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러시아 (1)
러시아의 모라토리엄은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느정도 예상이 가능했던 일이었다.
소련이 무너지기 직전 소련이 진 빚은 알려진 것만 20억 루블이 넘어갔고,
소련이 무너지고 난 뒤에도 그 빚은 그대로 승계되어 러시아의 몫이 되었기에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은 모두가 공감하고 있던 것이었다.
실제로 모라토리엄 선언 이전부터 대한민국 정부는 러시아측의 부탁으로 현물 상환,
다시 말해, 돈 대신 물건으로 노대호 시절 빌려준 차관에 대한 상환을 받고 있었으니
이것이 그 유명한 불곰사업이었다.
이런 러시아의 경제상황은 원역사에서도,
그리고 태준이 개입현 현재에도,
거의 유사하게 진행이 되고 있었지만,
한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시기였다.
당시, 그리고 얼마 전까지의 러시아 경제 상황을 보면
소련 붕괴 이후 빚을 갚기 위해 채권을 무지막지하게 찍어냄과 동시에 미국을 중심으로한 서방세계 금융가의 투자를 받아 어떻게든 경제를 살려보려고 발악을 하는 모습을 보였다.
원 역사에서는 이렇게 러시아가 발악에 가까운 경제개발 프로젝트를 한창 진행해 나가던 시점에 동남아에서부터 시작한 금융위기로 인해 러시아에 투자되어있던 자금이 빠져나가며 사실상의 국가 부도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었지만,
현재 태준이 개입한 역사에서는, 한국을 지키기 위해(정확히는 동남아에서 금융약탈을 하고 이 악명을 퀀텀펀드에 뒤집어 씌우려는 태준의 계략) 나선 태준에 의해 동남아시아의 금융위기는 생각보다 시시하게 막을 내리게 되어 원 역사에서 러시아가 겪은 부도를 맞을 일은 없었고,
그 덕에 러시아는 원 역사보다 몇 개월은 더 버틸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여기까지만 놓고보면 파산 트리거가 사라진 러시아가 망할 이유가 없어진 것처럼 보이겠지만....
"키리옌코를 정리하셔야 겠습니다. 각하."
"잘 하고 있는데 왜."
"나라만 산다고 사는게 아니지 않습니까? 민영화된 기업들, 그 기업들이 망하면 그 기업 밑에서 일하는 인민들은 무슨 꼴을 당하겠습니까?
키리옌코 총리의 개혁안에서 수용가능 한 지점은 IMF 구제금융을 받는 것. 딱 거기까지 입니다. 지금 보십시오. 루블화가 또 떨어지고 있습니다. 주가는 말할 것도 없고요."
"베레조프스키 회장... 자네가 진정으로 우려하는 것이 인민의 생계인가?"
"당연하지 않습니까."
"....자네는 김태준이 아니지. 자네가 한국의 김태준이었다면, 지금 이럴게 아니라 자네가 가진 막강한 자금력으로 어떻게든 이 사태를 막아보려 세계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을테니까."
"..... 그 자는..."
"그래. 그 자는 금융인으로 시작한 인물이지. 맞아. 당연히 정치로 사업을 시작한 자네와는 결이 다를거야. 하지만.
나라에서 민영화 하는 회사들 전부 독식했으면, 그만한 책임은 보여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게 불만이신데 왜 아직도 저랑 이야기를 나누고 계신 겁니까?
ORT, 네자비시마야 신문, 아에로플로트. 전부 제게 주셨지요. 맞습니다.
다만 그게 전부 제 것입니까? 저 혼자만 이득을 본 것입니까?"
"알지. 알아. 하지만. 책임도 지지 못할 바에는 인사에 대해 논하지 말라는 이야기이네."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 아니, 그럴 수 있으면 그렇겠지요. 키리옌코 그 애송이 총리가 하려는 일이 고작 피 몇방울 흘리는 데서 끝나는 일이라면, 충분히 인내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란 말입니다. 각하.
그 놈은 정치는 안중에도 없고, 그저 수치만 보고 부실해 보이는 은행과 기업들에 받아온 구제금융을 주지 않고 도태시킬 생각이란 말입니다.
그 과정에서 일어날 피해는 생각해 보셨습니까? 인민들이 굶어죽기 이전에 각하와 각하의 사람들이 찢겨 죽어나갈거란 말입니다!"
