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돈 쓸어담는 재벌가 서자-116화 (116/200)

116. 남북정상회담 (6)

그렇게 정영주와 이야기를 마치고 나온 태준은 정영주의 속 깊은 배려와 그와 나눈 거래를 떠올리며 씩 웃어보이고는 차에 오르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과연... 맨 손으로 기어 올라온 거인은 달라도 다르네. 보는 시야의 높이부터. 내놓는 말의 무게까지. 전부.

거기다... 북한에 내가 얻어낼 수 있는 것까지 아주 신선했고 말이야... 두 번 사는 인생인데 이렇게 밀려보긴 처음이네."

그렇게 정영주와의 대화를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태준의 기대 속에 드디어 남북정상회담의 효시가 될 '소몰이 방북'이 시작되었다.

"지금 막 새끼를 밴 1000마리 암소가 판문점을 넘고 있습니다. 회장님! 한마디 짧은 소회라도 밝혀주시죠!"

“지난 날 빚진 소 한마리가 1000마리 소가 되어 고향땅으로 가니 그 감회를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이번 방문이 남북 간의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초석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번 방북에 자녀분들이 아닌 유니버스의 김태준 회장과 동행하시는 것에는 다른 이유가 있습니까?"

"김회장과는 사적으로 친분이 있는 사이이기도 하고, 또 김회장이 이번 일에 큰 도움을 주며 제 수행역을 자처했기에 함께 가게 되었습니다.

자식놈들은 다음 2차 소몰이 방북때 다시 올라오기로 했으니 아쉬울 것도 없습니다."

온갖 거짓으로 점철 되어 있는 발언이었지만,

한국 재계의 큰어른이자 대현의 왕회장인 정영주의 말을 의심하거나 반박할 간 큰 기자는 없었다.

'아니 의심은 하겠지만... 차마 물어볼 수 없겠지. 저 얼굴을 보면.'

태준이 생각한대로, 정영주 회장의 얼굴은 환희와 비통이라는 애매하고 상반된 감정을 쏟아내며 반쯤 울다시피 하고 있었고, 그게 연기도 아니었으니,

제 아무리 국민의 알권리에 미쳐있는 기자라도 차마 질문을 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거기다...

"이번에는 꽤 수수한 복장을 입고 나오셨는데, 혹시 다른 의도가 있는 것입니까?"

"김태준 회장님! 이번 방북에 수행역을 하겠다 하신 이유에 대해 들을 수 있습니까?"

"김태준 회장님!"

그런 정영주 회장 대신 이번 방북에 대한 오피셜을 내야하는 태준의 곁에는

태준이 가진 특유의 셀럽기질(잘 생긴 외모와 키, 그리고 재벌회장 답지 않은 패션감각)이라는 단내나는 꿀에 몰려든 연예부 기자들이 진을 치며 흥미위주의 질답만 이어가고 있었으니,

이 자리에 있는 기자들은 물론이고, 이 광경을 실시간으로 중계받고 있을 국민들까지 그저 정영주 회장이 밝힌 '이번 방문이 남북 간의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초석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는 말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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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쏟아지는 기사들을 노트북으로 보던 나는 노트북을 탁 하고 덮고는 말을 이었다.

"기자들이 질문하는 것 듣고 생각은 했지만... 미리 뿌려놓은 보도자료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군요."

"그야 그렇겠지. 기자들이 평론가도 아니고, 기자들의 취재에 나나 자네가 바로 답을 해준 것은 없으니까.

추측을 기사로 삼으면 그게 어디 기자인가 소설가지. 소설가는 재미라도 주지 기자가 소설 쓰기 시작하면 분란만 일으키는 말종취급이나 당할텐데...

그런 말종이 되고 싶은 사람이 있겠나?"

함께 차를 타고 이동하는 정영주 회장의 말에 나는 피식 웃으며 전생을 떠올렸다.

'하긴... 내가 너무 미래를 기준으로 생각했지... 이 때만 해도 의도적인 가짜뉴스는 없던 시절이니까. 오보는 있었어도....'

그렇게 내가 미소를 짓자 정영주 회장이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그 노트북은 따로 선을 연결하지 않아도 인터넷인지 뭔지에 연결이 되는건가?"

"예. 자체 통신모듈을 내장하고 있어서요."

"그런 물건을 판매중인가...."

