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4자회담 (1)
청와대에서 정한 길일은 1999년 12월 30일부터 2000년 1월 2일까지 연말과 연초를 낀 날이었다.
전달받은 날짜를 본 나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작정하고 이슈몰이하려고 제대로 날을 잡았내."
연말연초.
사람들이 축제분위기인 것은 한국이나 북한이나 다를 바 없는 것이었고,
이런 과정을 일종의 축제처럼 즐겨보자는 마음이 택일에서 드러나고 있었다.
"이러다 실패하면 어쩌시려고... 거 참."
그러나 내가 혼잣말을 내뱉은 것 처럼.
혹시나 있을지 모를 실패의 위험이 연말 연초에는 더 커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대대적인 축제 분위기 속 찬물을 끼얹으면 좋아할 사람은 없을 것이거니와,
북한의 그 변덕스럽기 그지 없는 집단 운영방식을 생각하면 걱정이 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었다.
"뭐... 그래도 북한은 당장 돈이 아쉬울테니..."
그렇게 받은 일정표를 접어 품안에 넣던 그 때...
"회장님. 러시아 지사에서 직통전화가 왔는데..."
"러시아에서요?"
"예. 헌데... 러시아 총리가 지사로 찾아왔답니다. 회장님과 직접 통화하고 싶다고..."
"연결하세요."
푸틴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잘 지냈나?"
"하하. 잘 지내셨습니까?"
"나야 잘 지냈지. 자네 덕에 일도 잘 풀렸고 말이야."
"지난달 부로 총리지명 되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이거 놀래켜 주려고 했는데, 벌써 다 알고 있었구만. 맞네. 올리가르히들이 드디어 말을 바꿔탄 덕분이지."
"겸손도 과하십니다. 말을 바꾼게 아니라 머리를 바꾼 것 아니겠습니까."
"하하. 자네는 역시 듣기 좋은 말을 잘 하는군."
푸틴의 총리 내정 소식으로 인사를 겸한 가벼운 이야기를 나눈 나와 푸틴은 본격적으로 본론에 들어갔다.
"그래. 남북정상회담 소식은 들었네. 우리한테 항모 사가고 나서 꽤 곤란했을텐데 잘도 그 유라(김일천의 러시아 이름)를 잘도 구슬렀더군."
"서로 이해관계가 맞았을 뿐이지요."
"내 듣기로 일정이 정해졌다하던데... 그 자리에 낄 틈이 있겠나?"
'나도 방금 들은 일정을 무슨 수로 알아낸거지...?'
그 말에 나는 오소소 돋는 소름을 애써 감추며 말을 이었다.
"낀다고 하시면... 남북정상회담이 아니라 4자회담으로 가고 싶으시단 말씀이십니까?"
"3자회담을 하자고 한다면... 자네부터 반대하고 나설테니 4자 회담으로 가야겠지.
아 물론 장소는 대한민국에서 정하는 대로 하고."
"그 부분은 제 소관이 아닌지라..."
내 완곡한 거절의 말에 푸틴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소관이 아니다? 거 참. 자네 날더러 겸손이 과하다고 핀잔을 주더니만 자네야 말로 겸손이 과하군.
자네가 서있는 한국부터 일본은 물론이고 이제 미국하고 여기 러시아에까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 뻔히 아는데 자네 소관이 아니라니....
이거 참. 내가 이걸 거절이라고 봐야할지 아니면 자네의 겸손으로 봐야할지 모르겠군.
물론 어느 쪽이든 나로서는 섭섭한 건 매한가지지만."
"저야 일개 장사치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다만 요청하신 사항에 대해서는 청와대에 제안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나도 그럼 그 전까지 대통령 자리에 올라있겠네. 김회장 자네. 그리고 나 푸틴이 뭉치면 못할게 없지 않겠나.
뭐... 그래도 걱정하지 말게 자네의 또 다른 친구 클린턴도 내 제안을 싫다고 하진 않을테니.
세계 모든 일에 끼기 좋아하는 나라 아닌가.
하물며 한반도 문제인 만큼 어떻게든 끼고 싶어 하겠지.
정치적인 업적으로도 딱 좋을테고.
자네로서도 꽤 즐거운 시간이 될 것이라 장담하지."
그렇게 푸틴의 안심시키는 말을 들은 나는 그저 허허 웃으며 전화를 마치고는 후 하고 한숨을 내뱉었다.
"거 참. 귀찮은 건 딱 질색인데... 안 움직일 수도 없겠네. 푸틴이 주려는게 너무 뻔히 보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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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앤은 태준이 일전에 말했던 연예인들을 추려 불러모아놓고 말을 이었다.
급거 바빠진 태준의 대리로서 나온 자리였기에 의도적으로 평소보다 더 격식을 갖춰입고 나타난 앤은
미리 준비된 단상위에 올라가 연예인들을 하나하나 보며 말을 이었다.
"이번 방북에 가기로 한 연예계 인사 중 조영필 선생님, 나운하 선생님 이 두분을 제외하고는 전부 우리쪽 멤버들이 가는 만큼 발언에 주의해주시기 바랍니다.
