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 밀월 (2)
호텔에 도착한 태준은 곧장 가장 높은 층에 위치한 스위트룸으로 향해 옷을 갈아입고 나와 각국 정상들의 위치부터 확인했다.
"전부 체크인 했습니까?"
"예. 공식 일정상 클린턴 대통령, 푸틴 대통령 등 각국의 지도자들 모두 휴가를 내고 참석하신 것이라 이후 별도의 일정 없이 관광일정만 잡혀있습니다.
예외가 있다면 태국 총리와 주한베트남대사 정도인데....
태국 총리의 경우 휴가차 방한한 라마 9세를 수행한다는 목적이 있으니 사실상 다른 지도자들과 같은 입장이라고 봐야하고,
주한베트남 대사의 경우도 베트남 측에서 우리 더 플러스 호텔쪽으로 보낸 협조공문에 따르면
주한베트남 대사의 퇴임을 앞두고 후임 대사의 인수인계 겸 해서 한국 관광 일정을 잡았다고 밝혀왔으니...."
잡다한 내용을 포함해 상세하게 설명하는 조비서의 보고를 듣던 태준은 피식 웃으며 조비서의 말을 끊어내고는 말을 이었다.
"뭐... 그건 중요한게 아니죠. 어차피 휴가니 뭐니 하는 것들은 전부 다 핑계일텐데요."
"...예?"
태준의 말에 순진하게 되묻는 조비서를 보며 태준은 혼자 방에서 독수공방하며 지금 이 시간에도 트렁크에 싸들고 온 책들과 씨름하고 있을 민영이 그리워졌지만...
'민영이가 다시 복귀하려면 못해도 일 년은 더 지나야 하니... 아쉬운대로 조비서를 또 키워야 겠군.'
복귀까지 일 년이라는 시간.
복귀 후 단순히 비서의 역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닌 그룹을 총괄하는 법무이사직을 수행해햐 하는 민영의 입장 등을 고려해
태준은 인내심을 가지고 조비서가 성장할 수 있도록 직접 지도에 나섰다.
"제 결혼식을 빌미로 북한 문제를 두고 논의하려는 한미러 삼국의 생각이 들어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나머지 국가들은 전부... 그런 움직임을 눈치채고 한 자리 끼어보려고 온 것이거나 안면이나 트러 온 것이지요.
미국과 러시아를 제하면... 이번에는 베트남 대사가 득을 많이 보겠군요. 중국을 견제하기 가장 좋은 위치이니."
태준의 설명에 조비서가 '아...'하는 깨달음의 탄식을 내뱉자, 태준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는 다시 경과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회담에 쓰일 홀은 정돈이 됬습니까?"
"예. 일단 미국과 러시아측 관계자와 논의를 해본 결과 피로연을 하는 것으로 위장하기를 원해서 일단 제 임의로 한식 피로연으로 급하게 준비중입니다."
"잘 처리 했네요. 특히 그 한식 피로연으로 준비한 것은 꽤 좋은 선택이었습니다.
국빈급 만찬에서 자국 음식을 대접하는 것은 꽤 중요한 문제니까요. 공식행사가 아니라서 실수를 했을 수도 있겠다 생각했는데... 좋은 판단이었습니다.
그럼, 준비가 다 끝나는데에는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약 45분 정도 뒤면 바로 행사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조비서의 보고대로.
정확히 45분 뒤.
모든 준비가 완료되고 피로연을 빙자한 회담이 열렸다.
"준비 하나는 기가 막히는군. 과연 태준이 운영하는 호텔이랄까.... 이 좋은 호텔을 사내용으로만 굴린다니 태준 그 친구도 은근히 사치스러운 면이 있군."
"완전히 사내용으로 굴리는 것만은 아닌 것 같더군요. 일단은 일반 손님도 받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하니. 멤버쉽 제도도 따로 운영하고 있다고 하고."
"흠... 멤버쉽이라.... 꽤 탐이 나는데? 안 그렇소?"
"그야 그렇지만... 구태여 멤버쉽을 따로 얻을 필요는 없지요.
애초에 푸틴, 당신 말마따나, 사실상 내부인 용으로 운영되는 호텔이라 그런지 멤버쉽에 가입하는 가장 빠른 방법이 태준이 운영하는 회사의 내부인이 되는 것이니까요.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조건을 채울 수 있는 사람은 현지에 별장이나 안전가옥을 사는 편이 더 빠르고 편하겠지요."