"아직 판매는 안하고 있습니다. 이건 시제품으로 제가 테스트 겸해서 쓰고 있는 거죠. 아직 개선할 점이 많아서요. 배터리 문제도 남아있고요.

팔 수 있을 정도의 물건은 아닙니다."

"그 말인 즉, 배터리 문제만 해결이 되면 팔 수 있단 이야기 아닌가. 거 참. 세상이 워낙에 휙휙 변하니 버틸 수가 있어야지.

그나마 이 질긴 명줄이 얼마 안남아 다행이라고 생각할 정도야."

"농담도 참 거칠게 하십니다."

그렇게 정영주의 말에 대꾸한 나는 말을 이었다.

"일단... 안변군에 가셔서 고향땅 밟고 바로 평양으로 들어가게 되실텐데... 체력 문제도 있으니 한숨 주무시고 계시죠."

"그럴 수야 있나. 자네도 일어나서 일하고 있는데, 나도 일해야지."

내 말에 답한 정영주는 슬쩍 품에서 대현전자의 핸드폰을 꺼내고는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아. 이회장. 오랜만이오. 이북에 도착한 김에 전화 한통 넣었소. 하하.. 좋지요. 얼마만의 고향땅인데요."

그렇게 연신 전화를 하는 정영주의 목소리를 배경음 삼아 나는 덮어둔 노트북을 열어 인터넷을 켜고 메일을 보냈다.

수신 : 앤 오브라이언 사장

제목 : 남북합동공연 기획에 대한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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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태준이 정영주 회장과 함께 북한에 도착한 그 시각.

북한의 심장부 평양에서는 김천성의 아들이자 현 북한의 최고지도자 김일천은 중국의 장쩌민이 보낸 외교관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본부청사에서 비밀리에 만나고 있었다.

"우리쪽 첩보에 의하면 지금 올라오는 김태준이라는 작자가 황해에 우르스(俄罗斯; 아라사, 러시아의 중국식 음차표기)제 항모를 가져다놓은 장본인이라 하오.

이번에 그 자가 올라오는 것은 아마도 남한 정부에서 당신네들한테 양해를 구하기 위함일텐데... 뭐 들은 것은 없소?"

외교관의 태도는 퍽 고압적이었지만, 김일천은 인상 한 번 찌푸리지 않고 능숙한 중국어로 말을 이었다.

"들은 게 있을리가 있겠소? 당신네들도 이제서야 들은 첩보인데... 알았다면 아예 입경조차 막았을게요."

"그랬겠지... 아무튼 아국(我國)에서는 이번 방북에서 남측의 실무자이자 기업인인 김태준이라는 자에게 북한이 제대로 경고를 해주기를 바라고 있소.

조선도 이번 백령도 독도함 배치에 대해서는 불만이 크지 않소?"

"그야 그렇지만. 공식적인 항의도 이미 한 마당에 따로 불러다가 혼내는 모양새가 되면 우리도 얻을게 없지 않소."

"조선이야 애초에 대국인 우리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고 있는 판국인데 남측에 뭘 또 얻어내려고 하는거요.

남측에 얻어낸다 한들 우리가 제공하는 석유나 다른 물품들에 비해 하잘 것 없는 것을."

그 말에 김일천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가 말을 이었다.

"그것은 우리 내정이니 중국이 관여할 일이 아니지 않소."

"공산주의에는 국경도 민족도 없다. 있는 것은 오로지 프롤레타리아와 그 지도부 뿐.

요새 주체사상이니 뭐니 하며 하등 쓸데 없는 일을 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김일천 당신 뇌까지도 그 말도 안되는 사상에 절어버린 거요?"

그 말에 김일천이 슬쩍 옆에 둔 '1호 담배'를 꺼내 물고는 불을 붙이며 말을 이었다.

"그것은 공산주의가 잘 나갈때나 이야기지. 당신들도 공산주의를 배신한지 오래 아니오?"

"그것은 국가 전략일 뿐. 언제고 공동부유로 나아갈 생각이오 우리는. 당신네들 처럼 정치를 종교화하는 미친 만행을 저지른 적은 없소.

덩샤오핑 주석이 말씀하신 흑묘백묘론도 모르는게요? 하기사.

인민들에게 빙두(북한산 히로뽕)를 만들어 뿌리는 것도 모자라, 인민의 아편이라는 종교까지 만들어 뿌려대는 조선에서 선부론이니 경제니 알았다면 고난의 행군도 걷지 않았겠지."