러시아의 최고권력 옐친과
러시아의 최고금력 베레조프스키와의 대화를 통해 보여지듯,
러시아는 찍어낸 채권과 들어오는 외부 투자를 전부 권력과 권력을 지탱하는 금력을 강화하기 위해 쏟아부었고,
그 과정에서 부실한 기업이 계속해서 살아남아 러시아 경제의 발목을 잡고있는 상황이었기에,
태준이 아시아 금융위기를 막아주었다고 한 들,
파산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 상황으로 흘러가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한국 정부의 실무자들은....
"난감하군. 1차 불곰사업이 이제 막 끝났는데. 이제는 아예 모라토리엄까지 선언해 버리다니..."
"대통령께선 아직 답변이 없으신가?"
"예. 여러모로 골치를 썩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러시아가 완전히 배 째라고 드러누워버린 이상 대통령이 아니라 대통령 할아버지가 와도 답이 없겠지.
그렇다고 지금 옥살이 하고 나와서 쥐 죽은듯이 살고 있는 노대호에게 책임전가를 하기도 모양새가 이상하고...
전 정부 책임으로 몰자니 아직도 전 정부에 대한 지지율이 하늘을 찌르는 상황이라... 난감 하실거야."
"일단은 지불 유예인 만큼...."
"말이 좋아 지불유예지 조금만 지나면 차관에 대한 감면을 요구하다가 그도 안되면 아예 같이 죽자고 협박할 수도 있어."
"후... 이거 난감하네요."
대통령이 들고 올 외교적 해법을 기다리며 발만 동동구르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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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에서요?"
"예. 최대한 빨리 뵐 수 있는지 물어보라고..."
민영의 말에 나는 슬쩍 인상을 쓰며 말을 이었다.
"이미 거래는 다 끝난걸로 알고 있는데 또 뭘 시키시려고..."
"러시아 문제 아닐까요? 뉴스에서 보니까 완전히 돈 떼이게 생겼다고 다들 난리던데요. 일본 기업들은 벌써 러시아에서 철수 시작했다고도 하고."
그 말에 나는 슬쩍 고민하고는 말을 이었다.
"준비하세요."
그렇게 민영을 통해 청와대에 방문의사를 전하고
바로 청와대로 향한 나는 도착하자마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김태충 대통령을 보며
사안의 다급함과 김태충 본인의 갈급함을 느낄 수 있었다.
"러시아 진출 준비하는 것으로 알고 있네."
"예. 맞습니다."
"지금 당장 러시아로 가줄 수 있겠나?"
"제가 직접 가달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가서 채권 관련 협상을 해주게."
그 다급하고 간절한 표정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가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만. 아무 조건 없이 움직일 생각은 없습니다."
"나도 그냥 거저 부려먹을 생각은 없네."
"어떤 걸 주실 생각이십니까?"
그 말에 김태충은 작정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방송사업자. 하나 내주겠네."
그 말에 나는 눈을 부릅 뜰 수 밖에 없었다.
정두황 정권.
언론통폐합으로 재벌들이 가진 신문사 방송사를 뺏고 기업들이 방송사를 운영하는 것은 말 그대로 불가능해 진 상황이었다.
그나마 사성이 지난날 아세아방송을 빼앗겼던 한 풀이를 하고자 케이블 사업에 진출하긴 했지만
뉴스도 마음대로 못하고 그저 설립 당시 신고한 특정 장르의 프로그램만 송출하는 케이블 방송은 다른 재벌들에게 매력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런 상황을 김태충이 고려했다면 지금 제안하는 것은...
"전국구 순수 민방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케이블이 아니라."
"... 아니. 케이블은 케이블이지. 하지만 일반 케이블하고는 다르네. 보도기능을 더한 특수한 케이블 채널을 만들 생각이네. 그걸..."
"종합편성채널을 만드실 생각이십니까?"
"종펴...음. 이미 들은게 있나?"
김태충이 당황하며 내게 묻자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아뇨. 그저 저 역시 스튜디오를 가지고 있어 미디어 업계 용어를 잘 알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군. 여하튼 그 종편인가에서 자네는 무조건 통과시켜주지."