"그렇게 이용 고객을 한정을 지어놓았으니 호텔이면서도 이 정도 보안이 유지되는 것이겠지... 흠. 아쉽군. 여기 음식이 꽤 마음에 들었는데 말이야."
일단은 표면상 피로연이었기에 식사를 하며 태준의 호텔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두 사람은 태준이 민영과 인사를 오자 슬쩍 눈짓을 하며 말을 이었다.
"슬슬 김태충 그 자도 왔을테니 별실로 이동하지."
"그러지요. 태준도 왔으면 좋겠군요."
"예. 눈에 안띄게 슬쩍 잘 이동해보겠습니다."
그렇게 태준이 두 사람을 따로 별실로 보내고 민영과 인사를 마친 다음 은근 슬쩍 물러나며 별실로 향하자...
"늦어서 우리끼리 먼저 차를 하고 있었네."
티 타임을 갖고 있는 김태충과 클린턴, 푸틴을 볼 수 있었다.
별실이라곤 해도 홀의 1 준비실 한쪽을 완전히 비워 마련한 공간이라 한미러 3개국의 지도자들이 모일만한 곳이 아니었지만,
이들에게 있어 이 곳의 좁고 넓음은 고려대상 자체가 아니었는지 아주 편안한 표정으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
'김태충은 녹차... 클린턴은 커피, 푸틴은 홍차인가.... 거 참. 일부러 저런 것도 아닐텐데...'
그렇게 태준이 조심스럽게 인사하고는 앉자 푸틴이 짖굳은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자넨 어떤 차를 마실건가?"
"예?"
"녹차, 홍차, 커피. 이 중에 어떤 것을 마실 것이냐는 말일세."
푸틴의 장난기 어린 말에 클린턴과 김태충이 흥미롭다는 듯 태준을 보자 태준은 슬쩍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는 곡차를 마시겠습니다."
"곡차?"
"조비서. 맥주 한잔 가져다 주시죠."
그 말에 푸틴이 클클대며 말을 이었다.
"하핫... 맥주라니. 역시 자네는 재미있는 친구야. 확실히 맥주는 차지."
그렇게 다과상에 맥주가 올라오자 태준은 시원하게 맥주로 목을 축이고는 말을 이었다.
"상상이상의 선물 잘 받았습니다. 식 마지막에는 기념사진까지 함께 찍어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세 분 모두."
"태준이 그렇게 툴툴대며 광고란 광고는 다 하는데 별 수 있나요. 아쉬운 쪽은 우리인데."
"뭐 어차피 자네 결혼식 때는 오진 못해도 선물은 보내줄 생각이었기도 하고... 때마침 대통령 권한 대행이 끝나고 정식 취임 전에 휴가도 써야하기도 해서 겸사겸사 온 걸세.
우리가 남도 아니고."
그렇게 클린턴과 푸틴이 말하자 김태충이 헛기침을 몇번 하고는 말을 이었다.
"일단 결혼 축하하네."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따로 제가 주례를 부탁드리고 싶었는데... 저나 제 처 되는 사람이나 집안에 따로 어른이 안계시는데다..
대통령님께 주례를 부탁드리는 것이 어떻게 보면 또 유착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아 주례없는 결혼식으로 진행했으니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별 말을 하는군."
그렇게 서로간의 인사를 마친 네 사람은 이내 남은 차를 비우고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본론의 포문을 연 것은 김태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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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 자네가 직접 중국에 건너가 부드럽게 이야기를 좀 해주길 바라네."
북부전구의 북러중 국경 전진 배치 상황.
거기에 중국 관영 통신인 신화통신의 거친 논평까지.
그 모든 설명을 들은 나는 가볍게 앞에 놓인 다과를 집어먹으며 생각에 잠겼다.
'부드럽게 이야기라... 일이 잘 풀려서 그런가 김태충의 이상론은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네.'
위대한 지도자의 결단이라기 보다는 위대한 사상가 내지는 종교 지도자와도 같은 그의 평화노선에 나는 속으로 혀를 차고는 말을 이었다.
"작금의 상황에서 그렇게 평화적인 방향으로 해결을 보는 것이 의미가 있긴 합니까?"
"... 음?"
"대놓고 군사력을 투사하겠다 시위를 하고 있는 상대에게 좋게 이야기 한들 무슨 수갸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그 말에 푸틴이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 말 자체는 맞는 말이지. 하지만 문제는 중국도 어쨌든 핵보유국이란 말이지.