김일천이 담배를 피며 최대한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는 줄 아는지 모르는지, 중국의 외교관은 연신 고자세로 김일천은 물론이고 북한 전체를 욕보이는 말을 서슴치 않으며 계속 말을 이어나갔고.

그런 중국 외교관의 말에 김일천은 이내 크리스탈 재떨이에 반도 피지 않은 담배를 거칠게 뭉개끄며 말을 이었다.

"언제까지고 고압적인 태도로 말할거라면 당장 꺼지는게 좋을거요. 여긴 조선이지 중국이 아니니까.

당신 말마따나 우리는 지금 눈에 뵈는게 없거든. 외교관 모가지 한 둘 쯤은 따도 다들 그러려니 하는 나라가 바로 여기 조선이니 조심하는게 좋을거요.

거기다 계속해서 우리한테 고자세로 나오는데... 당신네들이 우리 조선이 없이 살수나 있겠소?

지금이라도 저 남측 당국자들에게 통일하자고 하고 바로 국경 열어서 신의주에 미군부대가 들여오면 당신네들 표정이 아주 볼만 하겠소?"

"이보시오! 김주석! 지금 나를 협박하는게요?"

"협박으로 들었으면 협박인 것이고, 경고로 들었으면 경고인 것이고, 농으로 들었으면 농이겠지.

되먹잖은 짓거리 할 것이라면 당장 꺼지시오. 내정은 우리가 알아서 할테니. 아, 지원하던 것은 계속 지원 하시고. 뒤통수 쳐맞기 싫으면 말이오.

내 김태준인지 김소준인지 하는 놈한테 경고를 하던 칭찬을 하던 하는 것은 알아서 할테니까.

아시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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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이동중에 일을 하던 것도 잠시.

정영주 회장에게 말했던 대로 배터리 부족으로 꺼져버린 노트북과 북한의 저질 도로 환경에 나도 정영주 회장도 결국 목적지인 안변군에 도착하기 전까지 잠을 청하는 수 밖에는 없었다.

그렇게 아침 이른 시간에 출발했음에도 저녁이 다 되어서야 도착한 강원도 안변군은 지어진지 얼마 안된 듯한 집과 그 집과 집을 잇는 가로등 덕분에 대낮처럼 밝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완전히... 보여주기 식이군요."

"그렇겠지. 누군들 추레한 모습을 보이고 싶겠나. 나도 유엔묘지에 잔디 대신 보리싹으로 싹 심어서 눈속임 해봐서 저 마음을 잘 아네.

내리지. 일단."

그렇게 나와 정영주 회장이 짧은 촌평을 주고받으며 차에서 내리며, 정해진 일정 중 가장 첫번째 일정인 정영주 회장의 고향 방문이 시작되었다.

"아이고...! 영주야!"

"왜 이렇게 말랐소!"

"마르기는 뭐가 말라...! 다 우리 수령님 은덕에 이렇게 편안히 지내는데.. 으허허허..."

고향에 남겨진 친척들과 상봉하는 정영주 회장의 모습을 보며 나는 씁쓸한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그 와중에도 정권찬양이라니... 미쳐도 단단히 미친 나라군.'

그렇게 나는 하루 온종일 정영주 회장의 수행원 역할을 하며 온 마을을 돌아다니고 가져온 소를 넘겨주는 장면을 사진기로 찍으며 일정을 마치고는 곧장 정영주 회장과 함께 미리 준비된 고려항공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평양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고려항공 비행기까지 타게 될 줄은 몰랐는데.. 허허. 그런대로 돈 쓴 보람이 있구만."

그렇게 누가 봐도 임시로 만들어진 비행장에 세워진 비행기에 오른 정영주 회장이 꺼낸 말에 북한 당국자들이 허허거리면서 웃던 그 때.

내 눈에 이 자리에 있어선 안되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 두 사람은...'

현 북한 최고지도자의 친 여동생 김희경과 그의 남편 장택일이었다.

그렇게 내가 두 사람을 발견하자 두 사람도 내가 두 사람을 알아본 것을 눈치 챈 것인지 슬쩍 나와 정영주 회장에게 다가와 인사를 하고는 내게 말을 이었다.

"만나서 반갑습네다. 김태준 회장. 인민회의 대의원 장택일입네다."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의 인사에 정영주 회장은 슬쩍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부터가 본 게임이라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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