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급변사태 (3)
태준의 전략은 일본 선거제도의 허점을 노린 것이었다.
"우선... 무소속으로 출마를 합니다. 그런 다음 자민당의 후보... 아마도 다케시타 와타루가 되겠지요.
다케시타 와타루와 같은 동명이인의 사람, 다케시타와 성씨가 같은 사람, 와타루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을 찾아 최대한 많이 후보자로 등록합니다.
이때, 후보자 등록에 필요한 정당을 만들때 자민(自民)이라는 약칭을 갖는 다수의 허위 정당도 함께 만듭니다. 예를 들면 자유민정당 이라던가, 자율민주당 등등으로요.
그리고 이걸 후보자 등록 마지막 날에 실시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태준의 설명은 이러했다.
일본은 민주주의 국가 중 유일하게 자서식 투표를 시행하는 국가이다.
자서식 투표라 함은 투표자가 후보자의 이름을 직접 적어내는 방식의 투표 시스템으로, 일본의 정치 세습의 핵심 키워드였다.
'요구하는 것이 많은 만큼 투표 참가 자체를 막고, 설사 참가한다 해도 결국 쓸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잘 아는 후보로 제한되니까.'
태준이 생각한 것 처럼.
자서식 투표에는 세 가지 함정이 있었다.
첫번째 함정, 투표를 하기 위해서는 글자를 알아야 한다는 것.
한자와 히라가나, 가타카나의 3중 문자체계를 가진 일본에서 후보자의 이름을 틀리지 않고 적을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일본의 선관위는 이 첫번째 함정이자, 첫번째 규칙에 황당하게도 한 획도 틀리지 말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두번째 함정, 일본은 한자를 훈독과 음독으로 읽는다는 점.
이것이 이름에 쓰였을 때는, 자신이 투표하고 싶은 사람이 가진 이름의 실제 발음과 표기에 오차가 생길 수도 있게 되며, 그 말인 즉, 무효표로 간주되어 버려질 확률이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세번째 함정, 안분표가 존재한다는 점.
이 안분표는 일본 특유의 선거 방식으로 투표자가 특정 후보에게 투표한 것이 확실하지만, 누군가에게 투표했는지 모를 경우에 적용되는 규칙으로
안분표로 분류되면 일단 빼두었다가, 최종적으로 안분표를 제외한 모든 집계결과가 나왔을때, 해당 득표율에 비례해서 표를 나눠주는 방식이었다.
이 세가지 함정은 기성정당에 유리하게 돌아가게 만들어져 있었지만....
태준이 이 세 함정을 역이용해 짠 전략에 대입하면 다음과 같은 결과를 예상해 볼 수 있었다.
다케시타 와타루
다케시타 A
다케시타 B
A 와타루
B 와타루
타케미치 노시히코
이런 식으로 후보자 명단이 있다고 가정할때.
다케시타 와타루에게 찍는 사람들 중 조금이라도 잘못 기입한 사람들은 전부 안분표로 분류되는 것에 더해...
안분표를 우려해 자민당이라고 적는 사람이 있더라도 이 역시 안분표로 분류되어 버리는 희대의 막장 사태가 발생하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1:1로 붙는 것 보다는 나은 상황을 만들 수 있겠지요."
태준이 말한 것 처럼 조금이라도 표가 분산될 것이었기에 타케미치의 당선확률이 올라갈 것이라 기대할 수 있었다.
"거기다... 다른 야당도 출마를 할테니 표가 더 분산될 것까지 고려해보면... 생각한 것만큼 힘들지는 않을겁니다."
"하지만... 안분표 제도는 득표율에 따라 나눠 배분합니다. 만약 온전하게 밝혀진 투표에서 와타루가 압도한다면... 안분표 대부분이 와타루에게 가는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예. 그래서 준비한게 다음 전략입니다."
타케미치의 지적에 태준은 다음장을 보라고 한 뒤 말을 이었다.
"단순히 제도적 헛점만을 사용해 이길 수 있다면 이미 그런 전략을 다들 들고 나왔겠죠."
"실제로 종종 나오기는 합니다만... 이정도 규모로 나오진 않았습니다."
"예. 결국 진짜 중요한 것은 어떤 식으로든 표를 압도하는 것입니다. 안분표로 와타루가 표를 잃지 않게 되더라도 이길 수 있을 정도로 표를 얻어내야만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겁니다."