그 말에 나는 슬쩍 탁자 위에 있는 찻잔을 보고는 말을 이었다.
"내키진 않는 군요."
"뭣...! 대체 뭐가 문제인가?"
"우선 전 종편이 필요 없습니다."
'이미 유니버스넷이 있으니까.'
내 말에 김태충이 놀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래. 자네가 딱히 언론에 욕심 안부리는 것은 좋네만..."
"그리고 두 번째. 러시아엔 사성과 수성...
아. 이젠 LM그룹이던가요. 사성과 LM이 이미 진출해 있는데
구태여 이제 막 진출하는 제가 현지 정치권력과 엮이는 건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 즉. 값이 부족하다 이거군."
"다른 나라도 아니고 러시아니까요. 저도 인간인지라 홍차가 무섭습니다."
내 너스레에 김태충이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수성과 LM은 알다시피 나와 사이가 별로야.
자네와 엮인 악연 따윈 가볍게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지.
믈론 거래를 하면 들어는 줄거야. 하지만 그들은 자네처럼 값만 받아가는게 아니라 정권까지 뽑아가겠지.
돈 때문에 나라를 팔 수는 없지 않나?"
김태충 본인과 나라를 동일시 하는 그 말에 황당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국민의 선택을 받은 대통령의 권력이 기업에 탈취당한다면
그건 그대로 문제라고 생각하며 최대한 표정관리를 하고는 말을 이었다.
"그럼 제대로 된 값을 제시해보시죠. 대통령께서도 기업인 출신이시지 않습니까?"
"기업인은 무슨 그냥 배몰고 나가 물건이나 떼다 판 수준인데.
이번에도 자네가 제시해보지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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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에서 나온 나는 곧장 조던에게 연락을 취했다.
"준비는 다 됬습니까?"
"로비 건 말인가?"
"예."
"준비랄 게 있나. 돈 주고 원하는 거 말하는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
왜. 무슨 일 있나?"
그 말에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을 이었다.
"미국 쪽 로비는 조던에게 맡기겠습니다."
"건너 올 거라더니 못 오나?"
"예. 급하게 처리할 일이 있어서요."
내 말에 조던이 침음성을 흘리더니 말을 이었다.
"러시아 문제겠군. 내 알기로 우린 물린 게 없는걸로 아는데? 아닌가?"
조던의 말에서 미약하게 흘러나오는 불안을 느낀 나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맞습니다. 러시아로 갑니다."
"왜지? 설마..."
"생각하시는 일은 아닙니다. 사업차 가는 겁니다. 돈 벌러."
내 말에 조던이 이내 안심한듯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그래. 알겠네. 돈 벌러 간다는데 꼭 오라고 할 수는 없지.
그래도 기왕이면 정상회담 전에 클린턴을 한 번 봐야할테니 빨리 끝내고 오게."
그렇게 조던과의 전화를 마치자 옆에 앉아있던 민영이 대통령과 내가 서로 나눈 각서를 살펴보더니 이내 놀란 눈으로 말을 이었다.
"이 조건..."
"꽤 먹음직스럽지 않습니까?"
.
..
...
"이번에도 자네가 제시해보지 그러나."
"주시려던 것에 더해 방송 3사의 모든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의 전송권을 주시죠.
기한은 15년.
이후 1년마다 자동갱신.
전송권은 인터넷 네트워크로 한정하고 소유한 종편사에서는 재방송을 하지 않는 조건으로 하고 싶습니다.
어차피 정두황 덕분에 방송3사가 사실상 정부소유니까 가능하지 않습니까?"
"무료로 달라는 건가?"
"그럴리가요. 전송권 계약은 제대로 맺을 겁니다.
다만 그냥은 절대 해줄 리가 없으니 정부가 나서서 해달라는 거지요.
명목도 좋지 않습니까? 디지털 아카이빙 명목으로 사업을 진행하면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역사를 기록하겠다는데."
그렇게 김태충과의 대화를 떠올린 나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민영에게 말을 이었다.
"이번 일을 잘 해내서 이 계약대로 방송 3사의 예능과 드라마들의 전송권을 전부 받아낼 수 있다면...
후발주자로 나올 인터넷 기업들을 초격차로 따돌리는 걸 넘어 압도적으로 짓눌러버릴 수 있게 될겁니다."