특히, 이번 특별 생방 MC를 맡은 디 타이틀 멤버들은 어휘 하나하나에도 주의해주세요."
""예.""
이제는 능숙해진 한국어로 출연 연예인들을 한명 한명 돌아보며 당부사항을 말한 앤은 이윽고 모든 참가자들에게 이번 건에 대한 태준의 보상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이번 건 잘 끝내면 회장님께서 특별 보너스를 약속하셨으니까... 다들 잘 해줄 거라 믿겠습니다."
"보상... 이라면...?"
"무리한 부탁만 아니라면 다 들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각자 원하는게 다를테니까요. 일 마치고 개별 면담하시면서 요청을 들어보겠다고 하셨으니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그 말에 UEP의 최고참이자 D플래닛 최선임격인 이선재가 턱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흠... 주식도 달라면 주시려나..."
"회장님 판단에 무리가 없다고 판단된다면 주식을 받는 것도 가능할 겁니다.
물론 그만한 실적을 올리셔야겠지만요. "
앤의 대답에 이선재가 씩 웃고는 말을 이었다.
"그럼 혹시 우리 우주극회 이름으로는 받을 수 있소?"
"우리사주제를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일단 우리 UEP는 우리사주제를 하고 있지 않고...
설사 한다고 해도 저희 UEP와 아티스트 분들의 기본 계약조건은 고용계약이 아니라
사업자간 용역계약 성격이라 우리사주제 요건에 아티스트 분들이 들어가지 않습니다만...
스톡옵션 개념으로 주식을 일정 가격에 매입하시는 것은 가능할 수도 있겠지요.
물론 스톡옵션을 주겠다고 회장님이 결정을 하셔야겠지만요."
그 말에 이선재는 그 정도면 답변이 되었다는 듯 만족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답변 고맙소."
그렇게 이선재 외에도 여러 질답을 주고 받은 앤은 회의를 파하고 사무실로 돌아와서는 한숨을 쉬었다.
"진이 다 빠지네."
"고생하셨습니다. 선 넘는 질문도 꽤 나왔던데... 크게 무리 없이 답변해주셨습니다."
"선 넘는 질문? 아... 그 주식 이야기 말인가요?"
"예. 예전같으면... 아니 솔직히 지금도 연예인들 정도는 나라에서 작정하면 알아서 동원할 수 있는데...
회장님께서 온 몸으로 막아주고 있는 것도 모르고 회장님 주식까지 탐내는 건...
거기다 우린 정산도 아주 잘 해주는 편인데... 거 참."
비서의 말에 앤이 피식 웃고는 말했다.
"뭐 남들이 다 악랄하게 한다고 우리까지 악랄해질 필요가 있나요. 요구 정도는 아티스트들도 할 수 있기도 하고요.
잘해주는 것과 요구는 별개니까요. 물론 그걸 몰라주니 섭섭하긴 하지만. 어쩌겠어요.
애초에 태준이 UEP로 돈 버실 생각도 없기도 하고... 잘 해주는 것 티도 안 내는 사람인데.
물론 아무 뜻 없이 그렇게 할 리는 없으니 우린 믿어야죠."
"우리 운영이야 회장님을 믿지요. 다만, 아티스트들이 그 뜻을 몰라주니 답답해서 그렇죠."
"원래 그런 거죠. 사람이란게. 은혜를 베풀어도 생색내지 않으면 몰라주거든요.
뭐 가장 중요한 결정을 전부 태준에게 미뤘으니 다음에 말이 나오면 태준이 정리해주겠지요."
그렇게 비서와 이야기를 나눈 앤은 비서가 따라준 물을 한입에 털어 넣고는 다음 일정인 스태프 간담회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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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을 들은 김태충은 인상을 강하게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이번 남북정상회담에 러시아가 끼고 싶어 한다고?
항모 넘겨줬다고 갑질이라도 하고 싶어하던가?
꽁으로 준 것도 아니면서 너무하는군."
불만 섞인.
아니, 대놓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김태충의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다.
'기껏 자기가 밥상 다 차려놨는데 주위 강대국에서 떠먹으려 드는 모양새로 보이겠지.'
물론 이 모든 것을 하나부터 열까지 직접 움직이며 처리한 내 입장에서는 그런 김태충의 태도가 퍽 달갑지는 않았으나...
어찌되었든 하청으로 움직인 입장이라고 생각해보면 또 아주 이해 못할 것은 아니었기에,
나는 조심스럽게 최대한 김태충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설득할 말을 꺼냈다.
"차라리 잘 된 일일 수도 있습니다.
통일을 꿈꾸신다면 관련국들을 끌어들여 이해관계를 정리하고 가는 편이 좋으니까요."
"우리가 통일하는데 다른 놈들이 끼어드는게 말이 되나? 거기다 러시아는 공식 참전국도 아니지 않나."
"그건 감정론에 지나지 않습니다."
"감정론을 배제한다고 해도 왜 하필 러시아인가? 회담을 한다고 치면 중국이 더 말이 되지 않나? 4자회담 당사국이기도 한데..."