한반도를 두고 핵 보유국 3개국이 무력 충돌을 빚는 것은 싫고 좋고의 문제가 아니라 지구라는 행성의 존속 문제가 걸리는 이야기이니 그런 것이지."
그리고 그런 푸틴의 말에 클린턴 역시 동조하고 나섰다.
"... 미국도 이 점에 대해서만큼은 유화노선으로 가는 것을 원칙으로 보고있어요. 이유야... 여기 러시아 대통령이 말한 것과 같지요.
하나 더 하자면... 중국이 UN상임이사국이라는 점이랄까? 사실 그 점은 우리 모두의 실책입니다만...
과거의 실책을 두고 싸우기엔 지금 시간이 없는 만큼 태준이 결단을 내려줬으면 좋겠군요."
그렇게 한국, 미국, 러시아 3개국의 지도자들이 압박을 가하자 나는 마지못해 들어주는 척하며,
"확실히 사전에 민간인 자격으로 기름칠을 좀 해두면 세 분 모두 여러모로 편하신 만큼.. 나서는 것이 좋겠지만...."
아니, 정확히는 들어줄 것 처럼 굴며 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문제는 제 목숨입니다."
그 말에 세 사람 모두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이며 말을 이었다.
"태준의 목숨이라니... 누가 감히 지금 시점에서 태준을 위협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중국이 그렇게 막 나가진 않을 걸세. 일단은 그래도 이번 사안을 제외하면 여지껏 개혁개방노선으로 잘 지내왔지 않나."
"맞는 말이네. 거기다 우리... 흠. 아닐세."
그렇게 클린턴, 김태충, 푸틴이 순서대로 이야기를 꺼냈다.
그들의 말을 통해 나는 각국이 나를 어떤 입장으로 보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미국의 입장에서 나는 '건드리기 힘든 존재'로,
한국의 입장에서 나는 '건드릴 이유가 없는 존재',
그리고 러시아의 입장에서 나는 '보호할 존재'로 여겨진다는 것.
그 말을 통해 지금의 내 위치를 체감하게 된 나는 속으로 '뭔가 각 국의 입장이 어긋나 있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을 했지만,
지금의 논의에서 내가 보여야할 입장은 정해져 있었기에 나는 약한체를 하며 말을 이었다.
"물리적인 목숨이 아니더라도 공격할 여지는 많지요. 일례로 중국에도 진출하라는 압박을 받는다던가... 하는 식으로 말이죠."
그 말에 클린턴과 푸틴은 난감한 표정을 지어보였고, 그 와중에 김태충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말을 이었다.
"그게 나쁜 상황인가? 어차피 지금 껏 공격적으로 시장확대에 주력해온 유니버스 아닌가?"
그 답답한 소리에 나는 순간 욱하고 올라오는 분노를 순식간에 삭이고는 말을 이었다.
"중국이라는 시장을 믿을 수 없으니 문제지요. 아시다시피 제가 가진 그룹은 사실상 테크기업입니다.
특허로 먹고사는 기업이고, 그런 만큼 사내 보안과 시장 안정성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중국은 외국기업은 무조건 합자기업으로만 설립을 해야 하는 문제가 있는데다, 그 합자기업의 지분은 사실상 공산당의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거기다 지금도 꾸준히 스파이를 보내 어떻게든 기술을 빼내려고 혈안이 되어있는 상황에서
중국에 협상차 들어간다는 것은 곧 중국에 인질을 잡힌다는 것과 다를바 없는 일이 되고 맙니다."
그 말에 김태충이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심각한 표정이 되자 나는 말을 이었다.
"그럼에도 대의를 위해 나서야 한다면 기꺼이 나설 의향은 있습니다... 만, 위험부담이 큰 만큼 그냥은 나서기 힘들 것 같습니다."
그 말에 러시아와 미국이 반가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우리도 그냥 나서라곤 안 하겠네. 이에 대한 보수는 따로 챙겨줄 생각이었어."
"물론입니다. 태준. 자본주의에 공짜는 없으니까요."
그리고 그런 푸틴과 클린턴의 말에 김태충이 인상을 쓰며 말을 이었다.
"자네... 우리나라에서는 그래도 꽤 많은 혜택을 받지 않았나. 이번 건은 당연히..."
김태충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북한 사태처럼 그냥 못해드립니다. 상황도, 위험도도 전혀 다르지 않습니까. 제게도 어느 정도 보험과 안전장치가 필요합니다."
"보험이라면 이해했는데... 안전장치랄게 뭐가 필요한지 궁금하군."
그 말에 나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방산업체 허가를 내주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