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남북정상회담 (3)
태준이 말한 세 가지 요구라는 말에 클린턴은 자신이 마치 지니라도 된 기분이었다.
'공짜로 해달라는 것도 아니니 뭐라고 할 수도 없고... 거참. 루빈 재무부 장관의 말에 의하면...
아니 굳이 그의 말이 아니더라도 지금까지 해낸 것을 보면, 무시할 수 있는 인물도 아니고....
여러모로 기대가 되면서도 불안하군. 특히 남은 두 가지가...'
그렇게 기대와 불안이 한데 뒤섞인 묘한 기분으로 태준의 말을 기다리던 클린턴은 이어진 태준의 첫 번째 요구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정해놓은 레파토리를 읊기 시작했다.
"첫번째야 익히 아시다시피. 남북정상회담 관련한 이야기입니다."
"그 부분이야.. 익히 들었던 내용인 만큼 이야기가 빠르겠군요.
일단은 로비를 진행한 김회장도 알고 계시겠지만....
공화당측은 북한에 대한 유화정책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94년 미북 제네바 합의가 표류하게 된 것도,
이에 경수로와 원유가 북한으로 들어가지 않게 된 것도 공화당의 반발 때문이지요.
애초에 선거에 진 우리 민주당에도 책임은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그 책임에 정치적인 자존심을 세울 이유가 우리 민주당에는 없어서 말이죠.
어차피 몇 년 안 가 망할 나라. 적당히 합의해주는 척 쇼하면서 버티면 우리 미국으로서는 이득이라는 인식이 있기도 하고요. 민주당 내에서도."
그런 클린턴의 말에 태준은 속으로...
'그 망한다던 나라가 2021년을 너머 자식에 손자까지 승계 하나만큼은 제대로 된 왕조국가가 되지만.....
이 때는 그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겠군.
자본주의의 나라 미국이니. 돈이 없으면 굶어 죽을 것이라 생각했을테니.
한국하고 알고 지낸지도 조선시대까지 올라가면 100년도 넘는 나라가 아직도 한국인의 기질을 몰라서야...
악착같이 버텨내는 것에는 선수인게 한국인인것을.... 쯧.'
이해와 핀잔을 섞어 클린턴으로 대표되는 미국 정가의 인식에 대해 비판했다.
하지만, 그런 비판을 초장부터 내뱉기에는 아쉬운 소리를 해야하는 입장이었기에 태준은 조심스럽게 말을 고르고 골라 클린턴에게 접근했다.
"맞는 말씀입니다만... 문제는 뒤에서 버티는 중국이지 않겠습니까?
러시아야 이번 모라토리엄을 계기로 북한에 개입할 여력을 상실해 버린데다,
노대호에 이어 벌써 10년, 대통령끼리로만 쳐도 3대째 이어져오는 한국과의 인연이 있는 만큼 대화가 가능한 상대이지만...
중국은 외려 위험할 수 있습니다. 예측하신대로 북한이 질식해 죽어 나자빠져 진다면,
중국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장진호를 떠올려주십시오."
태준의 말에 클린턴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중국에 대한 견제라... 꼭 공화당 쪽 인사들이나 할 법한 말씀을 하시는 군요."
"공화당쪽 인사들의 말이라고 전부 틀린 것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저는 민주당을 대표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 말에 태준이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아니죠. 미국의 대표자(president)이시죠. 민주당의 대표자가 아니라."
간만에 날린 태준의 잽에 클린턴은 쓰게 웃으며 그 잽을 받아냈다.
"그 전에 민주당원으로서 지켜야 할 가치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클린턴의 유한 태도에도 태준은 물러설 이유가 없다는 듯이 바짝 추격해가며 클린턴을 공략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민주당 내에서도 과연 중국을 견제해야 한다는 주장이 없었습니까?"
"그럴리가 있겠습니까? 민주당이 데탕트를 주도하고 있는 입장이라고 해서 공화당쪽 인사들이 비난하는 것 처럼 공산당인 것은 아닙니다."
"그럼 가능한 이야기 입니다. 중국이 언제까지고 미국과 주요 선진국의 공장으로서만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에 대해 조사를 해보셨다면 아시겠지만, 아세안 국가들은 물론이고 러시아에도 사업을 전개해나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진출한 국가들 중 브루나이를 제외하고는 전부 거대한 규모의 공장이 들어가있거나, 들어갈 예정이지요.