"그러면 앞선 전략은..."
"일종의 보험이죠. 만약의 사태를 대비한. 진짜 전략은 따로 있습니다."
그렇게 다음장을 넘겨 본 타케미치는 놀란 눈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자민당 재입당을 걸고 선거를 뛰어라...?!"
"예."
"그리고 말하세요. 다른 안분표 후보자들은 다 와타루가 고용한 사람이라고. 다른 후보자를 묻어버리기 위해 그런 술책을 부린 것이라고."
그 말에 타케미치는 의아한 반응을 보이며 말을 이었다.
"실제로 손해를 보는 것은 와타루지 않습니까?"
"그게 관점을 바꿔 생각하면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다케시타 와타루. 이 이름 석자를 각인시키기 위한 일종의 광고판으로서 가짜 세력을 만든 것이라고 본다면 어떻겠습니까?"
"... 예?"
타케미치가 잠시 이해하지 못하는 반응을 보이며 되묻자, 손의정이 박수를 치며 말을 이었다.
"선거에서는 이름만 쓰니까.. 결국 이름이 많이 알려지게 하기 위한 술책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군요."
"예. 그리고 이걸 일종의 부정행위로 몰면서 당선이 되면 '자민당 내의 개혁을 일으키겠다. 그 중 하나로 자서식 투표제가 아닌 기호식 투표제를 도입하겠다.' 라고만 해도 꽤 반향을 일으킬 수 있을겁니다."
"다른 야당은 어떻게 상대하면 되겠습니까?"
"공산당쪽 말입니까?"
"예."
"그 쪽은 신경쓸 것 없습니다. 자민당계 무소속 인사인 우리쪽이 자신들과 같은 의견을 내준다면 좋다고 들러붙으려 들텐데...
무조건 이들하고는 거리를 둬야 합니다. 연대를 한다고 한다면, 일본 정치 특성상 차라리 국민민주당이나 민진당 계열의 범보수계열을 생각해 볼 여지가 있겠지만...
시마네에서는 그것도 악수니까요."
"정리하면... 와타루가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 그리고 경쟁 후보의 인지도를 압살하기 위해 일부러 사람을 고용해 가짜 후보를 등록했다...
그리고 이는 위기의식의 발로이다. 이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군요."
"예. 실제로 손해보는 것이 누구든... 그렇게 이미 이미지가 박혀버리면 그걸 반박하기 위한 노력은 그 이상이어야 하니 쉽게 빠져나오지 못할겁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정책적으로 시마네현을 발전시킬 산업 유치를 핵심 공약으로 내세우는...
예를 들면 시마네현에 유니버스 재팬의 데이터센터를 유치한다던가 하는 식의 정공법을 내세우면 분명 이길 수 있을 겁니다."
...
..
.
그렇게 태준의 제안에 한 번 생각해보겠다고 말한 타케미치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 일전 다케시타 노보루의 딸, 가즈코에게 받은 편지를 다시 한 번 열어보았다.
편지에 적힌 내용.
그것은 자신의 동생인 와타루와 딸들을 잘 돌봐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빤히 보던 타케미치는 마침내 결단을 내리고는 조용히 주방으로 가 그릇에 물을 받아와서는 그 그릇 위에서 편지에 불을 붙였다.
"선생께는 죄송하지만...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시절부터 모셔온 주군의 명이 우선이니까요.
게다가...
선생께서는 결국 제게 현의회 후보자리도 주시지 않지 않으셨습니까. 서로 이쯤에서 거래관계를 끝내죠."
그렇게 불타는 편지를 보며 타케미치는 다케시타 노보루와의 마지막 대화를 나누고는 태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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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케미치의 전화를 받은 태준은 곧바로 손의정의 인맥과 타케미치의 자민당 인맥, 그리고 남아있던 금융권 인맥들을 타고 올라가 일본의 총리대신인 오부치 게이조를 만났다.
"미야자와 전 총리에게 말만 들었는데.. 상당히 미남이시군요. 김회장님."
"그렇습니까? 저도 TV에서나 보던 '헤이세이 오지상'을 뵈니 참 묘한 기분입니다."