"중국은 안 됩니다. 무조건 반대하고 나설 인간들을 뭐하러 이 자리에 불러들입니까?"
"내 말도 그 말일세. 러시아라고 통일에 찬성하겠나? 통일하면 미군부대가 자기 뒤꽁무니에 바로 닿을텐데."
"그야 그렇겠지요. 하지만 통일전 비핵화에는 한 손 거들어줄 가능성이 높지요.
거기다... 러시아 입장에서 통일까진 바라지 않는다 해도 우리와의 경협까지 바라지 않는 것은 아닌 이상 꽤 흥미로운 제안을 들고 올 수도 있습니다."
내 설득에 김태충이 눈을 가늘게 뜨더니 말을 이었다.
"자네. 뭘 듣긴 들었군?"
"들은 것은 아니고 추측이나 한 번 해본 것입니다."
"그 추측이 뭔가?"
김태충이 보채듯 되묻자 나는 슬쩍 웃으며 말했다.
정확히는 미래에 러시아가 추진하고 싶어 안달이던 그 정책을 떠올리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기에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천연가스관 연결. 아마 러시아가 노리는 건 그것이겠지요."
"천연가스..."
"예. 언제까지고 빚 상환한다고 우리한테 군사기술이 가득 든 무기들을 넘기진 않을테니까요.
차라리 원자재로 갚고 싶겠지요. 거기다 천연가스 의존도를 높일 수록 친러시아로 기울 수도 있다는 정치적 계산도 깔려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러시아는 북한의 땅이 필요하고요."
"즉 여기에 끼워주면 러시아를 우리편으로 둘 수 있다?"
"단기적으로는요. 장기적으로는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지요.
북한이 중국 대신 러시아에 의존하게 된다면 러시아 눈치를 안 보려야 안 볼 수 없을겁니다.
거기다 러시아가 낀다는데 미국이 안 낄리가 없으니 전 세계적 이벤트가 되겠지요."
내 말에 김태충은 납득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 말을 이었다.
"헌데 일본이나 중국이 끼어든다면 또 이야기가 달라지네."
"끼어들 틈 없이 기습적으로 움직이면 됩니다. 직전까지 숨기고 있다가 행사를 진행해버리면 중국도 자존심상 우리한테 끼워달라 말하진 못할 겁니다."
"북도 가만히 있지 않을텐데..."
"북에는 제가 조만간 다시 들어가서 이야기 해보는 것으로 하죠."
내 설득에도 풀리지 않는 김태충의 표정에 나는 슬쩍 김태충을 보고는 말을 이었다.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아보이십니다."
"몰라서 묻나?"
그 말에 나는 슬쩍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러시아가 끼고 싶다고 했지. 어떤 행사에 끼고 싶다고는 말하지 않았지 않습니까."
"....음?"
그 말에 김태충이 놀란 표정을 지어보이며 내게 되묻듯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 김태충의 시선에 나는 미소를 띈채 말을 이었다.
"남북정상회담은 정상회담대로 평양에서 진행하고, 러시아는 1996년 진행했던 4자 회담에서 중국을 대체해 넣어 판을 짜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 참에 방해나 하는 중국은 한반도 논의에서 빼버리고 대한민국 주도로 판을 짜보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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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러시아의 실권을 거의 장악한 푸틴 역시 남 모르게 클린턴과 전화 회담을 갖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번 남북정상회담에 당신네들이 끼어들꺼다... 이 말이오?"
"정확히는 끼어드는 게 아니라 함께 참가하는 것이지요. 애초에 미국도 뒤에서 지켜만 보고 있을 것은 아니었지 않소."
"북한의 보호자는 중국 하나만 남았는 줄 알았는데...."
클린턴의 말에 푸틴은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건 맞소. 북한이 핵을 개발하기 시작한 이상 우리도 북한을 도와줄 생각은 없으니...
물론... 방해를 할 생각도 없지만. 애초에 살려만 두는... 뭐 그런 역할로 쓸 생각이었는데 말이오.... 이젠 이야기가 달라졌지 않소?"
그 말에 클린턴이 미간을 들어올렸다 내리고는 말을 이었다.
"태준... 말하는거요?"
"그렇소. 우리의 친구. 태준. 그 친구가 있고 없고에 따라 한국의 가치 역시 달라지니 말이오.
그건 클린턴 당신도 마찬가지 아니오?"
그 말에 클린턴이 피식 웃고는 말을 이었다.
"태준이 있는 한국과 없는 한국은 그 가치 차이가 크긴 하지."
클린턴의 동의에 푸틴 역시 웃음으로 화답하며 말을 이었다.
"거기다 중국이 슬슬 커가는 것도 기분이 나쁘고 말이지. 기왕 이렇게 된 것, 이 참에 가볍게라도 손을 잡는 것은 어떻겠소."
그렇게 이해관계를 공유한 각 국의 지도자들이 서로의 이익과 명예, 업적을 위해 움직이며 한반도는 물론 세계 전체가 원 역사에서 크게 멀어져 가기 시작했고,
그 중심에 태준이 있었다.
"남북정상회담 기간에 한미러북 4자 회담을 진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