왜 제가 다른 모든 국가에는 공장도 짓고, 통신 설비도 직접 깔아가며 장사를 하는데 왜 중국에서만 안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태준의 질문에 클린턴이 잠시 멈칫 하더니 말을 이었다.
"공산주의자에 대한 혐오 때문에 그런 것은... 너무 김회장을 얕보는 것일테고, 중국이 지적재산권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김회장의 사업에서 지적재산권은 핵심이니까. 첨단 기술부터, 패션까지. 전부 사람들 머리로 굴려나가는 사업이니까요."
그 대답에 태준은 속으로 답답함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일차원적인 대답이 있단 말인가... 경제적 업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은 대통령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능력이 없는건 아닐테고... 사람 보는 눈으로 여기까지 올라온 건가.'
그렇게 답답한 마음에 입만 축이고 내려놓았던 술잔을 들어올린 태준은 이내 한 번에 술잔을 훅하고 위로 들어올려,
- 스읍.
한 입에 그 독한 위스키를 털어넣고는 가볍게 잔을 유리탁자위에 올려두며 말을 이었다.
"그건 부차적인 이유일 뿐이죠. 제 아무리 배끼는 걸 잘 한다 한들 원조를 이길 수 없고, 노하우를 가져갈 수는 없으니까요.
진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중국인들의 기질입니다."
"이곳은 한국이 아니오. 김회장. 인종차별적 발언을 하려거든...."
"인종차별적 발언이 아니니 걱정하지 마시죠."
태준의 단호한 표정과 말에 클린턴이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술병을 가져와 태준에게 따라주자, 태준이 말을 이었다.
"중국인들은 예로부터 외적의 침입을 많이 받아왔습니다. 정확히는 중국의 주류라 할 수 있는 한족들이 그러했죠.
상고시대부터 가장 최근에 있었던 중국의 왕정국가인 청나라까지. 역대 왕조들과 국가들을 살펴보면,
북위, 요, 금과 같은 지역패권을 장악한 왕조에서부터 원, 청과 같이 중국 대륙 전역을 장악한 왕조에 이르기까지
꽤 많은 국가들이 한족이 아닌 다른 이민족들의 국가였고,
그런 불안정한 역사적 배경에 따라 한족들은 기묘한 문화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기묘한 문화?"
태준의 때 아닌 역사강의에 클린턴도, 그리고 옆에서 들러리를 서던 조던과 힐러리도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말을 이었다.
"예. 바로 계약보다 합의를 중시하는 문화입니다."
"계약...보다 합의가 중시된다?"
"예. 그들에게 있어 계약은 '그 당시에 맺은 합의'를 글로 적어놓은 것일 뿐 그 어떤 구속력도 없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조사해보시면 아시겠지만, 그런 중국인들의 특성탓에 계약 불이행에 따른 피해를 입고있는 기업들이 꽤 많습니다.
개인간에도 이러한데 국가간에는 어떻겠습니까?
본질 자체가 정글과도 같은 국제관계에서 서로 잘 지내보자고 손을 내밀었어도 언제고 뒤통수를 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조약따위는 무시하고도 남을 사람들이 바로 중국이라는 사람들이고 정권인겁니다.
상황이 바뀌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또 다른 협상을 아무렇지도 않게 제기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죠.
그건 우리로서는 악일지 몰라도 중국인들, 그리고 중국 문화에서는 당연한 것입니다. 이 괴리가 있는 한.
우리는 중국과 신뢰를 기반으로 한 대화를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자연히 그들이 힘을 갖게 키워주어서도 안 되고요.
상황이 바뀌어 버리면 입장도 바뀐다는게 중국인이 가진 민족적 문화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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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태준이 첫번째 조건에 대한 설득과 함께 중국 역사를 강의하고 있던 그 시각.
아베는 소프트방코 제 1 노조와 함께 시위에 나섰다가...
"이봐! 아베선생!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짓이야!"
"저런 귀족 노조의 요구에 편승하다니...! 우리들은 다 말라 죽으라는 건가!?
만약 소프트방코에서 저 요구를 수용하기라도 하면! 우리 회사 노조들도 가만히 있지 않을텐데!"
자신을 지지하고, 후원하는 강경 우익세력들에게 둘러 쌓여 호된 꼴을 당하고 있었다.
"이러지들 마시고..."
"이러지 말긴 뭘 이러지마! 우리가 당신을 지지하고 도운 이유가 뭔데! 이런 좌파용공 아카야로(빨갱이)를 도우라고 그런게 아니라고!"
