답을 하기 시작했다.

"예. 지금은 전대 이명석 회장의 후임으로 셋째인 이진휘 회장이 자리를 물려받았습니다."

"이진휘 회장이라... 사성전자를 맡고 있던 그 분이군요. 하긴.... 그 집안에서 물려받을 사람은 그 사람 뿐이겠지요.

다른 형제들은 다 쫒겨나갔으니. 생각보다 늦다 싶었는데 결국 물려 받았군요. "

"예. 사성전자 시절 반도체 굴기를 선언했었다가 우리 유니버스 그룹의 약진에 밀려나, 그 이후에는 중공업 중심으로 경영체제를 굴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다시 여기로 온다니.... 아직 저희 쪽에서도 그 의도를 파악중에 있습니다."

성실한 조비서의 보고에 나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파악까지 할 필요가 있습니까? 그런 사람이 갑자기 여기 네덜란드에 왔다는 건... 역시 저와 같은 대상을 노리고 있다고 보면 되겠지요.

대개 리더는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인정하는 순간 재도전의 기회도 사라지니까요.

이진휘 회장도 전자 사장 시절 던진 목표를 이루지 못한 것에 사과를 했을리 없지요.

그런 상황에서 대뜸 네덜란드로 오고 있다면...다시 재도전을 위한 것이거나 혹은 내가 하는 일에 훼방을 놓기 위해 여기로 온다고 보면 되겠지요.

구태여 인력낭비하지 말고 그냥 두라고 하세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이진휘에 대한 오더를 내리고 얼마뒤, 나는 ASML 본사에 도착했다.

그렇게 본사 건물에 도착한 나는 나를 맞이하기 위해 정문앞에 나온 이사회 임원들을 보고는 차에서 내려 반가운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김태준입니다."

"어서오세요. ASML 이사회 의장이자 최고경영책임자인 에릭 뮤리스입니다."

인사와 함께 건네진 손을 맞잡은 나는 씩 웃으며 자신을 CEO라 밝힌 사내, 에릭에게

"이렇게 만나서 반갑습니다. 여러분의 앓던 이를 빼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그들이 기대하는 말을 던지며 푸근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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