소위 인품의 오부치라는 말이 무색하게,
일본에 있을 시절 허영중을 통해 돈세탁을 해준 것을 미야자와 기이치의 이름을 들먹이는 것으로 억지로 끄집어내며 우위를 점하려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 양반이 해줄 일이 꽤 있으니... 마음에 들지 않아도 별 수 없나.'
실리의 측면에서,
그리고 한국에 직접적으로 사과한 과거에도 현재에도 없을 몇 안되는 일본 총리라는 점에서
나는 부드럽게 오부치의 말을 받아 넘기고는 말을 이었다.
"이렇게 뵙자고 한 것은... 이제 유일한 헤이세이 연구회의 수장이 되셨으니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고자 왔습니다."
"외국인과 국내 정치를 논의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내 말에 오부치가 원론적인 대응을 하며 말하자 나는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외국인이라 생각하지 마시죠. 저는 KTJC-J의 주인으로 온 것이니. KTJC-J는 엄연히 일본 법인이기도 하고요."
"말장난이라면 재미 없군요."
"재미있자고 드린 말씀은 아니었습니다."
"시답잖은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오부치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최근 총리로서도 대학동문으로서도 선배인 다케시타 전 총리가 사망하면서 시마네현 2구의 중의원이 공석이 되지 않았습니까?"
"... 공석이라고는 하나 엄연히 주인이 있는 자리입니다."
그 말에 나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예. 주인이 있지요. 외국인이라고 해도 일본의 정치 문화가 어떤지 정도는 잘 알고 있습니다."
"헌데... 주인이 있는 땅을 왜 갑자기 거론 하십니까?"
"그 주인을 바꿔보는 것이 어떨까... 해서요."
그 말에 오부치가 눈을 부릅 뜨며 말을 이었다.
"이 이상 논하면..."
"예. 돌이킬 수 없게 되겠지요. 하지만 총리께도 꽤 득이 되는 제안일테니 그저 라디오를 듣는다 생각하고 들어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내가 오부치의 말을 끊어내며 말을 하자 오부치가 침음성을 흘리고는 손짓으로 계속해보라는 신호를 주었다.
'아마도 직접 논하지는 않겠다는 의지 표명이겠지....만, 이 말을 듣고도 그렇게 침묵하고 있을 수 있을까?'
나는 그런 그의 손짓에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보아하니... 시마네도 그렇고, 총리께서 쥐고 계씬 그 군마도 그렇고... 상당히 낙후가 되었더군요.
시마네는 세간의 입방아에도 오르지 못할 정도로 낙후된 촌동네나 다름 없고,
군마는 그래도 입방아에는 오르내리는 동네지만.... 그 입방아의 내용이 결국 미개의 땅이니 어쩌니 하는 저 개발지 취급이지 않습니까?"
내 도발적인 말에도 오부치는 그저 입을 꾹 다문채 나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나는 그런 오부치의 인내심에 경의를 표하며 마저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밑밥이었다.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곧 있을 선거에서 시마네 2구의 당선자로서 제가 미는 후보를 지원해주시면.
이후 총리님의 지역구를 총리님의 따님이 잘 이어받을 수 있도록 지원해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뿌려진 밑밥 사이로 나는 슬그머니...
"물론 해당 지역의 경제 발전은 덤이고요. 아, 참고로 경제발전은 시마네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미는 후보가 당선이 된다면, 시마네에도 투자할 생각이 있거든요. 실제로 이미 맛보기로 유니버스 공장을 시마네에 지어두기도 했고요."
미끼를 끼운 찌를 건너편에 앉아있는 오부치의 마음에 던졌다.
그렇게 내가 던진 찌가 오부치의 마음에 닿자
마치 잔잔했던 호수에 찌가 던져진 것처럼
무표정했던 오부치의 얼굴에 균열이 가더니 이내...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말을 이었다.
"... 확실히. 시마네도 그렇고. 군마도 그렇고 개발이 덜 된 곳이기는 하지. 해서 뭘 어떻게 도와주면 됩니까? 아니 애초에 김회장님이 지지하는 후보는 누굽니까?"
'제대로 낚였네.'
그렇게 찌에 물린 미끼를 찌채로 삼킨 오부치를 본 나는 있는 힘껏 낚시대를 당기며 희미하게 웃음짓고는 말을 이었다.
"타케미치 노시히코. 다케시타 노보루 전 총리의 제 1 비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