"저는 그저... 한국을 규탄하기 위해.."
"그럴거면 한국이나 규탄하지 어디 생각없이 노조 편을 들고 나와! 엉!?"
그렇게 호된 꼴을 본 아베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눈만 도르르 굴리고 있었고,
이런 과정을 소프트방코의 사옥이자 KTJC의 사옥이기도 한 빌딩 최상층에서 지켜본 타케미치는 손의정을 앞에 두고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방법이 너무 거칠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손의정 사장.
정치권이 시끄러운 틈을 타 노조를 이용해 장악력을 얻으려고 하다니... 실망이군요."
"타케미치씨..."
그렇게 타케미치가 진짜로 실망이라도 한 듯이 쓰게 웃으며 말하자 손의정은 당황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말을 이었지만,
"일본은 손의정 사장에게 맡기자는 우리 소주주 연합의 발상이 잘못되었음을 지금이라도 확인하게 되었으니 안심입니다."
타케미치의 있지도 않은 연합 운운에 가차없이 잘려나갔다.
그렇게 은연중에 우위를 점한 타케미치는 슬쩍 창 밖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거기다... 하필이면 붙어먹은게 우리 헤이세이 연구회가 아니라 저 아베라는 것도 더욱 실망이군요.
다케시타 선생께서도 크게 상심하셨습니다."
그 말에 손의정이 자리에서 일어나 타케미치에게 도게자를 박으며 말을 이었다.
"실망시켜드려 죄송합니다! 상황이 꼬이다보니... 저는 그저 김태준 회장의 영향력만 어떻게든 줄여보려고..."
"헌데 방법이 잘못되지 않았습니까. 방법이."
"죄송합니다."
"우리가 말한 영향력이란 걸 잘못 이해한 듯하니 다시 한 번 설명해드리죠."
타케미치가 도게자한 손의정을 억지로 일으켜 세우며...
"우리가 말한 영향력이라는 건... 각지에서 그러니까... 미국에서는 오브라이언 재단이, 일본에서는 손의정 당신이.
그리고 태국 동남아 지역에서는 오오와다 부부가 '실질적 1인자'로서 군림하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말하자면... 각 지역에서 정이대장군(征夷大将軍) 노릇을 하자는 느낌인거죠."
말한 말은 손의정에게 충격을 주기 충분했다.
"정이... 대장군...?"
"예. 실권을 가진 2인자가 되자는 말입니다. 회장님은 우리 KTJC의 덴노로 두고. 소유보다는 지배. 잊으신 겁니까?"
그리고 타케미치의 말을 듣고 나서야 손의정은 자신이 사인한 그 때 그 계약서가 무엇을 뜻하는지,
자신이 무엇을 오해했는지를 깨닫고는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저를.. 속인겁니까?"
"속인건 제가 아니라, 당신의 욕망이죠. 저는 거짓을 말한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완전히 넋이 나가버린 손의정의 표정을 본 타케미치는 산뜻한 미소를 지으며 창 밖을 엄지로 몇차례 가리키고는 말을 이었다.
"손사장이 싼 똥은 알아서 치우세요. 잘 치우면... 처음 이야기 했던 것처럼 일본 KTJC의 정이대장군으로 만들어드릴테니.
아, 그리고 한국 유니버스측에 시마네현에 공장하나만 유치해오시죠. 그냥 제가 말씀드려도 되겠지만. 아무래도 전 표면적으로는 주주일뿐인지라."
그 말과 함께 사라지는 타케미치를 보며 손의정은 힘겹게 타케미치를 불러세웠다.
"타..타케미치씨."
"예. 말씀하시죠."
"그럼 당신이 바라는 것은 뭡니까. 뭘 바라기에 저를 여기 박아놓고... 저를 속인겁니까?"
그렇게 불러세운 타케미치가 잠시 생각하더니...
"바라는 것이라... 글세요. 굳이 친다면 저는... 회장님께서 곤란하실 때 쓸 수 있는 닌자 같은 자인지라.
바라는 것이 있다면 회장님의 끝 없는 성공이겠지요. 저 개인적으로는 회장님께 득이 될 수 있는 곳까지 정계에서 올라가는 것이고요."
가볍게 답하고 사라지자, 손의정은 사라진 문을 멍하니 보다 이내...
"젠장... 완전히 당해버렸군."
한탄 섞인 한숨을 쉬고는 머리를 탁자 위에 처박고 두 팔로 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